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평화, 자비의 사회화
사람들은 왜 평화롭지 못한가?
평화의 반대개념은 갈등, 불화, 투쟁, 전쟁이다. 도대체 왜 이런 것들이 생기는 것일까? 하나는 서로 다르다고 생각하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서로 같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한국과 일본이 싸우는 것은 ‘너는 너고, 나는 나다’라는 식으로 서로 다르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싸우는 셈이다. 남북한이 싸우는 것은 ‘우리는 한민족이니 하나가 되어야 하는데 너는 왜 딴 살림 차리느냐?’ 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같아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싸우는 것이다. ‘모든 존재는 각각 다르다’라고 보는 사고방식, ‘모든 것은 하나로 같다’라고 보는 사고방식, 이 두 가지의 사고방식이 공존하고 있다.
‘우리는 서로 아무 관계가 없는 개별적 존재이다. 그러므로 내가 살려면 너를 죽여야 하고 내가 이기려면 너는 저야 한다. 내가 이익을 보기 위해서는 네가 손해를 봐야 한다.’라는 생각은 개개인을 서로 다른 별개의 존재라고 인식할 때 갖게 되는 관점인데,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사회는 각자 다른 개인이 모여 서로 경쟁하는 울타리가 되기 때문에 홉스의 말대로 사회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장소이다. 내가 다른 이를 짓밟고 올라서는 것이 합리화된다. 이것을 두고 약육강식, 적자생존이라고 말하며, 흔히들 이것이 세상의 원리라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삶의 태도는 모든 관계를 경쟁의 관계로 만들고, 사람들로 하여금 승리만을 목표로 삼게 한다. 그래서 갈등과 투쟁을 불러일으킨다.
이와 정반대인 사고방식이 ‘우리는 다 하나로서 같다.’라는 것이다. ‘부부는 일심동체이다. 그런데 너는 왜 나를 두고 다른 사람을 쳐다보는가? 너는 왜 다른 짓을 하는가? 너는 왜 나와 다른 마음을 먹는가? 너는 왜 나와 다른 생각을 하는가?, 라는 식으로 상대방에 대한 이해가 결여된 채, 자기식대로 하나되는 이 관점 역시 필연적으로 갈등과 투쟁을 낳을 수 밖에 없다. 또 하나의 극단인 것이다.
다름을 인정한 하나, 하나임을 자각한 다름
그렇다면 모든 존재는 서로 같은 것일까, 서로 다른 것일까? 존재는 총체적 하나일까, 아니면 낱낱이 독립된 개별적 존재일까? 불교에서는 이 질문에 대해 불일불이(不一不異)라고 대답한다. 같은 것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라는 뜻이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사람들은 당연히 혼란스러워한다. 같으면 같고 다르면 다른 것이지, 같은 것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이라는 말인가? 그러나 바로 이 속에 평화의 원리, 공존의 원리, 화합의 원리가 들어 있다.
콩을 콩끼리 비교하면 서로 다 다르다. 그러나 콩과 팥을 놓고 비교하면 서로 다른 콩이라도 모두 같은 콩이 된다. 콩과 팥을 채소와 비교하면 콩과 팥은 같은 곡식이 된다. 콩, 팥, 채소를 옷과 비교하면 콩, 팥, 채소는 같은 음식류가 된다. 상황에 따라서 같기도 하고 다르기도 하다. 하지만 그 존재 자체는 같다고 할 수도 없고, 다르다고 할 수도 없다. 즉, 같은 것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다.
나와 너는 같은 것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다. 나와 네가 다르다고 할 때, 다른 것만 있는 것이 아니라 같은 것도 있다. 나와 네가 같다고 할 때도 같은 것만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도 있다. 그러므로 기준이 무엇인가가 중요하다. 눈의 모양을 비교할 때는 네 눈과 내 눈은 서로 다르다. 그러나 눈의 개수를 비교할 때는 너도 두 개고 나도 두 개로 서로 같다. 따라서 어떤 조건에 놓이느냐, 어떤 관점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서 같다고도 할 수 있고 다르다고도 할 수 있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서로 다름을 인식하고 인정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때의 다름은 ‘너와 나는 무관한 존재이다’라는 뜻이 아니다. ‘너와 나는 무관하다. 너와 나는 상관없는 개별적 존재이다.’라고 할 때의 다름은 갈등과 분쟁을 낳는 다름이지만, 나와 다른 생각, 다른 경험, 다른 조건의 삶을 살고 있는 상대방을 이해하는 다름은 화해와 공존을 낳는 다름이다. 사물과 인간의 다양성을 인정하지 못하기 때문에 생기는 불화나 갈등의 문제는 바로 이 다름을 인정함으로써 해결할 수 있다. 우리는 서로 생긴 것도 다르고, 생각도 다르고, 취미도 다르고, 느낌도 다르다. 이것을 인정하는 것이 바로 상대방을 존중하는 길이고, 나 자신의 좁은 시야에서 벗어나 사물과 세계를 총체적으로 볼 수 있는 길이다.
‘나는 이렇게 생각하지만 너는 그렇게 생각하는구나, 그렇게도 생각할 수 있겠구나. 나는 이것을 좋아하지만 너는 그것을 좋아하는구나. 좋아하는 것이 서로 다른 것은 당연하다.’ 이렇게 받아들이면 어떤 불화나 갈등도 생기지 않는다. 다른 것을 다르다고 인정하지 않을 때 갈등이 생긴다. 현실에서는 분명 서로가 다른데, 머릿속의 관념에서는 서로 같다고 착각하기 때문에 갈등이 생긴다.
‘하나’의 문제도 잘 이해해야만 한다. ‘우리 모두가 연관된 하나이다.’라는 것은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무조건적 ‘하나’가 아니라 서로의 다름을 인정한 바탕 위에 성립하는 상생적 ‘하나’를 뜻하는 것이다. 즉, 별개의 다름이 아니라 연관되어 있는 ‘하나’라는 의미이다. 그런데 ‘하나’라는 말을 편협하게 이해하여 ‘모든 것이 똑같은 한 덩어리’라는 식으로 받아들이면 반드시 싸우게 되어 있다.
‘나는 너를 좋아하고 너도 나를 좋아한다. 그래서 우리는 결혼했다. 그러니 우리는 생각도 같아야 하고 식습관도 같아야 한다. 부부는 일심동체이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면 상대방에게서 나와 다른 점이 발견되는 순간 그것을 참기가 아주 어려워진다.
‘나는 아침에 밥 먹는 것을 좋아하는데 너는 빵 먹는 것을 좋아한다. 나는 일요일에는 쉬는 것이 좋은데 너는 놀러가는 것을 좋아한다. 나와 너는 서로 너무 다르다.’ 이렇게 자신과 다른 것을 ‘옳지 않다.’고 생각하면 관계에 벽이 생긴다. 그러면 ‘성격도 다르고 취미도 다르다. 도무지 같은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다. 우리는 헤어질 수 밖에 없다.’라는 결론밖에 나올 것이 없다.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면 언어나 폭력으로 서로 싸우면서 서로를 해치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러나 때려봐야 자기 마누라고, 긁어봐야 자기 남편이다. 또 부숴봐야 자기 살림이다.
이런 일들은 ‘하나’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생겨난다. 하나라는 것은 독립된 존재가 유기적으로 연관되어 있다는 뜻이다. 하나라고 해서 무조건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같아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생각에서 비롯된 오류이다. 사람들은 이 명백한 오류를 생활 속에서, 삶 속에서 무수히 되풀이한다. 그래서 개인 단위에서, 사회 단위에서, 역사 단위에서, 세계 단위에서 끊임없는 갈등을 만들어 낸다.
한 개의 손으로 연결되어 있는 다섯 개의 손가락은 모두 다 제각각으로 생겼고 각각의 역할도 조금씩 다르다. 한 몸을 이루고 있는 손과 발도 마찬가지다. 각각 서로 다르지만 별개가 아니라 하나로 연관되어 있고 하나라고 하지만 단일의 하나가 아니라 서로 다른 여럿이 연관되어 있는 하나이다. 우리는 이것을 깨달아야 한다. 다름을 인정한 하나, 하나임을 자각한 다름 즉, 불일불이(不一不異)의 세계관을 이해하고 몸으로 실천해 나갈 때 우리는 진정으로 하나되는 삶을 살 수 있다. 서로가 다름을 인정하고 상대를 존중하면서 서로가 하나임을 가장 위대한 평화, 가장 아름다운 평화가 이루어진다. 이것이 바로 불교적인 관점에서 말하는 평화이다.
화해와 협력을 기초로 한 통일
세상에서 말하는 평화는 좀 다르다. 일본과 우리나라는 다르기 때문에 일본이 망하면 평화가 올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또 단일민족인 우리는 민족이라는 ‘하나’의 틀 안에서 종은 종의 역할을 잘 하고 양반은 양반의 역할을 잘 하면 평화롭게 살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종이 세습되는 신분의 괴로움을 호소하며 이에 저항하면 양반들은 ‘하나’를 파괴하는 것으로 여겨 종을 억압한다. 이와 같이 외부적으로는 다른 사람을 적으로 만들고, 내부적으로는 그릇된 ‘하나’를 강요함으로써 다른 사람을 억압한다. 그러면서 이것을 평화라고 생각한다.
불교적인 관점에서 볼 때 이것은 갈등과 불화와 투쟁과 전쟁을 낳는 화근일 뿐 결코 평화가 될 수 없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다름과 하나’를 깊이 이해하고 그 가치를 삶 속에서 실천할 때 비로소 평화는 찾아온다.
민족 사이의 문제도 이런 관점에서 풀어야 한다. 각각의 독립성을 인정하되, 우리가 공존한다는 것을 이해하고 서로에게 이익이 될 수 있도록 협력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남북문제도 풀기가 어렵다. 남북관계를 생각할 때 우리는 과연 어떻게 생각하는가? “우리는 한민족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가 되어야 한다.”라고 아주 쉽게 말하지만 이 말이 반드시 옳은 것은 아니다. 현실적으로 남북의 두 체제는 엄연히 대립적으로 존재하고 있다. 두 체제가 하나로 되려면 하나가 다른 하나에 흡수되어야 한다. 통일은 궁극에 어느 한 쪽의 흡수를 전제로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둘 다 흡수되기를 싫어하기 때문에 서로 싸운다. 그래서 지난 50년 동안 남쪽은 승공통일을 주장하고, 북쪽은 적화통일을 부르짖으며 대립했다. 이제는 조금 달라졌다. 각자의 체제를 인정하자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하지만 이것을 잘못 이해하면 영구분단론이 되어 버린다. 지난 시대에 있어 영구분단론의 올가미는 참으로 무서운 것이었다. 북한체제를 인정한 남한 사람도 사형을 당했고, 남한 체제를 인정한 북한 사람도 사형을 당했다. 다른 체제를 인정하면 영구분단으로 직결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사람은 반통일론자로 낙인 찍혔다. 그런 맥락에서 따지자면 지금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영구분단을 획책하고 있는 셈이다.
서로 각자의 체제를 인정하자고 말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서로 상대를 인정한다고 해서 영구히 따로 살자는 것은 결코 아니다. 체제를 인정하고 상호 존중하면 불화가 해소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화해와 협력은 저절로 다가올 것이다. 이러한 화해와 협력을 기초로 해서 통일로 나아가야 한다. 그러므로 서로의 체제를 인정하는 것은 영구분단의 길로 가는 것이 아니라 바로 통일로 가는 것이다. 지금은 서로 상대방을 인정하고 화해와 협력을 해야 할 때이다. 지금 단계에서 무조건적으로 하는 통일은 흡수통일, 또는 적화통일이라는 극단의 길 밖에는 없다. 그것은 또 다른 전쟁의 비극을 초래할 위험이 있다.
서로의 체제를 인정함으로써 각자 다른 살림을 살자고 하면 영구분단이 되겠지만, 서로의 체제를 존중하고 화해하고 협력하자고 하면 그것은 통일로 나아가는 지름길이 될 것이다. 지금은 무엇보다도 화해와 협력을 중요시해야 하는 때이다. 이렇게 할 때 통일은 저절로 온다. 이것이 바로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상호 협력함으로써 하나로 나아가는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