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선집중
딸에게 탈북 권하는 아버지
함경북도 은덕군 오봉 로동자구 탄광 기업소에서 일하는 김영남(가명)씨는 “조선에서 살아 봤자 살날이 있을 것 같지 않다. 옥수수밥도 못 먹는 형편에서 평생 못 벗어날 테니, 이제라도 각자 살 길 찾아가라”며 중학교를 졸업한 지 1-2년 밖에 안 된 두 딸에게 탈북을 권했다. 벌써 몇 달째 굶기를 밥 먹듯 하는 나날이 계속되고 있어서다. 여기서 굶어죽는 꼴을 보느니, 자식들만이라도 살 길을 찾아가라고 한 것이다.
“지금은 옥수수쌀 구경하기도 바쁜 세월이다. 고난의 행군보다 더 한심한 상황이 우리 부부가 두 눈 뜨고 있을 동안에는 끝날 것 같지가 않다. 고난의 행군 때 딸들이 중국으로 넘어간 집들은 지금 다 잘 산다. 목숨 걸고 두만강을 넘어가는 딸자식 덕 보자는 게 아니다. 중국에서는 개들도 이밥을 먹는다는데, 자식들이라도 마음껏 먹고 살았으면 좋겠어서 탈북하라고 했다”는 것이 아비의 마음이었다.
김씨는 벌써 몇 달째 배급이 없어 출근을 못하고 있다. 그의 안해(아내)는 장세를 낼 돈이 없어 마을 입구에 앉아 땅바닥에 해바라기씨, 껌, 과자 같은 보잘 것 없는 잡화를 몇 가지 펼쳐놓고 팔고 있다. 종일 팔아봐야 500원 벌이도 안 될 때가 많다. 아예 공치는 날도 있다. 올해 1월 중순부터 하루에 1-2끼를 옥수수묵지가루로 죽이나 국수를 해먹고 있다. 소학교에 다니는 아들은 학교에 보내지 못하고 있다. 나란히 식료품공장에 배치된 큰 딸과 작은 딸도 변변한 로임이나 배급을 받아온 적이 없다. 김씨는 옛날 직장 동료 중에 중국에 선이 있는 사람에게 두 딸을 넘겨달라고 부탁했지만 국경연선 통제가 심해 아직 기회를 엿보는 중이다. 딸들을 무사히 넘길 수 있을지 자신할 수 없지만, 요즘엔 탈북만이 유일한 희망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은덕군에는 고난의 행군시기부터 지금까지 중국에 건너간 세대들이 많다. 올해 들어서도 탈북자가 꾸준히 늘고 있다. “여자가 탈북하면 그 집은 어떻게든 먹고 산다”는 것이 어느새 정설처럼 퍼져있어, 주로 여자들이 많이 넘어간다.
오봉탄광지구에서 일하는 한 법일군은 “주민들이 먹고 사는 생활을 료해해 보면 힘든 농사나 장사에 명줄을 안 걸어도 먹고 살만한 집들은 대개 행불자가 있는 집들이다. 말이 행불이지 실제로 도강한 거라고 보면 된다. 여자가 한 명 중국에 건너가면 일 년에 한두 번 돈을 보내주는데, 중국 돈으로 1,000원만 보내도 식량을 해결 할 수 있는데 1,500-2,000원 이상을 보내는데도 있다. 이런 집들은 먹고 사는데 피 타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아도 된다. 거기다 소토지 농사나 장사를 조금 겸하면 부식물도 넉넉히 사 먹을 수 있고, 공장에 출근을 안 하면 안했지 못하는 일은 없다. 아이들 학교에서 내라는 세외부담 같은 것도 다 낼 수가 있다. 그러니 딸들 있는 집에서는 은근히 탈북하라고 권하는 집들이 많다”고 했다.
누가 권하기 전에 여성들이 먼저 중국에 넘어가는 선을 찾아다니는 경우도 있다. 시집가는 명목이지만 실제로는 팔려가는 거라는 것을 다 알면서도, 아무 대책 없이 굶어죽는 것보다는 낫다는 것이 그들의 계산이다.
올해 23살인 김성희(가명)씨는 “아무리 일해도 로임 나올 데도 없고, 처녀가 장사하는 것도 바쁜 일이다. 중국에 넘어가면 내 한 입 줄여서 좋고, 식당 같은데서 일하면 우리 어머니에게 돈을 보내줄 수 있다. 거기 남자들에게 팔려가도 할 수 없다. 살자면 무슨 짓이라도 해야지 별 수 있나. 여기서 이렇게 살다가 꽃을 파는 거나, 저쪽(중국) 남자들한테 팔려가는 거나. 이왕이면 이밥이라도 실컷 먹게 해줄 수 있는 데 팔려가는 게 낫다”고 했다.
남편 외도에도 이혼 얘기 못 꺼내
평양시 중구역에 사는 리경화(가명)씨는 요즘 말 못할 고민에 끙끙 앓고 있다. 너무 잘난 남편을 둔 덕분이다. 리씨도 어디 가면 빠지는 인물이 아니지만, 왕성한 사회활동을 하는 남편에게 늘 따라붙는 여자 문제가 골칫덩이다. 리씨는 무역일군인 아버지를 둔 덕분에 남부럽지 않게 살았고, 인물이 고와 좋은 선 자리들이 많이 들어왔었다. 출신 성분은 좋아도 돈이 별로 없던 남편이 평양외국어대학을 졸업할 수 있었던 것은 본가(친정)의 지원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북한의 대학생들은 학업 중에 연애를 해서는 안 되고, 결혼은 더더욱 안 된다. 그래서 남편이 대학을 다니는 동안에는 신분등록기관에 등록하지 않고 살다가 졸업 후 결혼식을 올렸다.
리씨의 남편은 남자답게 생긴데다 화술이 뛰어나고, 농담을 곧잘 해서 인기가 좋았다. 게다가 친정아버지의 도움으로 무역일군이 된 뒤에는 해외출장이 잦고, 외화벌이가 쏠쏠해지자 따르는 여성들이 많아졌다. 처음 남편의 바람기를 알게 됐을 때는 너무 속이 상했지만, 하도 여자들이 자주 바뀌어서 남자들 바람기가 그러려니 하고 살았다.
그런데 작년부터 사정이 달라졌다. 한 여자와 오래 사귀지 않던 남편이 따로 살림을 차렸기 때문이다. 평양의 유명 호텔 복무원 여성이라는데, 인물도 곱고 영어도 잘 하는 재원이라고 했다. 단지 출신 성분이 별로 좋지 않아서 26살을 넘긴 지금까지 결혼을 안 하고 있었는데, 어쩌다 리씨의 남편 눈에 들어 호텔을 그만두고 아파트에 들어앉았다는 소식이었다.
지금껏 여자에게 아파트를 사준 적이 없었기 때문에 놀랐고, 몇 달을 가겠냐 했는데 벌써 1년이 넘어가면서 근심거리가 되었다. 결정적으로 임신했다는 소식에 더 이상 안 되겠다 싶어 그 여자를 찾아 나섰는데, 도리어 그 여자 앞에서 큰 망신을 당했다. 남편이 던진 재떨이를 맞아 머리가 깨진 것이다. 그동안 남편에게 손찌검을 당하거나 말로 무시당한 적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피가 줄줄 흐르는데도 당장의 극심한 통증보다 12살이나 어린 여자 앞에서 수모를 당한 게 더 원통하고 분했다.
지금도 그 때 생각하면 얼굴을 들지 못할 정도로 화끈거린다. 세상 사람들이 다 자기를 비웃는 것 같고, 남편에게 ‘당신은 뭐가 그렇게 잘났느냐?’고 따지지도 못하는 자신이 비참했다. 그래서 이혼을 잠깐 떠올리기도 했지만, 입 밖에도 내지 못했다. 북한에서는 이혼하기가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리혼은 재판에 의해서만 할 수 있다”(가족법 제20조)는 것이 첫 번째 이유이고, 재판에 가져가더라도 남편의 외도가 이혼 사유로 잘 받아들여지지 않는 풍토 때문이다. 1993년에 개정된 가족법에 따르면, “배우자가 부부의 사랑과 믿음을 흑심하게 배반하였거나 그 밖의 사유로 부부생활을 계속할 수 없는 경우에는 리혼할 수 있다”(가족법 제21조)고 명시돼있지만, 재판부에서는 이를 엄격하게 적용하지 않는다. 오히려 남자에게 유리한 판결을 내리기 일쑤다.
실제로 서정희(가명)씨는 리경화씨와 비슷한 사유로 이혼 소송장을 내려고 했다가 속 터지는 말만 들어서 일찍 포기했다고 했다. 서씨는 “왜 리혼을 하려느냐고 묻기에, 남편이 식당 복무원 처녀애와 바람이 났다고 했더니, 나더러 ‘네 자신부터 잘못이 없는지 찾아보라. 남자들은 일시적으로 그러는 거다. 남자가 재미나게 좀 더 잘 대해줘 보라. 평양 관리들 중에 애인 없는 사람이 없다.
시대 류행이 그런 건데 뭐 그렇게 깐깐하게 구나. 실컷 밖에서 놀다 재미없으면 돌아올 거니 기다려 보라’ 이런 소리만 들었다. 하도 그러니까 신경질이 나서 ‘이혼 안 하고 만다’ 고 나왔다. 법일군이고 뭐고 남자들은 다 제들 편이다. 리혼해봐야 나만 손해라 일찍 접었다”고 했다.
“당신이 유일한 생계부양자라면?”
평양시 대동강구역의 한 식당에서 접대원으로 일하고 있는 서향숙(가명)씨는 혼자 벌어서 다섯 식구를 먹여 살리고 있다. 어머니가 시장에서 잡화 장사를 했지만 화폐개혁으로 돈을 다 날렸고, 그 뒤 장사 밑천이 없어서 텃밭농사를 짓는다. 아버지는 퇴직한 후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어 어머니를 돕고 있다. 아래 남동생 둘은 아직 중학생들이라 대학까지 가르치려면 돈이 많이 든다.
서씨는 중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식당에 들어갔을 때 정말 뛸 듯이 기뻤다고 한다. 그러나 한 달 내내 열심히 벌어도, 그 돈으로는 쌀 1-2kg도 못 사는 현실이 계속되면서 곧 절망에 빠졌다.
“우리 집은 아버지, 어머니가 힘이 없어서 장사할 형편이 못 된다. 내 로임만으로 다섯 식구 입에 풀칠해야 하는데, 당장 쌀독에 옥수수쌀이 떨어지니까 무서웠다. 내가 나가서 무슨 짓을 해서라도 벌지 않으면 우리 가족이 모두 굶어죽겠구나 생각하니 결심이 섰다. 지배인한테 가서 나도 (식당) 언니들 하는 일을 달라고 했다. 내가 다 터놓고 말을 못해서 그렇지만, 진짜 그 심정은 안 당해보면 아무도 모른다. 우리 어머니, 아버지도 모른다. 그때 서향숙이는 죽었다”고 했다.
다섯 식구의 목숨이 자기에게 달려있다는 것이 지금껏 이 일을 하고 있는 유일한 이유라고 했다. 좋아서 하는 것이 아니라, 안하면 안 되기 때문에 하는 일이라며, 언젠가는 좋은 남자를 만나 가정을 이루고 주부로 살아가고 싶다고 했다.
화폐개혁 이후 성 거래 노골화
평양시의 한 보안원은 “화폐개혁으로 먹고 살기가 어려워지면서, 돈 많은 사람과 간부들, 법관들이 더 거리낌 없이 여자를 사는 것 같다”고 했다. 당에서 아무리 성매매 현상을 엄중하게 단속하고 통제하려고 해도, 법 일군들이 대부분 연루되어 있으므로 단속이 잘 될 리가 없다. 단속하는 시늉만 하고, 끼리끼리 봐주는 게 통례다.
어쩌다 중앙당에서 비사검열그루빠를 조직해 내려 보내 긴장할 때도 있지만, 미리 귀띔을 받고 출입을 자제한다. 특히 여자들을 몇 명이나 데리고 다니느냐가 남자의 능력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당에서 부화사건을 크게 다루고 있지만, 당 간부들의 혼외관계를 묵인해주는 것도 이런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다.
평양의 한 시당 간부는 “해마다 한두 번은 사회를 문란하게 만들고 오염시키는 자본주의 형태를 강하게 처벌하겠다면서 (성매매를) 검열 통제하지만, 그 때만 잘 넘기면 된다”며 사실상 당의 검열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함경북도 청진시 사회급양소에서 일하는 한 일군도 “시내 식당망들을 직접 관리하고 있는데, 내부 실태를 료해(조사)해 보면 화폐개혁 이후 주민들이 살기 힘들어 지면서 식당에 오는 사람들도 간부들과 무역일군들로 고정되었다. 예전에는 누가 알까 쉬쉬하며 조심했지만 지금은 무리지어 다니면서 ‘부화방탕’을 즐기고 있다.
중앙당이나 도당의 큰 간부들이 시, 군에 사업 지도를 내려오면, 며칠씩 묵게 되는데 처녀들을 소개해주는 것이 관례가 되었다. 식당망에서 하기도 하고, 지하 술집에 데려가기도 한다. 상부 단위 간부들도 뢰물이나 돈 받는 것보다 여자들과 잠자리를 마련해주는 걸 더 좋아한다. 더 노골화된 것”이라며 비슷한 지적을 했다.
일부 식당들, 불법 성(性) 영업
평양에는 낮에는 평범하게 음식을 팔고, 밤이 되면 불법 성 영업을 하는 곳으로 변하는 식당들이 있다. 공식적으로는 어느 기관에 속해 있어도 실질적인 주인은 대개 힘 있는 간부거나 돈 많은 무역일군들인 경우가 많다. 비밀이 보장되도록 독립된 방들을 갖추어놓은 것이 특징이다.
식당에서 일할 복무원들을 뽑을 때부터 인물과 체격은 가장 중요한 조건이다. 인물이 고운 여성 복무원들이 음식과 술시중을 들다가 잠자리로 이어진다.
이들이 상대하는 사람들은 대개 돈이 있거나 권력이 있는 남자들인데, 그 중에서도 법 일군들이 기본이다. 법 일군을 끼지 않고서는 불법행위를 할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을 접대하는 것이 일과처럼 되어 있다. 그러다가 그들 눈에 들면 고정적으로 만나게 되고, 따로 살림을 차려 나오는 경우도 생긴다. 복무원으로 일하는 미혼 여성들은 이런 식으로 남자를 만나는 경우가 많다.
평양 대동강구역에서 식당을 책임지고 있는 한 지배인은 “우리 집에서 일하는 처녀애들은 대부분 가정살림이 어려워서, 식당에 자주 찾아오는 간부나 무역일군들, 돈주 같은 돈 많은 사람들을 사귀고 싶어 한다. 하룻밤 자고 돈을 받는 것보다 안정적으로 관계를 이어갈 수 있는 남자를 선호한다. 먹고 살기 어려운 집 처녀들이 그런 유혹에 빠지지 않으면 그게 더 이상한 것”이라고 했다.
생계 위해 성(性) 거래 나선 여성들
기근과 전쟁, 재난 시절에 여자들이 남자보다 생존에 유리한 점이 있다면, 아마 그것은 성(性, sexuality) 때문일 것이라는 얘기가 있다. 더 이상 돌파구가 없을 만큼 궁지에 몰렸을 때, 여성들의 몸은 종종 생존수단이 된다.
빈곤한 사회일수록 여성의 지위는 불평등하고, 여성의 몸은 성을 거래하는 도구로 쉽게 전락한다. 북한도 예외가 아니다. 여기에는 성을 구매 할 수 있는 ‘자원을 가진’ 남성의 권력과 함께, 사회적인 묵인, 생존을 모색하려는 여성들의 자발적 혹은 강제적 동의가 있다.
길거리에서 ‘꽃(성, 性)’을 팔아야 하는 일이든 식당 등 편의봉사망에서 보다 고정적이고 안정적으로 손님을 접대하는 일이든, 또는 돈 많고 권력 있는 유부남과의 연애로 첩살이를 하는 일이든 넓게 보면 모두 ‘생계형’에 속한다. 먹고 사는 문제로 걱정이 없다면, 첩살이를 선택할 여성들의 수는 훨씬 적을 것이다.
하영미(가명)씨는 스무 살이 되던 해부터 ‘아저씨’를 만나 6년째 관계를 이어오고 있다. 아저씨의 안해(아내)는 병을 앓고 있고, 하씨와 따로 살림을 차려 하씨가 밥도 해주고 빨래도 해주면서 살고 있다. 물론 친구들과 직장에는 비밀이다. 가족들은 드러내고 말은 안 해도 오래 전에 눈치를 챘다. 그녀의 월급으로는 턱없이 비싼 쌀을 마대로 사들고 올 때부터 이미 짐작했던 바다.
하씨는 자기가 운이 정말 좋다고 했다. 나이 차이가 스무 살이 넘지만, 나이차가 큰 만큼 여자를 아껴주고 때론 아버지처럼 자상하게 대해줘서이다. 무엇보다 힘 있는 기관에 있어서 먹을 것 걱정이 뚝 떨어졌다는 게 가장 큰 선물이라고 했다.
자기는 몸을 판다는 생각을 추호도 해본 적이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누가 유부남과 바람피운다고 할까봐 극도로 조심하고 있다. 부화사건으로 걸리면 망신도 망신이지만, 직장에서 쫓겨나고, 결정적으로 아저씨의 물질적 지원이 끊길까봐서이다. 하씨는 신우염을 앓고 있는 동생 병수발에, 늙은 부모를 혼자 부양하기는 어렵다며, 이 관계를 끝낼 생각이 전혀 없다고 했다.
“여성은 ‘꽃’이 아니다”
지금 북한에서는 젊은 여성들이 생존을 위해 성매매에 뛰어들고 있다고 한다. “가만히 굶어죽을 것이냐, 어떻게든 살아남을 것이냐”의 기로에서 여성들이 선택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다. 제 한 목숨 부지하기도 힘든 세월에, 북한 여성들은 종종 가족의 생계 부담까지 안아왔다. 뙈기밭 농사, 장사, 식모살이 등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닥치는 대로 해왔지만, 하루 한 끼니조차 안정적으로 확보하기 어려운 현실이다. 아무리 일을 해도 먹고 살기 힘든 현실 속에 일부 젊은 여성들이 ‘꽃’으로 상징되는 성(性, sexuality)을 팔러 다닌다고 해서, 개인의 도덕성 문제로 비난받아서는 안 되는 이유이다. “여성은 꽃이라네. 생활의 꽃이라네. 한 가족 알뜰살뜰 돌보는 꽃이라네”라는 노래가 달갑지 않은 이유이기도 하다. 북한 사회는 여성에게“한 가족 알뜰살뜰 돌보는 꽃”이라고 칭송만 하지 말고, 그녀들이 ‘꽃’(性)을 팔지 않고도 먹고 살 수 있는 방법을 하루빨리 마련해야 한다.
■ 사회
딸에게 탈북 권하는 아버지
함경북도 은덕군 오봉 로동자구 탄광 기업소에서 일하는 김영남(가명)씨는 “조선에서 살아 봤자 살날이 있을 것 같지 않다. 옥수수밥도 못 먹는 형편에서 평생 못 벗어날 테니, 이제라도 각자 살 길 찾아가라”며 중학교를 졸업한 지 1-2년 밖에 안 된 두 딸에게 탈북을 권했다. 벌써 몇 달째 굶기를 밥 먹듯 하는 나날이 계속되고 있어서다. 여기서 굶어죽는 꼴을 보느니, 자식들만이라도 살 길을 찾아가라고 한 것이다. “지금은 옥수수쌀 구경하기도 바쁜 세월이다. 고난의 행군보다 더 한심한 상황이 우리 부부가 두 눈 뜨고 있을 동안에는 끝날 것 같지가 않다. 고난의 행군 때 딸들이 중국으로 넘어간 집들은 지금 다 잘 산다. 목숨 걸고 두만강을 넘어가는 딸자식 덕 보자는 게 아니다. 중국에서는 개들도 이밥을 먹는다는데, 자식들이라도 마음껏 먹고 살았으면 좋겠어서 탈북하라고 했다”는 것이 아비의 마음이었다.
김씨는 벌써 몇 달째 배급이 없어 출근을 못하고 있다. 그의 안해(아내)는 장세를 낼 돈이 없어 마을 입구에 앉아 땅바닥에 해바라기씨, 껌, 과자 같은 보잘 것 없는 잡화를 몇 가지 펼쳐놓고 팔고 있다. 종일 팔아봐야 500원 벌이도 안 될 때가 많다. 아예 공치는 날도 있다. 올해 1월 중순부터 하루에 1-2끼를 옥수수묵지가루로 죽이나 국수를 해먹고 있다. 소학교에 다니는 아들은 학교에 보내지 못하고 있다. 나란히 식료품공장에 배치된 큰 딸과 작은 딸도 변변한 로임이나 배급을 받아온 적이 없다. 김씨는 옛날 직장 동료 중에 중국에 선이 있는 사람에게 두 딸을 넘겨달라고 부탁했지만 국경연선 통제가 심해 아직 기회를 엿보는 중이다. 딸들을 무사히 넘길 수 있을지 자신할 수 없지만, 요즘엔 탈북만이 유일한 희망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은덕군에는 고난의 행군시기부터 지금까지 중국에 건너간 세대들이 많다. 올해 들어서도 탈북자가 꾸준히 늘고 있다. “여자가 탈북하면 그 집은 어떻게든 먹고 산다”는 것이 어느새 정설처럼 퍼져있어, 주로 여자들이 많이 넘어간다. 오봉탄광지구에서 일하는 한 법일군은 “주민들이 먹고 사는 생활을 료해해 보면 힘든 농사나 장사에 명줄을 안 걸어도 먹고 살만한 집들은 대개 행불자가 있는 집들이다. 말이 행불이지 실제로 도강한 거라고 보면 된다. 여자가 한 명 중국에 건너가면 일 년에 한두 번 돈을 보내주는데, 중국 돈으로 1,000원만 보내도 식량을 해결 할 수 있는데 1,500-2,000원 이상을 보내는데도 있다. 이런 집들은 먹고 사는데 피 타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아도 된다. 거기다 소토지 농사나 장사를 조금 겸하면 부식물도 넉넉히 사 먹을 수 있고, 공장에 출근을 안 하면 안했지 못하는 일은 없다. 아이들 학교에서 내라는 세외부담 같은 것도 다 낼 수가 있다. 그러니 딸들 있는 집에서는 은근히 탈북하라고 권하는 집들이 많다”고 했다. 누가 권하기 전에 여성들이 먼저 중국에 넘어가는 선을 찾아다니는 경우도 있다. 시집가는 명목이지만 실제로는 팔려가는 거라는 것을 다 알면서도, 아무 대책 없이 굶어죽는 것보다는 낫다는 것이 그들의 계산이다. 올해 23살인 김성희(가명)씨는 “아무리 일해도 로임 나올 데도 없고, 처녀가 장사하는 것도 바쁜 일이다. 중국에 넘어가면 내 한 입 줄여서 좋고, 식당 같은데서 일하면 우리 어머니에게 돈을 보내줄 수 있다. 거기 남자들에게 팔려가도 할 수 없다. 살자면 무슨 짓이라도 해야지 별 수 있나. 여기서 이렇게 살다가 꽃을 파는 거나, 저쪽(중국) 남자들한테 팔려가는 거나. 이왕이면 이밥이라도 실컷 먹게 해줄 수 있는 데 팔려가는 게 낫다”고 했다.
남편 외도에도 이혼 얘기 못 꺼내
평양시 중구역에 사는 리경화(가명)씨는 요즘 말 못할 고민에 끙끙 앓고 있다. 너무 잘난 남편을 둔 덕분이다. 리씨도 어디 가면 빠지는 인물이 아니지만, 왕성한 사회활동을 하는 남편에게 늘 따라붙는 여자 문제가 골칫덩이다. 리씨는 무역일군인 아버지를 둔 덕분에 남부럽지 않게 살았고, 인물이 고와 좋은 선 자리들이 많이 들어왔었다. 출신 성분은 좋아도 돈이 별로 없던 남편이 평양외국어대학을 졸업할 수 있었던 것은 본가(친정)의 지원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북한의 대학생들은 학업 중에 연애를 해서는 안 되고, 결혼은 더더욱 안 된다. 그래서 남편이 대학을 다니는 동안에는 신분등록기관에 등록하지 않고 살다가 졸업 후 결혼식을 올렸다.
리씨의 남편은 남자답게 생긴데다 화술이 뛰어나고, 농담을 곧잘 해서 인기가 좋았다. 게다가 친정아버지의 도움으로 무역일군이 된 뒤에는 해외출장이 잦고, 외화벌이가 쏠쏠해지자 따르는 여성들이 많아졌다. 처음 남편의 바람기를 알게 됐을 때는 너무 속이 상했지만, 하도 여자들이 자주 바뀌어서 남자들 바람기가 그러려니 하고 살았다. 그런데 작년부터 사정이 달라졌다. 한 여자와 오래 사귀지 않던 남편이 따로 살림을 차렸기 때문이다. 평양의 유명 호텔 복무원 여성이라는데, 인물도 곱고 영어도 잘 하는 재원이라고 했다. 단지 출신 성분이 별로 좋지 않아서 26살을 넘긴 지금까지 결혼을 안 하고 있었는데, 어쩌다 리씨의 남편 눈에 들어 호텔을 그만두고 아파트에 들어앉았다는 소식이었다. 지금껏 여자에게 아파트를 사준 적이 없었기 때문에 놀랐고, 몇 달을 가겠냐 했는데 벌써 1년이 넘어가면서 근심거리가 되었다. 결정적으로 임신했다는 소식에 더 이상 안 되겠다 싶어 그 여자를 찾아 나섰는데, 도리어 그 여자 앞에서 큰 망신을 당했다. 남편이 던진 재떨이를 맞아 머리가 깨진 것이다. 그동안 남편에게 손찌검을 당하거나 말로 무시당한 적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피가 줄줄 흐르는데도 당장의 극심한 통증보다 12살이나 어린 여자 앞에서 수모를 당한 게 더 원통하고 분했다. 지금도 그 때 생각하면 얼굴을 들지 못할 정도로 화끈거린다. 세상 사람들이 다 자기를 비웃는 것 같고, 남편에게 ‘당신은 뭐가 그렇게 잘났느냐?’고 따지지도 못하는 자신이 비참했다. 그래서 이혼을 잠깐 떠올리기도 했지만, 입 밖에도 내지 못했다. 북한에서는 이혼하기가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리혼은 재판에 의해서만 할 수 있다”(가족법 제20조)는 것이 첫 번째 이유이고, 재판에 가져가더라도 남편의 외도가 이혼 사유로 잘 받아들여지지 않는 풍토 때문이다. 1993년에 개정된 가족법에 따르면, “배우자가 부부의 사랑과 믿음을 흑심하게 배반하였거나 그 밖의 사유로 부부생활을 계속할 수 없는 경우에는 리혼할 수 있다”(가족법 제21조)고 명시돼있지만, 재판부에서는 이를 엄격하게 적용하지 않는다. 오히려 남자에게 유리한 판결을 내리기 일쑤다.
실제로 서정희(가명)씨는 리경화씨와 비슷한 사유로 이혼 소송장을 내려고 했다가 속 터지는 말만 들어서 일찍 포기했다고 했다. 서씨는 “왜 리혼을 하려느냐고 묻기에, 남편이 식당 복무원 처녀애와 바람이 났다고 했더니, 나더러 ‘네 자신부터 잘못이 없는지 찾아보라. 남자들은 일시적으로 그러는 거다. 남자가 재미나게 좀 더 잘 대해줘 보라. 평양 관리들 중에 애인 없는 사람이 없다. 시대 류행이 그런 건데 뭐 그렇게 깐깐하게 구나. 실컷 밖에서 놀다 재미없으면 돌아올 거니 기다려 보라’ 이런 소리만 들었다. 하도 그러니까 신경질이 나서 ‘이혼 안 하고 만다’ 고 나왔다. 법일군이고 뭐고 남자들은 다 제들 편이다. 리혼해봐야 나만 손해라 일찍 접었다”고 했다.
화폐개혁 이후 성 거래 노골화
평양시의 한 보안원은 “화폐개혁으로 먹고 살기가 어려워지면서, 돈 많은 사람과 간부들, 법관들이 더 거리낌 없이 여자를 사는 것 같다”고 했다. 당에서 아무리 성매매 현상을 엄중하게 단속하고 통제하려고 해도, 법 일군들이 대부분 연루되어 있으므로 단속이 잘 될 리가 없다. 단속하는 시늉만 하고, 끼리끼리 봐주는 게 통례다. 어쩌다 중앙당에서 비사검열그루빠를 조직해 내려 보내 긴장할 때도 있지만, 미리 귀띔을 받고 출입을 자제한다. 특히 여자들을 몇 명이나 데리고 다니느냐가 남자의 능력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당에서 부화사건을 크게 다루고 있지만, 당 간부들의 혼외관계를 묵인해주는 것도 이런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다. 평양의 한 시당 간부는 “해마다 한두 번은 사회를 문란하게 만들고 오염시키는 자본주의 형태를 강하게 처벌하겠다면서 (성매매를) 검열 통제하지만, 그 때만 잘 넘기면 된다”며 사실상 당의 검열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함경북도 청진시 사회급양소에서 일하는 한 일군도 “시내 식당망들을 직접 관리하고 있는데, 내부 실태를 료해(조사)해 보면 화폐개혁 이후 주민들이 살기 힘들어 지면서 식당에 오는 사람들도 간부들과 무역일군들로 고정되었다. 예전에는 누가 알까 쉬쉬하며 조심했지만 지금은 무리지어 다니면서 ‘부화방탕’을 즐기고 있다. 중앙당이나 도당의 큰 간부들이 시, 군에 사업 지도를 내려오면, 며칠씩 묵게 되는데 처녀들을 소개해주는 것이 관례가 되었다. 식당망에서 하기도 하고, 지하 술집에 데려가기도 한다. 상부 단위 간부들도 뢰물이나 돈 받는 것보다 여자들과 잠자리를 마련해주는 걸 더 좋아한다. 더 노골화된 것”이라며 비슷한 지적을 했다.
일부 식당들, 불법 성(性) 영업
평양에는 낮에는 평범하게 음식을 팔고, 밤이 되면 불법 성 영업을 하는 곳으로 변하는 식당들이 있다. 공식적으로는 어느 기관에 속해 있어도 실질적인 주인은 대개 힘 있는 간부거나 돈 많은 무역일군들인 경우가 많다. 비밀이 보장되도록 독립된 방들을 갖추어놓은 것이 특징이다. 식당에서 일할 복무원들을 뽑을 때부터 인물과 체격은 가장 중요한 조건이다. 인물이 고운 여성 복무원들이 음식과 술시중을 들다가 잠자리로 이어진다. 이들이 상대하는 사람들은 대개 돈이 있거나 권력이 있는 남자들인데, 그 중에서도 법 일군들이 기본이다. 법 일군을 끼지 않고서는 불법행위를 할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을 접대하는 것이 일과처럼 되어 있다. 그러다가 그들 눈에 들면 고정적으로 만나게 되고, 따로 살림을 차려 나오는 경우도 생긴다. 복무원으로 일하는 미혼 여성들은 이런 식으로 남자를 만나는 경우가 많다. 평양 대동강구역에서 식당을 책임지고 있는 한 지배인은 “우리 집에서 일하는 처녀애들은 대부분 가정살림이 어려워서, 식당에 자주 찾아오는 간부나 무역일군들, 돈주 같은 돈 많은 사람들을 사귀고 싶어 한다. 하룻밤 자고 돈을 받는 것보다 안정적으로 관계를 이어갈 수 있는 남자를 선호한다. 먹고 살기 어려운 집 처녀들이 그런 유혹에 빠지지 않으면 그게 더 이상한 것”이라고 했다.
■ 여성/어린이/교육
“당신이 유일한 생계부양자라면?”
평양시 대동강구역의 한 식당에서 접대원으로 일하고 있는 서향숙(가명)씨는 혼자 벌어서 다섯 식구를 먹여 살리고 있다. 어머니가 시장에서 잡화 장사를 했지만 화폐개혁으로 돈을 다 날렸고, 그 뒤 장사 밑천이 없어서 텃밭농사를 짓는다. 아버지는 퇴직한 후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어 어머니를 돕고 있다. 아래 남동생 둘은 아직 중학생들이라 대학까지 가르치려면 돈이 많이 든다. 서씨는 중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식당에 들어갔을 때 정말 뛸 듯이 기뻤다고 한다. 그러나 한 달 내내 열심히 벌어도, 그 돈으로는 쌀 1-2kg도 못 사는 현실이 계속되면서 곧 절망에 빠졌다. “우리 집은 아버지, 어머니가 힘이 없어서 장사할 형편이 못 된다. 내 로임만으로 다섯 식구 입에 풀칠해야 하는데, 당장 쌀독에 옥수수쌀이 떨어지니까 무서웠다. 내가 나가서 무슨 짓을 해서라도 벌지 않으면 우리 가족이 모두 굶어죽겠구나 생각하니 결심이 섰다. 지배인한테 가서 나도 (식당) 언니들 하는 일을 달라고 했다. 내가 다 터놓고 말을 못해서 그렇지만, 진짜 그 심정은 안 당해보면 아무도 모른다. 우리 어머니, 아버지도 모른다. 그때 서향숙이는 죽었다”고 했다. 다섯 식구의 목숨이 자기에게 달려있다는 것이 지금껏 이 일을 하고 있는 유일한 이유라고 했다. 좋아서 하는 것이 아니라, 안하면 안 되기 때문에 하는 일이라며, 언젠가는 좋은 남자를 만나 가정을 이루고 주부로 살아가고 싶다고 했다.
생계 위해 성(性) 거래 나선 여성들
기근과 전쟁, 재난 시절에 여자들이 남자보다 생존에 유리한 점이 있다면, 아마 그것은 성(性, sexuality) 때문일 것이라는 얘기가 있다. 더 이상 돌파구가 없을 만큼 궁지에 몰렸을 때, 여성들의 몸은 종종 생존수단이 된다. 빈곤한 사회일수록 여성의 지위는 불평등하고, 여성의 몸은 성을 거래하는 도구로 쉽게 전락한다. 북한도 예외가 아니다. 여기에는 성을 구매 할 수 있는 ‘자원을 가진’ 남성의 권력과 함께, 사회적인 묵인, 생존을 모색하려는 여성들의 자발적 혹은 강제적 동의가 있다. 길거리에서 ‘꽃(성, 性)’을 팔아야 하는 일이든 식당 등 편의봉사망에서 보다 고정적이고 안정적으로 손님을 접대하는 일이든, 또는 돈 많고 권력 있는 유부남과의 연애로 첩살이를 하는 일이든 넓게 보면 모두 ‘생계형’에 속한다. 먹고 사는 문제로 걱정이 없다면, 첩살이를 선택할 여성들의 수는 훨씬 적을 것이다.
하영미(가명)씨는 스무 살이 되던 해부터 ‘아저씨’를 만나 6년째 관계를 이어오고 있다. 아저씨의 안해(아내)는 병을 앓고 있고, 하씨와 따로 살림을 차려 하씨가 밥도 해주고 빨래도 해주면서 살고 있다. 물론 친구들과 직장에는 비밀이다. 가족들은 드러내고 말은 안 해도 오래 전에 눈치를 챘다. 그녀의 월급으로는 턱없이 비싼 쌀을 마대로 사들고 올 때부터 이미 짐작했던 바다. 하씨는 자기가 운이 정말 좋다고 했다. 나이 차이가 스무 살이 넘지만, 나이차가 큰 만큼 여자를 아껴주고 때론 아버지처럼 자상하게 대해줘서이다. 무엇보다 힘 있는 기관에 있어서 먹을 것 걱정이 뚝 떨어졌다는 게 가장 큰 선물이라고 했다. 자기는 몸을 판다는 생각을 추호도 해본 적이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누가 유부남과 바람피운다고 할까봐 극도로 조심하고 있다. 부화사건으로 걸리면 망신도 망신이지만, 직장에서 쫓겨나고, 결정적으로 아저씨의 물질적 지원이 끊길까봐서이다. 하씨는 신우염을 앓고 있는 동생 병수발에, 늙은 부모를 혼자 부양하기는 어렵다며, 이 관계를 끝낼 생각이 전혀 없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