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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북한소식 418호

■ 시선집중

룡정 할머니, 동생 살리려 조선 방문

함경북도 청진역에서 만난 정금례(가명) 할머니는 나이 칠십이 다 되어가는 초로의 노인이었다. 행색이 조선 사람 같지 않아 보여 물었더니, 중국 길림성 용정에서 왔다고 했다. 거동이 불편해 보이는 데 어떻게 이렇게 먼 곳 까지 오게 됐느냐는 물음에 금세 눈시울을 붉혔다. 오래 전에 헤어진 여동생이 조선에 사는데, 하도 어렵다고 도와달라는 연락이 여러 번 와서 큰마음 먹고 왔다고 했다. 쌀 200kg와 3,000위안을 들고 길주군 길주읍에 사는 여동생 집을 방문하고 돌아가는 길인데, 생각만 해도 계속 눈물이 난다고 했다. 다음은 정씨 할머니의 얘기다.

“2년 만에 여동생을 만났는데 그새 폭삭 늙어버렸다. 나보다 10살이나 어린 동생인데 꼭 돌아가신 우리 엄마처럼 늙어있었다. 내가 간다고 시집, 장가간 조카들이 제 남편, 아내, 아이들까지 모두 데려와 몰려있는 것을 보고 놀랐다. 동생은 내가 쥐어준 돈을 세어 보고는 ‘이젠 살았구나, 살았어’라며 혼자 넋두리를 했다. 이 돈으로 얼마나 먹고 살 수 있느냐고 물었더니, 세 자식들에게 나누어 주고 남은 돈으로 자기는 그럭저럭 한 달 정도 살 수 있다고 했다. 뼈밖에 안남은 몸으로 나를 부둥켜안고 우는 동생이 너무 가여워서 마음 같아서는 중국에 데리고 나가 한 반년 정도 살뜰하게 먹여 살리고 싶었다. 사실 나도 남편 먼저 여의고 아들이라고 하나 있는데, 직장도 변변한 게 아니고 아직 장가도 못 든 상태라서 사정이 넉넉지가 않다. 한 푼이라도 더 쥐어주고 싶어도 못 주고 온 게 두고두고 마음이 쓰인다. 우리야 아무리 돈이 없어도 입에 풀칠이라도 하고 살지만, 조선이 어디 그런가. 동생 생각에 자꾸 눈물이 나고, 몸이 앓는 것처럼 여기저기가 아프다. 나도 더 늙어서 아예 움직이지도 못하면, 내 동생은 누가 먹여 살릴까. 동생을 볼 수 있는 게 꼭 마지막인 것만 같아서 발길이 안 떨어진다.”

“탈북자가 함경북도를 먹여 살린다”

함경북도 도인민위원회에서 근무하는 한 일군은 “탈북자가 우리 도를 먹여 살린다”고 단언했다. 그는 “고난의 행군 이후 전국적으로 탈북자가 제일 많은 곳이 우리 도이다. 그때 탈북한 사람들이 집을 잊지 않고 보내주는 돈과 물건으로 우리 도가 운영되고 있다. 우리 도에서 자체 생산하는 생활품이 하나도 없는데도 먹고 입고 쓰는 것을 보면 평양 어느 주변구역보다 낫다고 생각한다. 이게 다 탈북자들이 자기 집에 돈을 보내준 덕분이다. 아니면 우리 도 주민들 중에 지금 살아있을 사람이 절반이라도 되겠는지 의문”이라고 평했다.

청진시 추목동 사례처럼 시골 친척들이 탈북자가 있는 집이라면 무작정 들어가는 이유 역시 마찬가지다. 국경연선지역에서 화교와 큰 돈주들이 제일 잘 살고, 그 다음으로 탈북자 가족이 잘 산다는 말이 있다. 화교와 돈주들도 사실은 탈북자들 덕분에 먹고 산다는 얘기가 나온다. 탈북자들이 송금한 돈의 20-30%를 중개 수수료로 챙겨가기 때문이다. 또 탈북자 가족들이 소비하는 돈이 결국 화교나 돈주들에게 돌아가므로, 그들에게는 주요 고객이 된다. 법일군들에게도 탈북자 가족은 중요한 생계수단이다. 눈감아주는 명목으로 그들에게 상납 받는 돈과 뇌물이 제법 쏠쏠하다. 도인민위원회의 일군은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탈북자들의 송금이 함경북도 경제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은 사실이라고 했다. 단속을 아무리 강화해도 도강을 막을 수 없다. 주민들은 북한 정부의 도강 단속을 두고, “현재 먹고 살 수 있는 길이 그 길(탈북)밖에 없는데 단속하는 것은 우리 정부와 백성들 사이에 목숨 건 싸움을 하는 격”이라고 말한다. 함경북도와 량강도 보안당국에는 매일 수십 명의 실종자들이 보고되고 있다. 중국에서 강제 송환되는 사람도 한 달 평균 20여 명이 넘는다.

탈북자 집에 몰려가, “죽어도 도움 좀 받아야겠다”

장사나 소토지 농사 등 자력으로 먹고 사는 길이 모두 막히자, 막연하게 친척집을 찾아다니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주로 중국에 친척이 있어 왕래하는 사람이나 가족 중에 탈북자가 있다고 소문난 집들이다. 함경북도 청진시 보안당국에서는 길거리 단속이 부쩍 심해졌는데도, 시골에서 올라오는 농민들이 많아 당혹스러워하는 분위기다. 한 보안일군에 따르면, “뭔가 좀 얻어먹으려고, 아무리 쫓아내도 가지 않고 다시 모여 든다. 엉덩이를 들이밀고 꼼짝도 안 하는 걸 보면, 렴치라는 게 없는 사람들”이라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삶의 궁지에 몰린 사람들이다.

얼마 전 수남구역 추목동에서 있었던 일이다. 한 집에 유독 많은 사람들이 모인다고 해 보안서에서 조사를 나갔다. 둘째딸이 몇 년 전에 중국에 건너간 탈북자 집이었다. 농촌에 살던 친척들이 생계가 너무 어려워지자, 뭐라도 있지 않을까 하고 무작정 찾아온 것이었다. 갑작스럽게 친척들이 몰려와 놀란 세대주가 지금까지 딸에게 연락받은 적도 없고, 도움은 더더욱 받은 적이 없다고 아무리 얘기해도 누구도 돌아가지 않았다. 오히려 소문을 듣고 찾아오는 사람이 늘어갔다. 이상할 정도로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고 있다는 소식에 보안원이 직접 그 집을 찾았다. 집안에 있는 사람들을 세보니 그 집 식구들을 빼고, 어른, 아이 합해 총 13명이었다. 보안원은 “모두 움푹한 눈길로 혹시 자기들을 쫓아내지 않을까 불안해하며 쳐다보았다. 다들 뼈에 겉가죽만 겨우 입혀놓을 정도로 앙상한 모습이라 놀랐다”고 그때 상황을 설명했다.

집주인은 “딸이 없어진지도 벌써 5년이 넘었고, 지금은 살았는지 죽었는지 생사도 알 길이 없다. 딸이 중국에 갔으니 무슨 도움이라도 받아오지 않았겠는가 하고 친척들이 몰려오고 있는데, 아무리 돌아가라고 사정을 해도 계속 뻗치고만 있다. 우리 식구들이 먹을 것도 없는데 군식구가 늘어서 벌써 며칠 째 다 같이 죽물로 하루 세 끼를 때우고 있다. 제가 몇 번을 알아듣게 간곡히 말해도 다들 제가 거짓말을 한다면서 갈 생각을 안 한다. 이 일을 어떻게 하면 좋겠는 가”라고 울면서 보안원에게 제발 저 사람들을 돌려보내달라고 했다. 집주인 사정이 하도 딱해서 보안원이 “이 집 딸이 없어진 뒤에 나도 몇 차례 살펴봤지만, 이 집은 장사나 소토지 농사를 지으면서 잘 먹어야 옥수수밥을 겨우 먹고 사는 집이다. 딸과 련계가 없는 것이 확실한 것 같다. 여러분들이 이대로 뭉쳐있으면 이 집도 얼마 못 가 꽃제비로 나앉게 될 것이다. 그러니 이렇게 모여 있지 말고 각자 살 길을 찾아 가라”고 타일렀다. 몇 번 좋은 말로 해서 안 듣자, 나중에는 윽박지르면서 호통을 쳤다. 보안원의 서슬에 눌려 한두 명이 돌아갔지만, 나머지는 “죽어도 여기서 도움을 좀 받아야 겠다”면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아무리 말해도 안 듣자, 결국 보안원이 먼저 지쳐 집주인에게 “당신도 불쌍하지만, 저 사람들 집밖에 끌어내면 당장 쓰러져 죽을 것이 념려된다”며 차마 내쫓지 못하겠다고 했다. 집주인은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라는 거냐?”며 통곡했지만, 보안원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집을 나가버렸다.

농민들은 구걸하러 다녀

함경북도에서는 8월 말이 되자 농장원들이 출근하지 않고, 구걸하러 다니는 사례가 급증하고 있다. 경성군 협동농장에서 8년째 근속하고 있는 리숙이(가명)씨는 “농장에서 주는 것은 하나도 없고 매일 일만 시킨다. 사람들이 이대로 있다가는 다 죽겠다면서 농장에 안 나온다. 우리 농장에서는 출근한 사람이 절반도 안 된다”고 했다. 봄에 산으로 들로 풀 뜯으러 다녔던 농민들이 읍내 사는 친척집이나 먹고 살만한 집들을 찾아다니며 구걸하고 있다. 농장관리일군들이 결근자들을 찾아가면, 예전과 달리 대놓고 성을 낸다. 청진시 청암구역 방진협동농장에 다니는 최우영(가명)씨는 “지금 사는 게 사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도 불같이 성냈다가 통곡했다가 난리다. 관리일군들이 왜 안 나오느냐고 질책이라도 하면 삿대질하고 싸우다가도, 높은 고리대라도 좋으니 먹을 것을 좀 얻어 달라고 눈물 흘리며 사정하기도 한다. 다들 먹고 사는 게 어려워지다 나니 점점 정신이 없어지는 것 같다”고 했다. 농민들이 집집마다 구걸하러 나서면서 기존 꽃제비들도 경쟁자로서 경계하는 눈치다.

이번 수해 피해가 크지 않았던 함경북도에서 왜 농민들이 구걸하러 다니느냐는 질문에, 청진시의 한 농장 일군은 “큰물 피해는 크게 없었어도 비료가 워낙 없었던 데다가 병충해와 가뭄 때문에 농사가 전혀 되지 않았다. 작년 곡식을 봄철에 다 써버려 지금 남아 있는 게 없다. 도시 사람들이야 장사라도 한다지만, 우리 사람들(농장원)은 뙈기밭 농사 말고는 도저히 나올 데가 없지 않나. 지금 동냥 다니는 사람들은 가뭄 때문에 농사 망친 사람들이다. 아직 뭐라도 나올 게 있는 사람들은 소토지 농사에 목매달며 일하고 있다”고 했다.

평양 간부 가족, 최근까지 배급 중단

평양의 식량 수급 사정이 악화되면서 일부 간부 계층들도 곤란을 겪고 있다. 3월부터는 구역당 이하 하급 간부들의 배급이 중단됐고, 5월부터는 중간 간부들조차 당사자에 한해서만 배급이 실시되었다. 8월 중순, 배급이 재개되기 전까지 간부 가족들의 배급이 중단됐던 것이다. 최근에서야 평양시는 광복절을 기념해 간부들을 포함한 모든 주민들에게 올해 3월 분량부터 밀린 배급을 지급했다. 쌀이 충분하지 않아, 옥수수와 밀가루 등 다른 곡물들을 더 많이 섞은 것이었다. 그나마 해외대표부의 지원으로 꾸준히 식량이 유입되고 있는 덕분에 가능한 일이었다. 배급의 영향 때문인지, 8월 20일 한때 2,800원까지 올랐던 쌀값이 하루만에 2,500원으로 떨어졌다. 다행히 반짝 배급을 받기는 했지만, 생계 전망은 여전히 불투명하다. 물론 간부들은 최소 6개월 이상의 식량을 비축해두고 있어, 배급이 중단돼도 곧바로 생존 위기에 처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언제 다시 배급이 중단될지 모르고, 또 중단이 장기화되면 얘기가 달라진다. 돈이 있어도 국내에서 쌀을 구하기 어려워지면 더욱 불안해질 수밖에 없다. 일부 간부들은 해외출장을 다닐 수 있는 친척들과 지인들에게 도움을 청하고 있다.

중앙당의 한 간부는 “해외출장을 나가는 사람들이 예전보다 많아졌다고는 하나, 여전히 몇 안 된다. 한 명 나간다고 하면 부탁하는 사람은 열이니 당해내지를 못한다. 가족이나 친척이 해외에서 일하면 그래도 좀 사정이 낫다. 보통 1-2톤씩은 보내주는 것 같다. 우리 집도 동생이 중국에 나가 있는데, 못해도 몇 백 kg씩은 도움을 받는다”고 했다. 반면 직위도 변변치 않고, 해외에 아무 연줄이 없는 간부들은 입쌀죽이나 옥수수밥을 먹고 산다. 5대5밥을 먹더라도 옥수수쌀보다 입쌀을 더 많이 먹었던 사람들이 이제는 소화가 잘 안 되는 옥수수밥을 먹으려니 고역이다. 이들보다 더 고통스러운 사람들은 퇴임한 간부들이다. 현직에 없으니 돌봐주는 사람이 없으면, 일반 주민들의 생활이나 별 차이 없이 굶는 게 다반사다. 벌써 8월에만도 배급이 떨어져 굶어죽은 노(老)간부들이 생기고 있다.

시장에 쌀이 없다.

시장에 쌀이 없다고 한다. 식량 부족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중앙당 간부 가족들까지 배급이 중단되었다고 하니 사태가 점점 심각해지고 있는 것 같다. 중앙당 간부들이 누구인가? 배급 1순위가 아닌가. 외부에서 식량이 안 들어와도 자체 생산된 곡물만으로도 충분히 살 수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조차 배급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은 매우 충격적이다. 물론 최근 옥수수가 수입되면서 밀린 배급을 지급한 모양이지만, 배급 전망은 여전히 불투명하다. 평양 바깥으로 시선을 돌리면 더 처참하다. 소토지농사도 못해 풀죽으로 연명하던 농민들이 너도나도 구걸에 나서고 있다. 친척 중에 탈북자가 있다고 들으면 “죽어도 도움 좀 받아야겠다”고 몰려가는 사람들도 생겼다. 아우성치는 그들을 보안원도 제지하지 못한다. 거의 모든 계층에서 식량난의 고통이 심화되고 있는 양상이다. 지금으로선 외부로부터의 지원만이 유일한 해법으로 보인다. 국제사회와 남한 사회의 인도주의 지원을 기대한다.

시장에 쌀이 없다.

쌀값이 심상치 않다. 8월 말 현재, 전국 주요 도시의 시장에서 쌀 1kg가 2,500-2,600원대에 거래되고 있다. 평양에서는 한때 2,700-2,800원대까지 치솟았다. 8월 초만 해도 2,000원대에 형성됐던 것에 비해 큰 폭으로 뛰었다. 장사꾼들은 “입쌀이 없어서”라고 이유를 설명한다. 중국에서 식량이 들어오고 있다고 하나, 옥수수와 밀가루, 보리 등이 대부분이다. 무역일군들이 들여오는 쌀은 평양 중심구역처럼 상위계층 밀집지역에 간간이 풀릴 뿐이다. 일부 지방 도시에서 쌀을 구매해오던 계층에서조차 쌀을 구하지 못하는 일이 발생하고 있다.

근래 함경북도 라선시에서는 쌀이 시장에 나오기가 무섭게 팔려나가 사람들이 허탕치고 돌아가고 있다. 쌀이 귀해지자, 부르는 게 값이라서 장사꾼들도 쌀을 구하러 다니느라 분주하다. 돈이 있어도 쌀을 구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주로 지방당의 법 일군이나 중간간부 가족들이다. 요즘 간부들 대상으로 검열이 심해지면서 세대주들에게 따뜻한 밥 한 끼라도 먹이고 싶은 가정주부들이 가장 큰 불만을 표출하고 있다. 비사회주의 행위를 했다는 이유로 구속됐던 남편이 얼마 전 돌아왔다는 정혜란(가명)씨는 “예심 하는 기간 동안 제대로 먹이지도 않고, 어찌나 심하게 매질을 했는지 몸이 성한 데가 없었다. 살이 다 깎여서 얼마나 속상하든지. 밥이라도 먹이고 싶어서 시장을 몇 번이고 뱅뱅 돌아봤는데, 입쌀을 전혀 구경해보지 못했다. 하는 수 없이 옥수수밥을 해먹였는데, 잘 넘기지 못하는 것을 보니 또 속상했다. 그렇게 충성하던 사람을 이렇게 만들어놓고, 우리 돈 내고 (쌀을) 사먹자고 해도 파는 데가 없으니 이게 잘 돌아가는 나라꼴인가”라고 불편한 심경을 비쳤다. 검열 때문에 안 그래도 심기가 불편한 간부 계층에서 쌀까지 구하지 못해 더 분개하는 모습이다.

■ 식량소식

룡정 할머니, 동생 살리려 조선 방문

함경북도 청진역에서 만난 정금례(가명) 할머니는 나이 칠십이 다 되어가는 초로의 노인이었다. 행색이 조선 사람 같지 않아 보여 물었더니, 중국 길림성 용정에서 왔다고 했다. 거동이 불편해 보이는 데 어떻게 이렇게 먼 곳 까지 오게 됐느냐는 물음에 금세 눈시울을 붉혔다. 오래 전에 헤어진 여동생이 조선에 사는데, 하도 어렵다고 도와달라는 연락이 여러 번 와서 큰마음 먹고 왔다고 했다. 쌀 200kg와 3,000위안을 들고 길주군 길주읍에 사는 여동생 집을 방문하고 돌아가는 길인데, 생각만 해도 계속 눈물이 난다고 했다. 다음은 정씨 할머니의 얘기다.

“2년 만에 여동생을 만났는데 그새 폭삭 늙어버렸다. 나보다 10살이나 어린 동생인데 꼭 돌아가신 우리 엄마처럼 늙어있었다. 내가 간다고 시집, 장가간 조카들이 제 남편, 아내, 아이들까지 모두 데려와 몰려있는 것을 보고 놀랐다. 동생은 내가 쥐어준 돈을 세어 보고는 ‘이젠 살았구나, 살았어’라며 혼자 넋두리를 했다. 이 돈으로 얼마나 먹고 살 수 있느냐고 물었더니, 세 자식들에게 나누어 주고 남은 돈으로 자기는 그럭저럭 한 달 정도 살 수 있다고 했다. 뼈밖에 안남은 몸으로 나를 부둥켜안고 우는 동생이 너무 가여워서 마음 같아서는 중국에 데리고 나가 한 반년 정도 살뜰하게 먹여 살리고 싶었다. 사실 나도 남편 먼저 여의고 아들이라고 하나 있는데, 직장도 변변한 게 아니고 아직 장가도 못 든 상태라서 사정이 넉넉지가 않다. 한 푼이라도 더 쥐어주고 싶어도 못 주고 온 게 두고두고 마음이 쓰인다. 우리야 아무리 돈이 없어도 입에 풀칠이라도 하고 살지만, 조선이 어디 그런가. 동생 생각에 자꾸 눈물이 나고, 몸이 앓는 것처럼 여기저기가 아프다. 나도 더 늙어서 아예 움직이지도 못하면, 내 동생은 누가 먹여 살릴까. 동생을 볼 수 있는 게 꼭 마지막인 것만 같아서 발길이 안 떨어진다.”

농민들은 구걸하러 다녀

함경북도에서는 8월 말이 되자 농장원들이 출근하지 않고, 구걸하러 다니는 사례가 급증하고 있다. 경성군 협동농장에서 8년째 근속하고 있는 리숙이(가명)씨는 “농장에서 주는 것은 하나도 없고 매일 일만 시킨다. 사람들이 이대로 있다가는 다 죽겠다면서 농장에 안 나온다. 우리 농장에서는 출근한 사람이 절반도 안 된다”고 했다. 봄에 산으로 들로 풀 뜯으러 다녔던 농민들이 읍내 사는 친척집이나 먹고 살만한 집들을 찾아다니며 구걸하고 있다. 농장관리일군들이 결근자들을 찾아가면, 예전과 달리 대놓고 성을 낸다. 청진시 청암구역 방진협동농장에 다니는 최우영(가명)씨는 “지금 사는 게 사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도 불같이 성냈다가 통곡했다가 난리다. 관리일군들이 왜 안 나오느냐고 질책이라도 하면 삿대질하고 싸우다가도, 높은 고리대라도 좋으니 먹을 것을 좀 얻어 달라고 눈물 흘리며 사정하기도 한다. 다들 먹고 사는 게 어려워지다 나니 점점 정신이 없어지는 것 같다”고 했다. 농민들이 집집마다 구걸하러 나서면서 기존 꽃제비들도 경쟁자로서 경계하는 눈치다.

이번 수해 피해가 크지 않았던 함경북도에서 왜 농민들이 구걸하러 다니느냐는 질문에, 청진시의 한 농장 일군은 “큰물 피해는 크게 없었어도 비료가 워낙 없었던 데다가 병충해와 가뭄 때문에 농사가 전혀 되지 않았다. 작년 곡식을 봄철에 다 써버려 지금 남아 있는 게 없다. 도시 사람들이야 장사라도 한다지만, 우리 사람들(농장원)은 뙈기밭 농사 말고는 도저히 나올 데가 없지 않나. 지금 동냥 다니는 사람들은 가뭄 때문에 농사 망친 사람들이다. 아직 뭐라도 나올 게 있는 사람들은 소토지 농사에 목매달며 일하고 있다”고 했다.

[418호] 평양 간부 가족, 최근까지 배급 중단

평양의 식량 수급 사정이 악화되면서 일부 간부 계층들도 곤란을 겪고 있다. 3월부터는 구역당 이하 하급 간부들의 배급이 중단됐고, 5월부터는 중간 간부들조차 당사자에 한해서만 배급이 실시되었다. 8월 중순, 배급이 재개되기 전까지 간부 가족들의 배급이 중단됐던 것이다. 최근에서야 평양시는 광복절을 기념해 간부들을 포함한 모든 주민들에게 올해 3월 분량부터 밀린 배급을 지급했다. 쌀이 충분하지 않아, 옥수수와 밀가루 등 다른 곡물들을 더 많이 섞은 것이었다. 그나마 해외대표부의 지원으로 꾸준히 식량이 유입되고 있는 덕분에 가능한 일이었다. 배급의 영향 때문인지, 8월 20일 한때 2,800원까지 올랐던 쌀값이 하루만에 2,500원으로 떨어졌다. 다행히 반짝 배급을 받기는 했지만, 생계 전망은 여전히 불투명하다. 물론 간부들은 최소 6개월 이상의 식량을 비축해두고 있어, 배급이 중단돼도 곧바로 생존 위기에 처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언제 다시 배급이 중단될지 모르고, 또 중단이 장기화되면 얘기가 달라진다. 돈이 있어도 국내에서 쌀을 구하기 어려워지면 더욱 불안해질 수밖에 없다. 일부 간부들은 해외출장을 다닐 수 있는 친척들과 지인들에게 도움을 청하고 있다.

중앙당의 한 간부는 “해외출장을 나가는 사람들이 예전보다 많아졌다고는 하나, 여전히 몇 안 된다. 한 명 나간다고 하면 부탁하는 사람은 열이니 당해내지를 못한다. 가족이나 친척이 해외에서 일하면 그래도 좀 사정이 낫다. 보통 1-2톤씩은 보내주는 것 같다. 우리 집도 동생이 중국에 나가 있는데, 못해도 몇 백 kg씩은 도움을 받는다”고 했다. 반면 직위도 변변치 않고, 해외에 아무 연줄이 없는 간부들은 입쌀죽이나 옥수수밥을 먹고 산다. 5대5밥을 먹더라도 옥수수쌀보다 입쌀을 더 많이 먹었던 사람들이 이제는 소화가 잘 안 되는 옥수수밥을 먹으려니 고역이다. 이들보다 더 고통스러운 사람들은 퇴임한 간부들이다. 현직에 없으니 돌봐주는 사람이 없으면, 일반 주민들의 생활이나 별 차이 없이 굶는 게 다반사다. 벌써 8월에만도 배급이 떨어져 굶어죽은 노(老)간부들이 생기고 있다.

시장에 쌀이 없다

시장에 쌀이 없다고 한다. 식량 부족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중앙당 간부 가족들까지 배급이 중단되었다고 하니 사태가 점점 심각해지고 있는 것 같다. 중앙당 간부들이 누구인가? 배급 1순위가 아닌가. 외부에서 식량이 안 들어와도 자체 생산된 곡물만으로도 충분히 살 수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조차 배급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은 매우 충격적이다. 물론 최근 옥수수가 수입되면서 밀린 배급을 지급한 모양이지만, 배급 전망은 여전히 불투명하다. 평양 바깥으로 시선을 돌리면 더 처참하다. 소토지농사도 못해 풀죽으로 연명하던 농민들이 너도나도 구걸에 나서고 있다. 친척 중에 탈북자가 있다고 들으면 “죽어도 도움 좀 받아야겠다”고 몰려가는 사람들도 생겼다. 아우성치는 그들을 보안원도 제지하지 못한다. 거의 모든 계층에서 식량난의 고통이 심화되고 있는 양상이다. 지금으로선 외부로부터의 지원만이 유일한 해법으로 보인다. 국제사회와 남한 사회의 인도주의 지원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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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에 쌀이 없다.

쌀값이 심상치 않다. 8월 말 현재, 전국 주요 도시의 시장에서 쌀 1kg가 2,500-2,600원대에 거래되고 있다. 평양에서는 한때 2,700-2,800원대까지 치솟았다. 8월 초만 해도 2,000원대에 형성됐던 것에 비해 큰 폭으로 뛰었다. 장사꾼들은 “입쌀이 없어서”라고 이유를 설명한다. 중국에서 식량이 들어오고 있다고 하나, 옥수수와 밀가루, 보리 등이 대부분이다. 무역일군들이 들여오는 쌀은 평양 중심구역처럼 상위계층 밀집지역에 간간이 풀릴 뿐이다. 일부 지방 도시에서 쌀을 구매해오던 계층에서조차 쌀을 구하지 못하는 일이 발생하고 있다.

근래 함경북도 라선시에서는 쌀이 시장에 나오기가 무섭게 팔려나가 사람들이 허탕치고 돌아가고 있다. 쌀이 귀해지자, 부르는 게 값이라서 장사꾼들도 쌀을 구하러 다니느라 분주하다. 돈이 있어도 쌀을 구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주로 지방당의 법 일군이나 중간간부 가족들이다. 요즘 간부들 대상으로 검열이 심해지면서 세대주들에게 따뜻한 밥 한 끼라도 먹이고 싶은 가정주부들이 가장 큰 불만을 표출하고 있다. 비사회주의 행위를 했다는 이유로 구속됐던 남편이 얼마 전 돌아왔다는 정혜란(가명)씨는 “예심 하는 기간 동안 제대로 먹이지도 않고, 어찌나 심하게 매질을 했는지 몸이 성한 데가 없었다. 살이 다 깎여서 얼마나 속상하든지. 밥이라도 먹이고 싶어서 시장을 몇 번이고 뱅뱅 돌아봤는데, 입쌀을 전혀 구경해보지 못했다. 하는 수 없이 옥수수밥을 해먹였는데, 잘 넘기지 못하는 것을 보니 또 속상했다. 그렇게 충성하던 사람을 이렇게 만들어놓고, 우리 돈 내고 (쌀을) 사먹자고 해도 파는 데가 없으니 이게 잘 돌아가는 나라꼴인가”라고 불편한 심경을 비쳤다. 검열 때문에 안 그래도 심기가 불편한 간부 계층에서 쌀까지 구하지 못해 더 분개하는 모습이다.

■ 사회

“탈북자가 함경북도를 먹여 살린다”

함경북도 도인민위원회에서 근무하는 한 일군은 “탈북자가 우리 도를 먹여 살린다”고 단언했다. 그는 “고난의 행군 이후 전국적으로 탈북자가 제일 많은 곳이 우리 도이다. 그때 탈북한 사람들이 집을 잊지 않고 보내주는 돈과 물건으로 우리 도가 운영되고 있다. 우리 도에서 자체 생산하는 생활품이 하나도 없는데도 먹고 입고 쓰는 것을 보면 평양 어느 주변구역보다 낫다고 생각한다. 이게 다 탈북자들이 자기 집에 돈을 보내준 덕분이다. 아니면 우리 도 주민들 중에 지금 살아있을 사람이 절반이라도 되겠는지 의문”이라고 평했다.

청진시 추목동 사례처럼 시골 친척들이 탈북자가 있는 집이라면 무작정 들어가는 이유 역시 마찬가지다. 국경연선지역에서 화교와 큰 돈주들이 제일 잘 살고, 그 다음으로 탈북자 가족이 잘 산다는 말이 있다. 화교와 돈주들도 사실은 탈북자들 덕분에 먹고 산다는 얘기가 나온다. 탈북자들이 송금한 돈의 20-30%를 중개 수수료로 챙겨가기 때문이다. 또 탈북자 가족들이 소비하는 돈이 결국 화교나 돈주들에게 돌아가므로, 그들에게는 주요 고객이 된다. 법일군들에게도 탈북자 가족은 중요한 생계수단이다. 눈감아주는 명목으로 그들에게 상납 받는 돈과 뇌물이 제법 쏠쏠하다. 도인민위원회의 일군은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탈북자들의 송금이 함경북도 경제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은 사실이라고 했다. 단속을 아무리 강화해도 도강을 막을 수 없다. 주민들은 북한 정부의 도강 단속을 두고, “현재 먹고 살 수 있는 길이 그 길(탈북)밖에 없는데 단속하는 것은 우리 정부와 백성들 사이에 목숨 건 싸움을 하는 격”이라고 말한다. 함경북도와 량강도 보안당국에는 매일 수십 명의 실종자들이 보고되고 있다. 중국에서 강제 송환되는 사람도 한 달 평균 20여 명이 넘는다.

탈북자 집에 몰려가, “죽어도 도움 좀 받아야겠다”

장사나 소토지 농사 등 자력으로 먹고 사는 길이 모두 막히자, 막연하게 친척집을 찾아다니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주로 중국에 친척이 있어 왕래하는 사람이나 가족 중에 탈북자가 있다고 소문난 집들이다. 함경북도 청진시 보안당국에서는 길거리 단속이 부쩍 심해졌는데도, 시골에서 올라오는 농민들이 많아 당혹스러워하는 분위기다. 한 보안일군에 따르면, “뭔가 좀 얻어먹으려고, 아무리 쫓아내도 가지 않고 다시 모여 든다. 엉덩이를 들이밀고 꼼짝도 안 하는 걸 보면, 렴치라는 게 없는 사람들”이라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삶의 궁지에 몰린 사람들이다.

얼마 전 수남구역 추목동에서 있었던 일이다. 한 집에 유독 많은 사람들이 모인다고 해 보안서에서 조사를 나갔다. 둘째딸이 몇 년 전에 중국에 건너간 탈북자 집이었다. 농촌에 살던 친척들이 생계가 너무 어려워지자, 뭐라도 있지 않을까 하고 무작정 찾아온 것이었다. 갑작스럽게 친척들이 몰려와 놀란 세대주가 지금까지 딸에게 연락받은 적도 없고, 도움은 더더욱 받은 적이 없다고 아무리 얘기해도 누구도 돌아가지 않았다. 오히려 소문을 듣고 찾아오는 사람이 늘어갔다. 이상할 정도로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고 있다는 소식에 보안원이 직접 그 집을 찾았다. 집안에 있는 사람들을 세보니 그 집 식구들을 빼고, 어른, 아이 합해 총 13명이었다. 보안원은 “모두 움푹한 눈길로 혹시 자기들을 쫓아내지 않을까 불안해하며 쳐다보았다. 다들 뼈에 겉가죽만 겨우 입혀놓을 정도로 앙상한 모습이라 놀랐다”고 그때 상황을 설명했다.

집주인은 “딸이 없어진지도 벌써 5년이 넘었고, 지금은 살았는지 죽었는지 생사도 알 길이 없다. 딸이 중국에 갔으니 무슨 도움이라도 받아오지 않았겠는가 하고 친척들이 몰려오고 있는데, 아무리 돌아가라고 사정을 해도 계속 뻗치고만 있다. 우리 식구들이 먹을 것도 없는데 군식구가 늘어서 벌써 며칠 째 다 같이 죽물로 하루 세 끼를 때우고 있다. 제가 몇 번을 알아듣게 간곡히 말해도 다들 제가 거짓말을 한다면서 갈 생각을 안 한다. 이 일을 어떻게 하면 좋겠는 가”라고 울면서 보안원에게 제발 저 사람들을 돌려보내달라고 했다. 집주인 사정이 하도 딱해서 보안원이 “이 집 딸이 없어진 뒤에 나도 몇 차례 살펴봤지만, 이 집은 장사나 소토지 농사를 지으면서 잘 먹어야 옥수수밥을 겨우 먹고 사는 집이다. 딸과 련계가 없는 것이 확실한 것 같다. 여러분들이 이대로 뭉쳐있으면 이 집도 얼마 못 가 꽃제비로 나앉게 될 것이다. 그러니 이렇게 모여 있지 말고 각자 살 길을 찾아 가라”고 타일렀다. 몇 번 좋은 말로 해서 안 듣자, 나중에는 윽박지르면서 호통을 쳤다. 보안원의 서슬에 눌려 한두 명이 돌아갔지만, 나머지는 “죽어도 여기서 도움을 좀 받아야 겠다”면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아무리 말해도 안 듣자, 결국 보안원이 먼저 지쳐 집주인에게 “당신도 불쌍하지만, 저 사람들 집밖에 끌어내면 당장 쓰러져 죽을 것이 념려된다”며 차마 내쫓지 못하겠다고 했다. 집주인은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라는 거냐?”며 통곡했지만, 보안원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집을 나가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