우리동네 역사 기행 – 대구 범어모둠
회의에서 모둠활동 방안을 모색하던 중 역사 탐방 ‘대구시 숨은 곳 찾기’ 프로젝트를 기획하게 되었습니다.
모둠원인 이동철 님이 역사 기행 기획과 해설을 맡아 주기로 하셨습니다.
모둠원들과 두 번째 오프라인 만남,
설렘 반 기대 반으로 영남 제일관 앞에서 모여 반갑게 인사했습니다.
가벼운 인사에 이어 역사 기행이 시작되었습니다.
영남 제일관은 처음부터 현재의 웅장한 모습을 갖춘 것이 아니라 흙을 주재료로 쌓은 대구 읍성의 일부분이었다고 합니다.
일본 침략에 대비하여 교통의 요지에 쌓은 대구 읍성이 아쉽게도 임진왜란 때 파괴되었고
그 이후 140년이라는 세월이 흐른 뒤 재건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오랜 세월이 흐른 후 1908년 대구읍성은 다시 한번 민족의 아픈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는 불운을 겪었습니다.
그것은 일본인 상인들과 경상북도 관찰사 서리 겸 대구 군수로 부임한 박중양의 친일행각 때문이라고 합니다.
박중양은 이토 히로부미의 양자라는 별명이 붙을 만큼 친일 인물인데
옛것을 고쳐 새것으로 만든다는 명분으로 조정의 명령도 무시하고 읍성을 철거했습니다.
이후 재건의 과정을 거쳐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성문을 따라 2층 성루에 오르면 용도에 따라 설계된 성벽의 네모난 구조에서 선조들의 지혜를 엿볼 수 있었습니다.
망루에서 왜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을 당시를 떠올리니 그때의 참담함이 느껴졌습니다.
안으로 들어서면 사대문이 있었던 대구 읍성의 모형이 있습니다.
종로를 중심으로 남북은 행정중심권, 동서는 생활중심권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설명을 충분히 듣고 여기서 잠시 멈춤과 살핌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자세를 바르게 하고 모든 동작을 멈추고 코끝에 숨이 들어가고 나감을 알아차리는 1분 명상을 했습니다.
명상을 마쳤을 때 다시 가벼운 마음으로 돌아왔습니다.
망루를 내려와 다음 목적지로 이동했습니다.
곽재우 기념관은 도로 건너편에 있어 둥근 아치형 육교를 건너 들어가면 되는 구조였습니다.
아담한 기념관 안에는 홍의를 입고 말을 탄 곽재우 장군의 사진이 걸려 있고 곽재우 장군의 연보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곽재우 장군(1552~1617)은 경남 의령출생이고 조선시대 의병장이자 성리학자셨습니다.
곽재우 장군은 34세에 과거에 급제했으나 논지가 왕의 뜻을 거스른다는 이유로 합격이 취소되자, 벼슬을 포기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학문을 닦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습니다.
곽재우는 그해 4월 22일 전국 최초로 의병을 일으켰고 부친으로부터 받은 붉은 비단으로 옷을 지어 입고 스스로 천강 홍의 장군이라 하였으며 신출귀몰한 유격 전술로 적을 크게 물리쳤습니다.
장군은 낙동강을 통해 군수물자와 병력을 운반하는 적선을 기습해 적의 보급로를 차단하는데 크게 이바지했으며 현풍, 창녕, 영산에 주둔한 왜군을 공격해 물리쳐 곡창지대인 호남 지역에 들어가지 못하게 막았습니다.
그해 10월 왜군이 진주를 노린다는 정보를 입수한 김성일이 곽재우, 윤탁, 장윤충등에게 진주를 구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진주시 옥봉동에서 윤탁은 군사 200명, 장윤충은 군사 100명을 잃고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곽재우 장군은 이들과 다르게 직접 교전은 피하고 전라의병 일만과 홍의장군이 내일 도착해 싸울 것이라는 소문을 내는 심리전을 벌여 전쟁에서 이기고 연이어 공을 세우자 조정은 관직을 내려 치하했다고 합니다.
한편 장군이 의병을 창설하기 위해 처자의 의복까지 걷어다 자신을 따른 병사들의 가족에게 나누어 주어서 곽재우의 처자들은 매부 집에 의탁해서 살아야 했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곽재우의 의병대는 국가의 지시나 관의 요청 없이 사적으로 군사를 일으켰고,
관청 창고의 물자와 세곡미를 이용했기 때문에 도적이나 반란 세력으로 의심받을 소지가 있었다고 합니다.
또 정대성이라는 사람이 의병을 일으킨답시고 장정들을 모아 도적질하다가 합천군수에게 잡혀 참수당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곽재우 장군도 도적으로 오인되어 체포령이 내려졌다고 합니다.
그때 그를 구해준 사람이 이황의 제자 김성일이었습니다. 김성일은 곽재우의 죄 없음을 짐작하고 도민들을 불러 모아 유시를 내렸습니다.
이때부터 곽재우 의병대 활동은 의로 일어난 군대로 인정받아 합법적인 지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1594년까지 열성적으로 나라를 지켜오던 곽재우 장군은 1595년 말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왜란이 끝날 때까지 재야에 머물렀다고 합니다.
집중해서 해설을 듣고 있는데 타 관람객이 좁은 공간 안으로 밀고 들어왔습니다.
타 관람객들이 나가지 않고 이동철 님의 해설을 함께 경청했습니다.
해설이 끝나고 1분 명상 종이 울렸습니다.
기념관 안은 조용했습니다.
한두 명의 움직이는 소리가 들릴 뿐 일반인이 명상에 동참하니 고마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이어서 밖으로 나와 말을 탄 곽재우 장군의 동상을 둘러보고 벤치에 앉아 나누기 시간을 가졌습니다.
아래는 참가자들의 나누기입니다.
뜨거운 햇살 아래 해설해 주신 이동철 님께 감사하며 시원한 공원에서 모둠원들과 함께 역사와 홍의 장군에 대해 알 수 있어 감사한 마음이었고 멈춤과 살핌 1분 명상은 지금 들었던 내용을 오롯이 새길 수 있어 좋았습니다.
대구에서 태어나고 자랐음에도 불구하고 수성구에 영남 제일관이 있는 줄 몰랐습니다. 영남 제일관이 대구읍성에 있던 사대문 중의 하나임을 알았고 잠깐 멈춤과 살핌의 시간을 가짐으로써 역사 공부를 마음에 강하게 새길 수 있어 참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대구에서 나고 이제껏 살았지만 망우 공원과 곽재우 장군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습니다. 끊임없는 왜구의 침략에 더해서 무능한 왕들 때문에 백성들은 더 힘들었겠다 싶은 생각이 들고 곽재우 장군이나 이순신 장군과 같은 분들이 있어 역사가 굽이굽이 흐를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곽재우 장군의 호가 망우당이어서 망우 공원이라 불린다는 것을 처음 알았습니다. 멈춤과 살핌의 1분 명상 시간 또한 들뜨기 쉬운 야외활동에 마음 살필 수 있었고 다른 단체와 다름을 느껴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모처럼 도반들과 함께한 역사 탐방은 그 자체로 참 감사한 시간이었다. 영남 제일관이 그저 단순한 문이 아니라 일제 침략으로 인해 역사 속으로 사라질 뻔한 사건들을 알게 되니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만약 박중양이 대구읍성을 그대로 두었다면 어땠을지… 꼭 우리의 유산을 파괴하면서까지 친일해야 했는지 인간의 욕심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는 시간이었습니다.
지금 전쟁의 위험에 노출된 대한민국을, 선조들이 겪었던 전쟁을 막는 데 동참했듯이 나도 해야겠다는 마음이 절로 일어나는 귀중한 시간이었습니다.
나누기를 마치고 싸 온 간식을 먹고 다음 만남을 약속하며 잘 마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