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5 봉림사지 평화와 통일염원 정진을 하며
어슴푸레한 새벽 2시 30분, 설레고 기대되는 마음으로 도반과 함께 진해를 출발해 창원 봉림사지로 향했습니다. 밤길을 달려 봉림사지에 도착하니 먼저 도착한 도반이 반갑게 맞아 주었습니다.
시간이 조금 지나자, 도반들이 하나둘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봉림사지 입구에서 기도터까지는 새벽 정취를 한껏 느끼며 호젓하게 걸을 수 있는 길이 쭉 이어집니다. 평소 새벽별을 보며, 나무와 온갖 풀들이 뿜어내는 싱그러운 향기를 맡으며 걸어갔던 길입니다.
이번 행사에는 참여한 도반들이 함께 트럭을 타고 기도터까지 이동하기로 했습니다. 모든 인원이 트럭에, 한꺼번에 탈 수 없을 것 같아 저는 다른 도반과 함께 걷기로 했습니다.
얼마를 걸었을까? 깜깜한 어둠 속에서도 환히 빛나는 불빛을 발견하고 가까이 다가갔습니다. 길목마다 작은 LED 촛불이, 가난한 여인이 부처님을 위해 밝혔다는, 꺼지지 않는 등불처럼 어둠을 밝히고 있었습니다.
봉사자들의 숨은 정성과 손길이 확연히 느껴졌습니다. 이른 새벽 등불을 밝히기 위해 잠은 주무셨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등불을 밝힌 봉사자들 덕분에 어리석음을 깨우치고 자유롭고 행복한 내가 되겠다고 결심하는 감동적인 순간이었습니다.
얼마를 걸어가자, 트럭 한 대가 올라오는 길목에 저희를 태워 주었습니다. 트럭 뒤에는 도반들이 옹기종기 타고 있었고 뭐가 그리도 좋은지, 소녀 소년으로 돌아간 듯, 말 한마디에도 깔깔깔 웃음소리가 끊이질 않네요.
그렇게 봉사자들은 봉림사지 815 통일 정진을 위한 장소인 봉림사지터에 도착하자마자, 소임별로 동그랗게 모여 앉아 일감을 세세히 나누었고 본격적인 준비 작업에 앞서 마음 나누기를 했습니다.
이렇게 순차적으로 준비할 수 있었던 건 이틀 전 일요일, 뙤약볕 아래에서 예초기를 돌려 풀을 벴고 행사장 주변을 말끔히 정비하고, 천도재 자리 배치, 상차림 등 사전 리허설을 준비한 덕분이었습니다. 여러 번의 회의를 통해 행사를 기획하고 봉사자를 꾸리며 서로 소통하는 과정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입니다. “그냥 되는 것은 없다.” 다시 한번 마음에 새겨 보았습니다.
A.D.37년, 허황옥 공주와 장유 화상은 인도 아유타국에서 배를 타고 지금의 마산 합포구인 가야로 왔습니다. 그들의 생김새는 피부가 까맣고 타고 온 배도 매우 이국적이었다 합니다. 허황옥 공주는 김수로왕과 결혼해 아들을 열 명 낳았는데, 첫째 아들은 김수로왕을 이어 왕이 되고, 두 명은 왕후의 성을 따서 김해 허씨의 시조가 되었습니다. 나머지 일곱 명은 출가 후 스님이 되어 이곳 봉림사지에 처음으로 절을 짓고 ‘가야정사’라 불렀습니다. 봉림사지는 이렇게 가야에 불교가 전래된 첫 번째 절이 되었습니다. 이런 유래가 있어서인지 ‘경남이 말뚝신심’이라는 이야기도 전해지고 지금도 장유, 장유폭포가 지명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봉림사지터는 현재 문화재 발굴 작업 진행 중입니다. 발굴팀에 의하면 수량이 풍부하고 물길이 잘 정비된 모습으로 비추어 보면 당시에는 연못이 형성되어 있는 아름다운 대가람이었음이 짐작된다고 했습니다.
드디어 새벽 5시, 1부 통일정진을 시작했습니다. 은은히 울려 퍼지는 청아한 목탁 소리와 함께 어둠 속에서도 환히 깨어 있는 마음으로 예불을 올렸습니다. 천일결사 기도 중에는 봉림사지 중창 불사와 평화와 통일을 염원하는 참회기도 발원문을 한마음으로 읽었습니다. 서로서로 이해하고, 돕고, 아끼는 마음을 내어 평화와 통일이 이루어지길 간절히 바랐습니다. 모든 이들이 편안하기를 한 배 한 배 정성을 다해 108배 정진을 마쳤습니다.
이어 2부 특별법회가 시작되었고 통일 기도 수행담, 유수 스님 법문, 천도재가 진행되었습니다. “마음이 고요하고 깨어 있으면 누구나 지혜가 열린다”라는 수행담에 절을 몇 배 했는지에 연연하는 제 모습을 돌아보았습니다. 몇 배를 했는지에 메이지 않고 들뜨거나 화나고 짜증 나는 마음을 잘 지켜보도록 수행하겠다 다짐했습니다. 봉림사지 대가람이 다시 창건되면 ‘대가야사’라는 이름을 붙일 예정이라고 유수 스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마지막으로 지극한 마음으로 천도재를 지냈습니다. 다 함께 손을 맞잡고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부를 때에는 더 이상 굶주리는 북한 동포가 없기를, 적어도 밥은 먹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간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모든 행사가 끝나고 오랜만에 밝은 얼굴로 만난 도반들과 못다 한 이야기와 마음 나누기를 했습니다. 미리 준비해 간 용기에 후원해 준 과일과 떡을 담아 맛있게 먹기도 했습니다. 결코 사사로이 비추는 법이 없는 햇살만큼이나 따뜻하고 의미 있는 하루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