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 김현경
밀양하면 ‘밀양아리랑’, ‘밀양 얼음골’이 잘 알려져 있는데, 영화 ‘암살’의 약산 김원봉 선생의 고향으로는 알려져 있지 않았다. 김해지역 활동가 33명은 지난 10월 28일 밀양 항일독립투쟁 역사를 알아보기 위해 의열기념관을 포함한 해천항일테마거리를 방문하였다.
의열단원 절반이 밀양 출신 독립운동가들이며 그 중심에 약산 김원봉이 있었다. 의열단은 1919년 비폭력 독립투쟁인 3.1운동이 일본의 폭력으로 실패한 경험을 통해 새로운 독립 조직 결성의 필요성을 느꼈다. 이에 따라 그해 11월 10일 만주 길림에서 밀양 출신인 김원봉, 윤세주, 김상윤, 한봉근 등이 의열단을 결성하였다. 무력만을 수단으로, 암살만을 정의로 삼아 5개소의 적 기관 파괴와 7악의 제거를 위해 파괴 활동을 벌이며 조국의 독립을 도모하였다. 이후 김원봉이 주축이 된 조선의용대를 결성하여 항일 무장투쟁을 전개하며 광복군과 함께 활동하였다.
이와 같은 항일 무장투쟁의 역사는 대중에 널리 알려져 있지 않았지만, 영화 ‘암살’과 ‘밀정’의 흥행 성공으로 약산 김원봉의 삶이 새롭게 조명 되었다. 밀양 독립운동가를 재조명하기 위해 김원봉의 생가터에 의열기념관도 세워졌다. 의열기념관 일대에는 해천항일운동 테마거리가 조성되었다. 역사기행 참가자들을 윤세주모둠과 박차정모둠으로 나누어 의열체험관, 해천항일운동 테마거리를 구석구석 돌아보았다.
(해천항일운동 테마거리 조성을 통해 항일운동을 전개한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의 삶과 활동을 생생하게 소개해 주고 있었다. 참고로 해천은 조선시대부터 적의 침입을 막는 해자, 즉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성 주위를 둘러서 판 연못을 일컫는 말이다.)
의열체험관에서는 시간열차를 타고 만주로 향했다. 시공간을 넘어 도착한 만주에서는 의열단의 항일독립 투쟁을 간접 체험해 보았다. 1942년 조선의용대는 태항산에서 진광화, 윤세주 등 많은 독립 투사들이 전사하기도 했다. 역사기행 참가자들은 태항산 전투지에서 조선의용대처럼 항전을 알리는 디지털 연을 만들어 날리는 체험도 했다. 이후 일본군과 항전하는 조선 의용대의 사진을 찍고, VR체험도 하였다.
역사 해설사는 의열 기념관으로 이동하며 밀양의 항일독립 투쟁 역사와 의열단 활동, 해방 이후 김원봉의 행적에 대해 자세히 알려 주었다.
1945년 8.15 해방 후 김원봉은 여운형이 암살되는 사건 등이 있는 사회분위기 속에서 친일경찰의 탄압을 받았다. 1948년에는 김구, 김규식등과 함께 좌우 합작을 위한 남북 협상에 참여하기 위해 평양으로 향했다. 남북 협상 이후에, 남한 친일 경찰의 득세와 신변의 위협으로 인해 북한에 남았다. 이후 북한의 초기 내각에서 장관급 직책을 맡는 등 북한 정권에 일정부분 기여하였으나, 북으로 간지 10년 만인 1958년 숙청되었다. 김원봉의 형제들은 남한의 보도연맹 사건으로 모두 살해당하는 등 일가족의 고초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김원봉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활동했고, 광복군 부사령관까지 역임을 하는 등 대한민국 독립에 혁혁한 공로를 세웠다. 그러나 북한 정권에 기여했다는 이유로 아직까지 독립운동가 서훈을 받지 못했다. 김원봉뿐만 아니라 월북한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온전한 역사적 평가가 이루어지기를 바랐다.
가족과 자신의 안위를 내려놓고 목숨까지 바쳐 항일 투쟁한 독립운동가들의 희생으로 지금의 대한민국과 내가 온전히 있음을 온 몸과 마음으로 느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는 말을 되새기는 가슴 뜨거운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