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호사 협회 발표 원고
1. 서론
올봄부터 시작된 탈북자들의 외국 공관 진입 사건은 북한의 식량난과 그로 인해 파생된 탈북 난민의 문제를 국제적으로 공론화시키는데 많은 영향을 미쳤다. 작년 6월 29일 장길수 가족 7명이 중국에서 싱가포르와 필리핀을 거쳐 극적으로 서울땅을 밟은 이후로 외국 공관의 진입은 한국으로 올 수 있는 또 하나의 통로 구실을 하게 된 것이다. 장길수군 가족의 처리가 북한으로의 강제 송환이 아닌 3국으로의 추방을 통한 한국행으로 귀결됨에 따라서 난민들 사이에서는 외국 공관 진입은 한국행이라는 새로운 탈출구가 생겼다. 그 이후로 외국 공관 진입 사건은 줄을 이었고 한동안 남북관계 뿐 아니라 중국과 스페인, 미국, 일본 등 해당 국가의 외교 정책에도 중요한 변수로 작용을 하였다.
또 이들 탈북자들을 정치적 난민으로 인정하라는 국제적 요구가 높아짐과 함께 탈북자 문제 해결에 대한 근본적인 대책 마련을 요구하라는 목소리도 높아지게 되었다. 대북 지원을 통한 북한 식량난과 경제난의 근본적인 해결이 논의되기도 하며 지속적인 기획 탈북을 시도하여 중국 정부의 정책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여론이 형성되기도 했다. 더 많은 대북 지원을 해야 한다는 입장에서부터 북한 지원 물량이 북한 정권을 지탱시키는데 일조하므로 대북 지원을 중단해야 한다는 대북 지원 무용론도 대두가 되었다. 또 중국내에 탈북자들을 보호할 수 있는 시설에서부터 제 3국에서의 난민촌 건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시각과 다양한 방법론이 제기되었다.
한편 기획 탈북 사건으로 인해 중국의 북경이나 동북 3성 등 국경지대는 더더욱 중국 공안의 감시가 심해지고 탈북자들의 인권 상황은 열악해졌다. 기획 탈북을 통해 탈북 난민 문제의 국제적 공론화는 물론 탈북자들에 대한 중국 정부의 정책 변화까지 이끌어내려 했지만 중국 정부는 탈북자들을 제 3국으로 추방할 뿐 이들에 대한 난민 지위는 부여하지 않았다. 국내적으로는 또 다른 기획 탈북 사건이 발생하지 않도록 탈북자들에 대한 대대적인 조사와 검문으로 일관했던 것이다. 그러한 과정에서 탈북자 뿐만 아니라 이들을 돕던 민간단체와 선교단체의 활동가들까지 체포, 연행되고 중국에서 강제 추방을 당하기도 한다. 결국 대다수 난민들의 인권 보장을 위해 기획되었던 외국 공관 진입 사건은 다른 많은 난민들의 중국에서의 삶의 터전마저 위협하고 말았다.
국내외에 탈북자 문제가 대서특필되고 있고 그에 대한 다양한 논의가 진행되고 있지만 탈북자 문제의 해법에 대해서는 아직 합의점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다. 우리 사회는 탈북자들의 존재를 어떻게 성격 규정해야 하는지, 중국 내에 탈북자들의 규모와 그들이 처해있는 상황이 어떤지, 그들이 어떤 인권 침해를 받고 있는지, 그들의 인권이 지켜지기 위해서는 어떤 정책이 필요한지 등에 대한 해답을 갈구하고 있다. 어느 국가로부터, 어느 국제기구로부터도 보호받지 못하는 그들의 존재에 대해 정확한 이해가 필요하다. 그들의 상황에 대해 정확하게 이해할 때 탈북자 문제의 성격 규명과 함께 해법이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2. 북한 난민의 실상
사단법인 좋은벗들에서는 이미 98년 11월부터 99년 4월까지 중국 내 북한 난민들의 실태를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자료 파악을 통해 조사한 적이 있다. 중국의 동북 3성 지역 내의 29개의 시, 현의 2,479개 마을을 조사하여 그 지역에 거주하고 있는 북한 난민의 규모와 분포도, 생활실태와 인권상황을 파악하였다. 표본수가 충분히 크고 조사 지역이 방대하여 이 통계 조사는 발표를 할 당시부터 객관성을 인정받았다. 이 조사를 통해 나타난 결과는 매우 충격적이면서 많은 내용을 시사하고 있다. 조사 결과를 간단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조사 마을 : 동북3성내 29개 시 현에 속한 총 2,479개 마을
– 연변 조선족 자치주 내 1,566개 마을
– 동북3성(요녕성, 연변지역을 제외한 길림성, 흑룡강성) 내 913개 마을
기간 : 1998년 11월 16일 – 1999년 4월 3일 (약 5개월)
■ 주요 조사 내용
– 마을의 총가구수, 총주민수, 조선족 가구수, 조선족 주민수
– 유민의 총수, 가족수, 성별 연령별 구성
– 유민의 거주형태, 거주기간, 생활유형, 경제활동
– 연행 유민의 수 (최근 1개월간)
– 유민의 생활(월경과정, 일상생활, 체포 감옥생활, 인신매매, 결혼생활 등)
■ 조사지역의 탈북 유민의 총주민수 대비 비율은 전체 1.7%, 연변 1.9%, 동북3성 1.6%임.
– 조선족 비율이 높은 마을일수록 탈북 유민의 비율이 높음.
– 조선족 비율이 0%인 지역의 탈북 유민의 비율은 연변 0.7%, 동북3성 1.2%임.
→ 조사 마을 내 탈북 유민의 비율을 기준으로, 연변지역을 포함한 동북3성 지역 중 조사 마을이 속한 29개 시, 현의 탈북 유민수는 최소 14만명, 최대 20만명으로 추정됨.
■ 유민의 거주기간은 3개월 이하가 50.3% (연변 74.6%, 동북3성 19.4%), 6개월 이상이 28.8% (연변 11.4%, 동북3성 48.8%)임.
→ 탈북 유민은 식량을 구하기 위해 월경하여 단기간 머무르는 ‘식량난민’에 해당되지만, 일부는 6개월 이상 거주하는 장기체류자임.
→ 북한으로부터 먼 동북3성 지역일수록 장기체류자의 비율이 높음.
■ 조사지역의 유민 중 여성비율은 75.5%, 남성비율은 24.5%이고, 연령은 20-30대가 60.2%이며, 거주형태 중 결혼은 51.9%임.
– 연변지역의 유민 중 여성 비율은 62.2%, 20-30대는 54.8%, 거주형태 중 결혼은 23.9%임.
– 동북3성 지역은 여성 비율 90.9%, 20-30대는 66.5%, 결혼형태 거주는 85.4%임.
→ 탈북 유민 중 다수를 차지하는 여성은 생존을 위해 불법 결혼을 하거나, 인신매매를 통하여 강제로 결혼하여 살아가고 있음.
→ 조-중 국경으로부터 먼 동북3성 지역일수록 여성 비율이 높으며, 또한 결혼형태로 살고있는 여성의 비율이 높음.
→ 여기서 ‘결혼’이라 함은 법적으로 인정된 혼인관계가 아니라, 인신매매에 의한 매매혼, 또는 소개에 의한 사실혼 관계인데, 법적으로 인정된 혼인관계가 아니므로 보호받을 수 없음(이하, 동일의미).
■ 조사 유민의 69.1%가 결혼이나 친인척에 의탁하여 일하지 않고 생활하고 있고, 일하는 유민들 중 40.9%는 숙식만 해결받고 지원금은 받지 못하고 있음.
→ 일을 하고 지원금을 받는 유민의 경우, 대부분이 중국인 통상임금의 30~50%를 받고 일하며, 노동착취를 당하거나 약속한 지원금을 받지 못하더라도 보호받을 수 있는 방법이 없음.
표본 조사 자료를 과학적으로 분석한 결과 중국 내 난민수는 30만 명 이상으로 추정할 수 있으며, 개별 면담을 통해 들을 수 있었던 그들의 증언은 북한 난민들이 심각한 인권 사각지대에 방치되어 있다는 사실을 생생하게 밝혀주고 있다.
a. 중국으로 유입되는 난민의 변화 추이
북한의 식량난은 지역에 따라 편차가 있으나 92~94년을 전후로 국가의 배급이 전면 중단되면서 시작되었다. 94,95년만 해도 곧 배급이 다시 이루어질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었던 북한 주민들은 가정의 집기물을 팔아 장마당에서 양식을 조달하면서 생계를 이어왔다.
그러나 96,97년에 들어서면서부터 많은 북한 주민들이 기아로 목숨을 잃게 되는 식량난 이후 최악의 상황이 전개되었다. 생계 수단이 없어 아사 위기에 처한 소수의 국경변 사람들이 96년부터 몰래 중국으로 도강하기 시작했다. 97,98년에는 각 지역에서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중국으로 넘어왔는데, 하층 노동자가 주류를 이루던 것이 농민, 학교 교원, 의사, 기술원, 하급관리, 당원과 군인까지 도강 행렬에 동참하게 되었다.
98년에 들어서면서부터는 꽃제비 아이들도 연변 도심에서 상주하면서 방랑 생활을 했고, 이전부터 지엽적, 산발적으로 이루어지던 인신매매 범죄가 98년을 지나면서 조직화, 대량화되는 추세를 보였다. 99년에 들어서서 북한이 최악의 위기를 넘기면서 북한 내의 상황은 호전의 기미를 보이는 듯 했지만 중국으로 넘어오는 숫자는 큰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
한편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가족 단위로 넘어오는 비율이 늘어나고 중국에서 정착하기를 희망하는 난민들이 많아졌다. 또 중국에서도 장기적으로는 안전하게 살기가 어렵다는 것을 자각한 사람들에 의해 한국으로 가려는 요구가 급증하고 있다. 난민 지위 인정을 요구했던 장길수 가족을 비롯한 외국 공관 진입 사건도 그러한 조건 아래에서 파생되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최근의 기획 탈북 사건 이후 중국 공안 당국의 감시가 심해서 탈북 난민이 거주하기에는 아주 위험한 환경이 조성되어 버렸다. 기획 탈북 사건은 결국 극소수의 탈북자에게는 한국행을, 대다수 탈북자들에게는 강제송환이라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b. 꽃제비 아이들
중국으로 도강해 온 어린이들 대부분은 양 부모가 모두 사망하여 없거나 어머니나 아버지 중 적어도 한 사람이 사망하여 없다. 조사자가 만난 150여 명의 꽃제비 아이들 중 22%는 양친이 사망했고, 부모 중 한 쪽이 사망한 경우는 38%, 부모가 모두 생존한 경우라도 양친 모두 질병을 앓는 경우는 26%였다. 이들은 중국에서 돈이나 먹을 것을 구걸하며 잠은 대개 길가 잔디밭이나 역전 모퉁이에서 잔다. 꽃제비 아이들 중 상당수가 여러 차례 중국으로 도강한 경험을 갖고 있다. 이들은 구걸하다가 공안에게 잡혀 북한으로 송환되면 그 곳에서 도망쳐 다시 살 길을 찾아 중국으로 넘어오기를 되풀이하고 있다. 부모님도 모두 돌아가시고 집도 없기 때문에 먹고 살려면 중국으로 오는 수밖에는 없기 때문이다.
(조사자가 만난 150명의 아이들은 평균 도강 회수가 1.8회였음)
98년 여름에 아버지와 어머니, 동생마저 굶어 사망되고 보니 고아로 떠돌아다니며 살았습니다. 중국으로 가면 살 수 있다고 하기에 생각 끝에 친구와 함께 98년 12월에 중국으로 건너왔습니다. 버스를 타고 용정에 왔는데 용정역에서 붙잡힐 줄은 생각하지도 못했습니다. 용정 수용소에서 2일 갇혔는데 주소와 부모 이름을 적고 조사가 끝나면 우리를 조선으로 돌려보낸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아직 아이들이라고 해서 크게 중시하지 않기에 기회를 타 도망쳤습니다.
(18세, 함경남도 함흥시)
밤에는 추워서 록상청(비디오 상영실)에서 잡니다. 그런데 요즘에는 공안의 수색이 매우 심해져서 잡혀가는 아이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연길의 공안들은 주로 밤늦게 우리가 잘 때 들이닥칩니다. 그 전에는 한두 명씩 와서 잡아갔는데 지금은 공안들이 무리지어 10명씩 와서 잡아갑니다. 공안들은 모두 철모를 쓰고 총을 들고 옵니다. 5~6명이 먼저 록상청 문앞에 포위하고 그 다음에 2~3명이 총을 들고 록상청 안으로 들어와서 우리를 잡은 뒤 수갑을 뒤로 채워서 줄줄이 엮어 차에 태워 갑니다. 록상청 주인이 미리 알려 주어 재빨리 뒷구멍으로 도망칠 때도 있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 영락없이 잡힙니다.
(16세 남자, 함경남도 함흥시)
나는 연길 시내에서 한국 사람이나 노래방 주인에게 돈을 빌어 모은 것이 500원이 되어 조선에 계시는 부모님께 갖다 주려고 결심했습니다. 그런데 그만 공안에게 잡혀서 연길 구류소에 갇혔습니다.
연길 구류소에는 나 같은 조선 아이들이 30명이 잡혀 와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랑 같은 방에 있었던 중국 벙어리 아저씨가 우리를 너무 못살게 굴어 우리가 달려들어 때려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감옥을 지키는 사람들이 우리를 불러내서 전기 곤봉으로 배랑 갈비뼈 있는 데를 때렸습니다. 그것을 맞으니까 정신이 아찔해지면서 몸이 퉁 튕겨져 나가서 널브러진 채 정신을 잃었습니다.
(16세 남자, 함경북도 온성군)
c. 임금착취(무임금)
북한 난민은 중국에서 신분 보장이 안 되는 불법체류자로 간주되므로 정상정인 생산활동에 종사할 수 없는 형편이다. 난민들이 신분상의 제약으로 당하는 노동 착취는 심하지만 어느 누구에게도 호소할 수 없는 것이 이들이 처한 현실이다. 또한 난민들의 신분이 노출될 경우 체포된다는 약점을 이용하는 고용주들에 의해 이들의 고통은 가중되고 있다.
중국에 먼 친척들이 있어 방조받으려고 왔는데 친척들이 말하기를 여기에 오래 있으면 안 된다고 하면서 한 농장 마을에 보냈다. 거기에서 소도 사양하고 기음도 매면서 하루하루 지냈다. 주인집에서는 모든 잡일을 저에게 도맡겼다. 하루라도 휴식 시간이 없었다. 마치 옛날 머슴마냥 일이란 일은 모두 제가 해야만 했다. 그러는 중 위병이 발작하여 일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주인집에서는 돈 100원을 주면서 친척집에 가서 병 치료하라고 보냈다.
(61세 남자, 함경북도 은덕군)
소개로 연길시의 한 집에 200원씩 준다고 하기에 두 달 벌어 돈 좀 쥐고 앓는 남편 살리자고 약정하고 보모질을 하였다. 아침 일찍 일어나 밤늦게까지 집 구석구석 청소하고 밥 짓고 다섯 달 나는 아이까지 보는데 정말 앉을 사이조차 없었다. 두 달이 다 될 때 하루는 집주인 마누라가 전화가 왔는데 우리 집에 수색 온다면서 빨리 이곳을 떠나야 하는데 돈은 며칠 있다 준다 하면서 주지 않았다. 그 후 찾아가니 집은 셋집이라 써 붙이고 사람은 보이지도 않았다.
(45세 여자, 함경북도 회령시)
d. 인신매매
식량난으로 국경을 넘는 여성들의 50% 이상은 인신매매에 연루되어 있다. 유형에 따라 ①북한에서부터 인신매매에 연루되어 강을 넘어온 다음 미리 연계된 중국인에게 넘겨지는 경우 ②단독으로 강을 건너왔으나 강변에서 지키고 있던 인신매매자에게 붙잡혀 팔려가는 경우 ③중국의 내륙 도시까지 와서 역전이나 시장에서 붙잡혀 인신매매되는 경우로 나눌 수 있다.
인신매매는 대부분 몇 단계를 거치면서 조직적으로 이뤄진다. 이렇게 조직적인 인신매매가 이루어지면서 조·중 국경에서 거리가 먼 중국 동북3성의 내지(內地)에는 팔려온 북한 여성들이 많이 분포하고 있다. 이들은 인신매매되어 결혼 형태로 팔려가거나 유흥업소에 팔려간다. 결혼의 경우라도 배우자가 알콜 중독자나 도박꾼, 신체불구자나 성격 파탄자가 많아서 북한 여성들은 정상적인 결혼 생활을 영위하지 못한다. 결국 성적인 학대를 당하고 감금과 폭행에 시달리는 여성들이 많다.
우리 녀자 3명이 남성을 따라 밤 7시에 강을 건너 도문으로 왔다. 우리를 한 집에 데려다 주고 차츰 친척과 련계하라 하고는 갔는데, 후에 안 일이지만 이 남자는 조선 녀자를 전문적으로 팔아먹는 인간이였고 매 인(人)당 중국돈 2천 원씩 벌고 있었다.
이 중국 사람 역시 우리를 연길로 데려 가서는 또 3천 원씩 받고 돌아갔다. 그들은 아파트 이층집에 가두어 놓고 옷을 몽땅 벗겨 놓고 이불만 쓰고 있게 하였다. 또 임자가 나서면 우리를 팔아먹을 심산이였다.
우리 가기 전에 한 30대 녀자는 자기로 인해 이 집 주인은 숱한 돈을 벌었는데, 팔아먹고는 그 무슨 방법을 대서는 도망쳐서 다시 자기한테 와야지 그렇지 않으면 주소를 알기 때문에 죽여치운다고 하였다. 자기는 여섯 번 팔려 돌아왔는데 그 주인의 야욕도 채워줘야 한다고 하였다.
나는 한 집에서 가정 보모일을 했다. 어느 하루는 집주인이 나를 보고 이렇게 해서 언제 돈을 모으겠는가 하면서 돈 벌 데를 소개해 주겠으니 한 달 로임이 1천 원씩 하는 데로 가지 않겠는가고 하였다. 그리하여 나는 그 집주인의 소개로 한 남자와 함께 천진으로 가는 차에 올랐다. 우리는 밤낮을 이틀 동안 차를 타고 천진까지 가서 차에서 내렸다. 거기에서 또 버스를 타고 어디론가 멀리 골 안으로 갔다.
나는 그제야 돈 벌러 온 것이 아니라 팔려간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어쩌는 수가 없었다. 목적지까지 도착하자 웬 한족 영감이 마중하고 있었다. 바로 그 영감이 돈 5천 원에 나를 산 것이라고 했다. 세상에 울지도 못할 일이었다. 나는 거기에서 아무런 자유도 없이 밖에도 마음대로 나가지 못하고 갇혀 있다시피 하여 그럭저럭 8개월을 지났다. 처음 왔을 때보다 시름을 놓은 모양인지 영감이 어디로 나가고 없었다. 나는 이때다 하고 짐을 싸가지고 정신없이 그 집을 뛰쳐나왔다.
(46세 여자, 량강도 혜산시)
사람장사꾼은 저를 어느 한 중국의 이름 모를 한 산골 남자한테 팔아버렸습니다. 그 남자는 얼굴이 거무딕틱하고 키는 160cm 초과 못한 난쟁이를 모면한 40 안팎의 중년이었습니다. 그는 저에게 알아듣지 못할 중국말을 지껄이며 나를 방에 갇아놓고 자물쇠로 잠가놓고 어디론가 갔습니다. 밤이 되자 그는 술냄새를 풍기며 굶어서 움직일 맥도 없는 처녀인 저의 몸을 사정없이 유린하였습니다. 그 남자는 내가 도망칠까 봐 쇠사슬로 저의 발목을 개 기르듯이 기둥에다 매 놓았습니다. 저는 이런 비인간적인 생활을 반 년이나 하였습니다.
(21세 여자, 평안남도 대동군)
e. 체포와 강제송환 및 처벌
식량을 구하기 위하여 중국에 넘어온 북한 식량난민들은 현재 중국에서 불법 입국자로 취급되고 있다. 중국에서는 정기적으로 북한 유민에 대한 수색 작업을 벌이고 있으며, 그들을 발견하게 되면 체포하여 조ㆍ중 상호 인도협정에 따라 북한으로 송환하고 있다. 북한에서는 송환된 유민들에게 엄격한 법적 제재를 가하고 있는데, 이 과정에서 유민들은 가혹한 폭언과 구타, 고문을 당하는 등 심각한 인권 침해를 받고 있다.
파출소에서 차를 가지고 다니며 조선 사람이 있다는 집은 몽땅 훑으며 붙잡았습니다. 그리하여 우리 마을은 조선 여자가 다섯이 있었는데 온 마을에 울음판이 벌어져 그 장면을 보고 울지 않은 사람이 없었습니다. 서로 갈라지기 아쉬워 우는 사람, 파출소 사람의 다리를 붙잡고 제발 살려달라고 애원하며 울며불며 하였건만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 분들도 마지못해 이렇게 한다면서 상급의 지시니 우리도 별 방법이 없다고 했습니다.
(23세 여자, 자강도 희천시)
나는 중국에 다섯 번 왔다갔는데 마지막 번에 건너가다 붙잡혀 온성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밀고가 들었고 자주 중국으로 다닌다는 소식에 구경 중국에 가 어떤 사람과 접촉하는가에 대한 의심이 들었기 때문에 혹독한 매로 많이 맞았다. 머리가 터졌고 다리뼈가 끊어져 꼼짝 움직일 수 없기에 방법 없이 가정과 련계하고 내보냈다. 반 년이 넘는데도 지금도 다리를 절고 있다.
감옥이란 진짜 일본놈때 혹형이라 할 수 있다. 주리도 틀고 두 팔을 평형으로 들게 하고 조금만 움직여도 물매가 안겨지고, 말하면 거짓말하고 토실하지 못한다고, 입다물면 주둥이 붙었는가 하고 생트집이니 이래도 맞고 저래도 맞을 바엔 입을 완전히 다무는 것이 상책이었다. 감방은 어두웠을 뿐만 아니라 고약한 냄새로 사람을 질식할 정도지만 배고파도 한 시각 있는 것이 죽을 것만 같다.
(52세 남자, 함경북도 온성군)
회령에 도착하니 제 나라 버리고 가는 놈들 맞아 죽어도 싸다 하면서 사정없이 때렸는데, 어떤 이는 머리가 터지고 어떤 이는 앞니가 다 부러졌고 어떤 사람은 팔다리가 상해 걷지도 못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전쟁 나면 이 새끼들부터 죽여야 된다 하면서 중국 강택민 밥 먹고 살도 쪘구나! 살찐 것만큼 얻어 맞아봐라 하면서 내리치는데 맞고 나면 더 반발심이 나 조선땅에서 살고 싶지가 않다.
추운 겨울에 감방 생활이란 상상해도 알 수가 있다. 다 해진 담요에 이불이 있는데 그 중에서도 기운 센 놈이 추우면 다 빼앗아 덮고 어떤 때 쪽잠을 자고 나면 온몸이 다 얼어 쪼그라져 펼 수조차 없게 힘들었다. 물도 제대로 주지 않아 세수는 물론 대소변도 보기 힘들다. 우리 방에서 두 사람이 굶고 얻어맞아 죽어나갔다. 죽은 사람 놓고도 "이런 놈은 백 개 천 개 죽어도 아깝지 않다." 하면서 "너희들도 봤지? 너희들의 끝장도 이럴 것이다" 고 욕질하였다.
(41세 남자, 함경북도 길주군)
3. 난민 문제의 원인
a. 북한의 경제난과 식량난
북한은 80년대 이후 비경제 부문에 과다한 투자를 했다. 즉 88년 서울올림픽의 공동개최를 위해 아름다운 평양을 건설하기 위해 많은 돈을 들였고, 주체사상을 고양시키기 위한 동상 건립, 연구소의 설립, 미사일 개발, 핵개발 등 합리적인 경제성을 고려하지 않은 곳에 국가 예산을 사용했다. 민간경제는 침체의 길에 접어들었다. 더불어 80년대 말, 90년대 초 소비에트 사회주의 연방의 해체, 동구권 사회주의 붕괴, 그리고 중국의 시장경제의 도입 등으로 소련과 중국으로부터 받아오던 에너지와 식량의 지원과 동구권과의 활발한 경제교류 혜택이 중단되면서 북한은 에너지와 식량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에너지의 부족은 북한 사회에 전반적인 산업의 마비를 불러일으켰다. 탄광에서는 채탄작업이 중단되면서 일반 주민들은 난방을 할 수 없어 산의 나무를 베어 난방에 썼다. 나무를 마구 베어낸 자리에는 밭을 일구었기 때문에 강수량에 조금만 변화가 있어도 홍수와 가뭄을 피할 수 없게 되었고, 공장 가동의 중단은 연쇄적으로 관련산업의 마비를 불러일으켰다. 비료공장에서는 비료가 생산되지 않으므로 농업생산이 저조하게 되고, 전력생산의 부족은 교통 및 통신의 두절 및 상수도 마비를 가져왔다.
경제난이 심화되는 가운데 평야가 적고 산악지대가 많은 지형적인 조건 때문에 만성적 식량부족 사태를 겪어오던 북한은 농업생산성 급감으로 인해 외부의 지원없이는 회복하기 힘든 식량대란을 맞이하게 된다. 사회주의권의 원조 중단, 밀식재배식 벼 농사, 영양단지 방법의 옥수수 농사 등의 주체농법에 의한 농업생산력 감소, 집단농장의 비효율성, 영농장비와 기술의 낙후 등의 악조건과 함께 93년 냉해, 94년 우박 피해, 95ㆍ96년 대홍수, 97년 왕가뭄을 겪으면서 결국에는 3백만 명 이상의 대량아사라는 치명적인 상황에까지 이르고 말았다.
b. 난민에 대한 북한 정부의 입장
북한 정부는 내외적으로 어려운 상황에 직면해 있다. 밖으로는 미국의 주도하에 진행되는 경제봉쇄의 압력과 함께 국제적인 고립으로 인해 경제난 타결에 어려움을 겪고 있으며, 안으로는 식량배급 중단으로 인한 사회적 동요를 맞고 있다. 또한 식량을 찾아 중국으로 넘어가는 탈북 행렬이 심각한 체제 위협 요소로 등장하고 있다. 북한은 ‘고난의 강행군’ 이라는 구호를 내걸고 이 어려운 시기를 넘기려고 하고 있다.
북한 정부는 ‘사회주의 강성대국 건설’이라는 목표 아래 전 주민의 통합과 경제난 타결을 호소하고 있다. 그래서 중국으로 건너간 북한 난민들을 북한 정부는 ‘조국이 어려운 시기에 배고픔을 견뎌내지 못하고 개인의 안락을 위해 중국으로 건너간 조국의 배신자’로 규정하면서 정치범으로 간주, 처벌하고 있다. 살 길을 찾아 강을 넘으려고 시도하는 것 자체가 이미 정치적인 범죄 행위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c. 난민에 대한 중국 정부의 입장
중국 정부는 몰래 강을 건너 중국으로 양식을 구하러 온 북한 난민을 ‘불법 입국자’로 규정할 뿐 ‘난민’으로는 인정하지 않고 있다. 따라서 이들을 중국 법을 어긴 범법자로 취급하여 체포하며, 1960년 북한과 중국이 맺은 상호협정에 따라 무조건 본국으로 송환하고 있다. 중국은 대외적으로도 ‘식량난민은 없으며, 중국의 친척을 찾아와서 도움을 받고 잠시 체류하는 사람들이 있을 뿐’이라고 일관되게 주장하며 난민의 존재를 부인하고 있다. 경제 개발을 위해 전력투구하는 중국의 입장에서 연변 소수민족 지역에서의 소요는 꽤나 부담스러운 문제일 수밖에 없다. 북한 체제의 정치적 안정은 정치, 군사적으로 북한과 유대를 가져왔던 우호국가인 중국에게도 매우 중요한 과제이기 때문이다.
한편 최근에 들어서서 경제적으로 협력하며 교류가 급증하고 있는 한국과의 관계도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비중이 커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난민의 존재는 인정하지 않되, 난민 처리의 문제는 매 사안별로 처리한다는 것이 중국의 방침이다. 러시아에서 잡혀 중국을 통해 북한으로 넘겨졌던 7인의 탈북자 사건이 지나고 장길수 가족 사건부터는 강제송환보다 제 3국 추방을 통한 한국행으로 정책 변화를 하고 있다. 중국도 국제사회의 여론을 무시할 수 없는 입장이 된 것이다.
d. 북한 식량난민의 특수성
북한 난민들의 경우 기타 제3세계 난민들과 다르게 국제적인 관심이 전혀 미치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어떠한 정치적 반대 행위를 한 일도 없으며, 본국에서 정치적 박해를 피해 중국으로 망명한 것도 아니다. 하지만 북한과 중국에서는 그들의 실상을 외부에 알리지 않고 양국 간의 문제로 덮어놓고 있기 때문에 그들의 정확한 실태를 파악하기에 많은 어려움이 따른다. 양국 정부 차원의 정확한 조사가 없었음은 물론, 국제기구에서도 북한 난민들의 어려운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그들의 이해를 대변해 줄 어떠한 기구나 기관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바로 이 점이 북한 난민들을 난민으로 규정하는 데 가장 큰 어려움이며, 그들에게 절실하게 요구되는 지원사업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가장 큰 요인이다. 북한 난민에 대해서 많은 논쟁이 대두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이유로 난민 문제의 해결에 있어서는 적절한 대안이 마련되지 못하고 있다.
4. 북한 난민 문제에 대한 논쟁과 당위
a. 돈을 벌러간 경제 유민이다
가장 일반적인 논쟁의 대상이 바로 북한 난민을 난민으로 볼 수 없다는 주장이다. 먹을 것을 구하러, 또는 돈을 벌러 중국으로 갔기 때문에 이들은 경제 유민은 될 수는 있어도 정치적 난민은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굶어죽는 위기에서 벗어나고자 살 길을 찾아 최후의 방법으로 중국으로 넘어간 경우이며, 좀 더 잘 살려고 소득이 높은 나라에 가서 돈을 버는 불법 이주노동자가 결코 아니다. 그들은 ‘식량은 곧 정치’라는 북한 정치 논리의 희생자들이며, 도강 행위 자체로 이미 정치범이 되어 처벌받을 위험이 있으므로 그들의 탈북 동기와 상관없이 난민으로 규정받아야 한다.
또한 최근에는 한국에 온 탈북자들이 북한이나 중국에 남아있는 가족들을 데리고 오는 경우가 많이 늘고 있다. 정착금을 노리는 브로커들이 조직적으로 개입하면서 국내에 입국하는 탈북자들의 성격이 변질되고 있다. 보다 윤택한 생활을 하려는 경제적인 동기도 포함되어 있지만 북한 내부의 열악한 인권 상황이 주요한 요인으로 제기되고 있다. 식량난으로 인해서 시작된 탈북의 동기가 서서히 북한의 인권 문제로 바뀌고 있는 것이다. 그에 따라 양식을 찾아 개인적, 일시적, 우발적으로 국경을 넘는 행위에서 가족 단위에서 계획적이고 조직적으로 국경을 벗어나는 정치적 망명의 성격이 강해지고 있다.
b. 당사국의 동의 없이는 난민 규정이 어렵다
UNHCR은 당사국인 중국이 난민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있으므로 적극적인 활동을 할 수가 없다는 소극적인 자세를 유지하고 있다. 숨어 있는 난민들을 찾아 국제사회에 알리고 난민으로 규정, 보호받도록 하는 것이 UNHCR의 임무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아직까지 북한 난민에 대한 기초 조사도 진행하지 못한 것은 중국의 난민에 대한 확고부동한 입장에도 이유가 있겠지만, UNHCR의 소극적 활동에도 기인하고 있다. 난민들은 자신들의 권리를 지켜줄 어떠한 단체도 없으므로 국제기구와 UNHCR의 활동을 필요로 하고 있다. 그러므로 난민들의 상황에 대한 실사와 더불어 구체적인 자료로써 중국 정부를 설득하고, 여타 국제기구와 연대하여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것이 필요하다.
c. UN 협약과 의정서에 의하여
국제법에서 말하는 난민이란 1951년 체결된 ‘난민 지위에 관한 국제협약’에 따라 정의된다. 이 협약에 따르면 인종, 종교, 국적, 정치적 견해, 특정 사회단체 참여 등 이유로 박해받아 안전한 피난처를 요구한 사람이 난민이 된다. 이 협약에는 경제적인 이유가 명시되어 있지 않으므로 북한 난민들에게 난민의 지위를 부여하기 어렵다는 것이 중국 정부는 물론 UNHCR 관계자들의 이야기다.
하지만 북한 난민의 경우 아사를 피하기 위한 생존적 이유를 가지고 있으므로 어떤 정치적 박해에 의한 생명위협보다도 더 절박한 난민의 조건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인간의 정치적 생명까지 보호하겠다는 국제협약의 취지에서 볼 때 보다 더 근원적인 인간의 기본 생존권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또한 인류의 보편적인 양심과 윤리의 기준으로 봐서도 북한 난민들을 더 이상 불법 입국자나 범죄인으로 규정하지 말고, 최소한 국제기구나 비정부기구의 지원을 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5. 난민 문제의 해법
a. 근본적인 해결책은 북한에 대한 대량 식량지원이다
북한 난민은 거의 대부분이 북한 내의 식량난으로 인해 발생한 것이기 때문에 북한의 식량난을 해결하는 것만이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것이다. 북한 식량난은 단기적으로 북한 자체적으로는 극복될 수 없다. 비효율적인 농업방식과 저조한 농업생산성과 대부분 마비되어 있는 산업시설, 폐쇄된 사회구조 등의 문제 속에서 스스로 경제를 재건하고 식량 문제를 해결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므로 우선 한국 정부 및 국제사회가 무조건적으로 100만 톤 이상 대량의 식량과 의약품 및 비료, 농자재 등의 인도적 지원을 해야 한다. 현재 북한 주민의 영양 상태나 건강 상태가 매우 열악하기 때문에 그들을 치료할 수 있는 의약품도 함께 지원해야 한다. 그리고 북한이 스스로 농업을 복구하여 식량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비료를 비롯한 농자재에 대한 지원이 함께 이루어져야 하며, 북한 경제의 회생을 위하여 대부분 파괴되어 있는 북한의 산업을 복구하기 위한 지원과 투자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이렇게 최소 3년 이상 지원을 해야만 북한이 어느 정도의 여유를 가지고 경제 회생의 기회를 가질 수 있다.
북한 경제가 살아나고 배급이 다시 이루어진다면 양식을 찾아 중국으로 건너가는 식량난민은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새로운 북한 난민 발생을 차단하고 발생 요인을 제거하는 것이 무엇보다 시급하고 중요한 문제이다. 북한에 대한 식량지원으로 난민 발생의 근원을 제거하는 것이 가장 기본적인 해결책이지만, 그것이 시급히 이루어지기 어렵다면 우선 중국 내에서 북한 식량난민을 보호하기 위한 방안이라도 모색해야 한다. 이들은 신분이 전혀 보장되지 않기 때문에 중국에서 늘 불안한 생활을 하면서 노동착취나 인신매매, 폭행 등을 당하여도 전혀 보호받지 못하고 있다.
b. 중국 정부의 임무
북한 여성의 인권 침해 문제를 비롯하여 북한 난민 문제의 해결에서 현실적으로 당장 중요하게 고려되어야 할 점은 중국 정부의 입장과 태도이다. 중국은 북한 난민들이 거주하고 있는 당사국으로서 문제를 해결하는데 많은 영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우선 중국 정부는 북한 난민에 대한 체포와 강제송환을 중지해야 한다.
중국 정부는 조ㆍ중 간에 맺어진 밀입국자 송환협정에 의해 북한 난민을 강제송환한다고 하지만, 북한 난민들은 정치적 목적이나 범죄 목적으로 국경을 넘은 것이 아니라 거의 대다수가 식량난으로 인해 생명이 위급한 상황에서 자신과 가족을 살리기 위하여 불가피하게 국경을 넘은 것이므로 범죄인으로 취급해서는 안 된다.
둘째로, 중국법으로도 엄하게 처벌되는 인신매매 행위가 북한 여성들을 상대로 광범위하게 벌어지고 있으므로 이를 철저히 근절시키도록 중국 정부가 노력해야 한다. 아울러 이미 중국인 남성과 사실상 결혼하여 혼인생활을 하고 있는 북한 여성의 경우는 본인이 원한다면 공식적인 국제결혼으로 인정하여 합법적으로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조치해주어야 한다.
셋째로, 중국에는 주거지를 정하지 못하고 떠돌아다니는 꽃제비 어린이들이 추운 겨울에도 공사장이나 건물 계단, 농촌의 논밭 짚더미 속에서 잠자리를 해결하고 있으므로 인도주의적인 견지에서 최소한의 임시 주거시설을 마련해 주는 것이 꼭 필요하다.
넷째로, 가능한 한 북한 난민들을 국제협약상의 난민으로 인정하여 신분보장을 해 주어야 한다. 물론 국제협약상으로 볼 때 북한 난민의 경우는 월경 동기가 식량을 구하기 위한 경제적 이유이기 때문에 난민의 요건에 합당하지 않아서 보호받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난민 지위 인정이 어렵다면 최소한 이들이 중국에서 임시적으로 거주할 수 있도록 제도적인 지원이 필요하다.
c. 북한 정부의 임무
북한 정부도 식량난을 초래한 체제 내적인 모순들을 빨리 개혁해야만 한다. 북한 정부는 식량 증산에 장애가 되고 있는 집단농장제도와 주체농법을 신속히 폐지 내지 개선해야 한다. 최근에 진행되는 임금 인상과 신의주 특구지정 등 일련의 개혁 정책이 성공할지에 대해서 선뜻 속단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보다 과감한 개혁의 의지가 필요하며 그러할 때만이 국제적인 신뢰를 얻고 외부 자본을 유입할 내적 동력을 키울 수 있다.
또한 국경을 넘어 중국으로 건너간 북한 난민들을 조국을 배신한 자로 몰아 가혹한 처벌을 할 것이 아니라, 식량난으로 인하여 생긴 생존적 몸부림임을 감안하여 일체 처벌을 중지하여야 한다. 북한 난민들이 인신매매를 당하는 등 온갖 비인간적인 고통을 겪으면서도 쉽게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이유는 북한으로 돌아가서는 목숨을 부지하며 살아갈 길이 없다는 점과 중한 처벌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북한 정부는 식량난을 해결하여 북한 주민의 생존권을 보장할 수 있도록 개혁을 위한 여러 가지 노력을 함과 아울러 돌아온 북한 난민들에게 어떠한 처벌도 해서는 안 된다.
한편 최근의 탈북 사태가 정치적 망명의 성격을 띄는 것에 대해 북한 정부는 주목할 필요가 있다. 죽음을 무릅쓰고 외국 공관으로 뛰어들며 자유를 외치는 탈북자들의 외침은 현재 북한의 열악한 인권 상황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작금의 탈북 사태를 중단하기 위해서는 식량난 해결과 인권 상황 개선이 동시에 병행이 되어야 한다. 식량난 해결만으로는 새롭게 제기되는 탈북의 동기를 막을 수 없는 국면이 되었기 때문이다.
d. 한국 정부의 임무
한국 정부는 북한 난민들이 보호받을 수 있도록 다양한 외교적인 통로를 통하여 국제기구와 중국 정부를 적극적으로 설득하여야 한다. 또한 신속히 추경예산을 확보하여 5,000억 원 이상의 대북 인도적 지원을 아무 조건 없이 즉각 시행해야 한다. 서해교전, 핵개발 의혹 등 악재로 인해 간혹 남북 관계가 냉각되긴 하지만 남북 교류는 여전히 양적, 질적 성장 일로로 나아가고 있다. 정권에 따라, 정책에 따라 좌우되는 대북 지원이 아닌 인도적 입장을 확고히 견지한 상태에서의 지속적인 대북 정책이 필요하다.
한국의 국민들과 민간단체는 북한 난민들의 문제를 외면하지 말고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하여 북한난민들을 구호할 수 있는 다양하고 실현 가능한 사례들을 개발해야 한다. 또한 많은 시민들이 참여할 수 있도록 하여 이 문제가 국민적 관심과 지원운동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적극적인 방안을 모색하여야 한다.
탈북자 문제 해결과 대북 지원은 통일 시대를 알리는 서막임과 동시에 정부간 교류, 민간 교류의 첫 물꼬라는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체제 경쟁 시대는 막을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체제 경쟁의 희생자인 탈북자와 북한 주민의 호소를 외면한다면 통일의 길은 요원할 수밖에 없다.
6. 결론
탈북자들의 외국 공관 진입 사건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그와 동시에 중국내에는 공안 당국의 감시와 검거 열풍으로 하루하루 불안속에서 살아가는 수많은 탈북 난민들이 있다. 그들의 존재는 우리의 기억 속에서 서서히 잊혀지고 있으며 국제 사회의 무대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남북 교류가 확대될수록 이들의 존재는 잊혀지고 말 것이다.
탈북자의 문제는 북한의 열악한 식량난과 인권 상황이 맞물려 발생했다. 식량난 해결만으로도, 인권 상황 개선만으로도 현재의 난관을 극복할 수 없다. 두가지 조치가 동시에 취해질 경우에만 치유가 가능한 합병증으로 발전하고 말았다. 지금이 바로 남북한 정부의 과감한 정책 전환이 요구되는 시점이다.
한국 정부를 비롯한 국제사회는 북한의 경제난과 식량난 해결을 위해 보다 적극적인 대북 지원에 나서야 한다. 한반도와 동북아의 평화를 위해 군비 확산 정책을 중단하고 북한 정부가 국제 사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
한국의 민간단체를 비롯한 국제기구는 북한의 열악한 인권 문제 개선을 요구해야 한다. 자신들의 이해와 요구를 대변해 주는 어떠한 기구도 없는 북한 주민들의 입장에서 북한 정권에 대해 주민들의 권익을 요구해야 한다.
북한 정권도 부단한 자기 변화가 필요하다. 인권 상황 개선으로 흩어진 주민들의 지지를 모으고 적극적인 개혁 개방의 의지를 보여 국제 사회의 지원을 받아야 한다. 국내외적으로 떨어진 지지도를 회복하지 않는다면 정권의 안정은 끊임없이 위협받을 수밖에 없다. 통일을 위해서 남북한 정권과 칠천만 겨레의 지혜가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한 시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