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선집중
화교 빚에 전전긍긍하는 주민들
화교들에게 빚을 지고 갚지 못해 전전긍긍하는 북한 주민들이 많다. 중국에 간 식구들이 화교를 통해 돈을 부쳐주는 경우가 많은데, 일종의 중개수수료가 최소 20%에서 30%, 많으면 최고 50%까지 된다. 처음에는 자식들이 보내준 돈으로 장사를 해서 돈을 제법 벌기도 했지만, 장사라는 것이 잘 될 때도 있고 안 될 때도 있어 힘들 때는 화교들의 자금을 끌어 쓴다. 빚을 얻어 쓰면 2배로 갚아야 한다. 거기에 기한이 늦어지면 질수록 이자가 더 붙으니, 빚이 눈덩이처럼 늘어나는 건 순식간이다. 무산에 사는 경숙이 어머니도 화교 돈을 썼다가 갚지 못해 요즘 통 밤잠을 못 이루고 있다고 한다. 다음은 경숙이 어머니의 얘기다.
“쑹로얼이의 여편네가 오늘도 와서 야단을 치다가 최후통첩을 내리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문을 쾅 박차고 가버렸다. 이제 한주일 시간을 더 줄 터이니 그때까지 빚을 갚지 않으면 이 집을 내고 어디로 사라지든가, 그렇지 않으면 사람이고 뭐고 간에 몽땅 작살을 내버리고 말겠다고 큰 소리 땅땅 쳤다. 열흘 안에 물어 주마 하고 빌린 돈이 본전에 이자까지 합치니 2백만 원이 넘었다. 신정 전에 100만원을 갚기로 하고 50만원을 빌려 썼는데 그 빚을 갚지도 못하고, 또 다시 구정 전에 갚기로 하고 60만원을 빌려서 120만원을 갚아주어야 한다. 신정 때에도 서슬이 퍼래서 빚 받으러 온 쑹로얼이에게 사정해서 2월 16일 명절 전에는 두 번에 빌린 돈을 한꺼번에 본전에다 이자까지 다 해서 220만원으로 주겠다고 약속하고 얼려 보냈는데 이번에도 못 주면 그대로 넘겨 보내기 어려울 것 같다. 원래 술을 좋아하고 웬만한 일은 그대로 넘겨버리는 쑹로얼인데 그 녀편네가 지독하다.
3년 전에 중국에 들어간 딸 경숙이한테서 돈이 올 때가 벌써 지났는데 지금까지 돈은커녕 무사하다는 소식도 한번 없으니 혹시 사고라도 나지 않았는지 걱정이다. 목단강인가 하는 어디에서 한족 신랑을 만나서 배는 곯지 않고 살고 있다는데 왜서 요새는 소식이 없을까? 쑹로얼이가 화교여서 그 사람을 통해 경숙이가 보낸 돈을 받아 겨우겨우 살아가고 있었는데, 작년에 장사가 너무 안 돼 돈을 빌린 게 화근이었다. 처음에는 딸아이가 부쳐준 돈에서 쑹로얼이 10%를 가져가더니, 어느 때부터인가 20%로 되었고 작년부터는 30%를 받기 시작했다. 그것도 성에 차지 않는지, 좀 깔보이는 사람들한테서는 50%까지 받고 있다. 그래도 어디 가서 해볼 데도 없고 그저 얼마라도 받으려면 잠자코 있어야 한다. 그걸 가지고 그놈들과 시비를 하다가 나중에 시비가 커져서 손찌검, 발 찌검이 나는 건 아무것도 아니지만 그놈들이 보위부와 안전부에 다 뒤를 봐주는 대가리들이 있어서 일단 그 대가리들에게 밀고하여 걸려들기라도 하면 거기에서 다 끝나버리고 만다. 아무리 억울해도 그냥 참아야 한다.
우리 사람들이 목숨 걸고 도강해서 피땀 흘려 번 돈이 화교놈들 배 채워주는데 더 많이 들어가고 있다. 가만히 앉아서 전화나 받고 뜯어먹는 돈이 일년에 인민폐로 5~6만원 많이는 10만원이 넘게 번 놈들도 수두룩하단다. 우리 집도 쑹로얼네 바친 돈이 집 한 채 값이 넘을 것이다. 다 우리 경숙이가 저 안 먹고 안 쓰고 번 피 같은 돈이다. 경숙이 덕분에 우리는 쑹로얼네와 친분이 있어서 덕 보는 것도 있다. 그집에 불려가 일해주고 밥 한 끼 얻어먹거나 소주 몇 잔쯤 얻어 마시기도 한다. 이 동네에서는 속도 모르고 그저 부러운 눈길로 쳐다본다. 마치 옛날 지주집 마름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이다. 하기야 마름이나 다름이 없지.
작은 일을 자기가 직접 하고 큰일은 애 아버지가 일군들을 불러 모아 동아리를 만들어 가지고 하는 판이다. 그럴 때에는 먹이기는 잘 먹이지만 절대로 자기 집에서 음식을 쓰지 않는다. 조선 사람들은 어지럽고 보이는 것은 뭐나 다 욕심을 내고 빌거나 그렇지 않으면 훔쳐간다고 경계가 심하다. 일을 끝내고 돌아갈 때 주머니까지 뒤집어보지는 않지만 꼼꼼하게 살펴본다. 사람들이 많이 왔다 가는 날에는 무엇이든 꼭 없어진단다. 새것도 아닌 신발짝이거나 심지어는 화장실에 놓아둔 종이까지 어쨌든 무엇인가가 꼭 없어진다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쑹로얼이네 집에는 진짜 없는 것이 없다. 그것도 다 중국산 고급품이다. 참으로 중국 놈들은 무엇이나 재치 있게 잘도 만든다. 무릇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그들이 다 만들어 낸다. 참으로 대단한 놈들이다.
쑹로얼은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도 돈 문제만은 확실히 한다. 차용증을 쓰고 수표하고 지장 찍고 보증까지 선다. 그렇게 힘들게 빌린 돈을 이젠 구정이 며칠 앞으로 다가왔는데도 갚을 길이 막막하다. 우리 경숙이한테서는 벌써 몇 달 째 아무 연락이 없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야 돈 나올 데가 없다. 그저 경숙이 연락을 기다리는 수밖에.‘아이고, 경숙아. 네가 돈을 보내지 않으면 우리는 작살 맞고 바깥에 나 앉아야 하는 신세가 된단다. 다는 못해주더라도 얼마 돌려서라도 보내다오. 그래야 이 불쌍한 애비, 에미가 쑹로얼이를 어떻게 얼려 넘겨보지 않겠냐.’매일매일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고 또 기도해본다.”
오소리 사냥으로 겨울나기
종국씨(33)는 동생 종훈씨(32) 와 오소리 사냥을 하며 겨울을 나고 있다고 한다. 오소리 사냥을 어떻게 하느냐는 물음에 제법 상세하게 말해준다.
“동생 종훈이와 둘이서 나흘 동안이나 산중턱에 있는 오소리 굴을 팠습니다. 저는 괭이질을 하고, 종훈이는 삽질을 했는데, 어림짐작에 한 4-5미터는 팠던 것 같습니다. 내복 한 벌에 낡은 잠바 하나 걸치고 일을 하는데, 맥도 빠지고 배는 빨리 고파지고 아주 힘들었습니다. 고생한 보람이 있어서 엊그제는 오소리를 두 마리나 잡았습니다. 별로 크지도 않고 살이 찐 편도 아니지만, 두 놈을 합치면 한 10kg는 되어 보였습니다. 그놈들이 먹는 도토리니 개구리니 인간들이 다 먹어버렸으니, 살이 찔 수가 없었겠죠. 그러고 보면 인간들이 독하긴 합니다. 야생 짐승들이 살아가는 령역에서 야생 짐승들의 먹거리를 빼앗아 먹고, 나중에는 그 야생 짐승까지 잡아먹으니까요. 요새 인간들은 못 먹는 것이 없습니다. 동물이든 인간이든 먹어야 살 수 있으니까 배고프면 별로 가리는 게 없어지나 봅니다.
하여간 두 마리를 발견했을 때 그 기쁨이란 말도 못합니다. 조막 도끼를 가져갔는데, 놈들의 대가리를 까서 죽인 다음 배낭에 하나씩 넣고 그 우에는 삭정이를 주워 담았습니다. 살림 경비대원들에게 들키면 다 빼앗겨 말짱 헛수고입니다. 보호 동물이라면서 빼앗아서는 자기네 배를 불리거든요. 동생이 저만치 앞에서 걸으면서 주위를 경계하고 저는 뒤에서 걸으면서 연신 그들의 눈을 피하고 나타나면 숲에 숨고 하면서 집에 무사히 도착했습니다. 걸어서 한 시간이면 갈 거리를 그날은 한 세 시간 넘게 걸었던 것 같습니다. 배낭을 벗어놓고는 얼른 문을 잠그고 창문에는 두꺼운 수건으로 가려 놓았습니다. 누가 보고 소문을 내면 안 되니까요. 너무 허기가 져서, 맨 물에 옥수수밥을 말아서 간단히 요기했습니다.
오소리 고기 만드는 거 본 적 있으십니까? 일단 칼을 집어 들고 오소리 껍질을 벗깁니다. 옛날에는 껍질을 벗기고 고기만 먹었겠지만 지금은 끓는 물에 데친 다음에 털을 뽑습니다. 껍질(가죽)도 먹어야 하니까요. 배를 가르니 창자가 흘러나오고 흥건하게 핏물이 콸콸 쏟아져 나와 얼른 그릇에 받쳐 담습니다. 원래는 멱을 따서 피를 빼버려야 하지만 그 피도 아까워서 버리지 못합니다. 종훈이는 신장과 타래곱을 잘라내 그대로 입에 꾸겨 넣고는 생채로 삼켜버렸습니다. 입가에서 선지피가 뚝뚝 흘러 떨어지는 걸 보니 괴이하긴 합니다. 그놈들 뱃가죽에서 떼여낸 곱이 한 서근은 될 것 같더군요. 저것을 기름으로 빼내면 한 근은 될 것입니다.
불에 덴 상처(화상)에 바르면 이보다 좋은 약이 없으니 장마당에서는 100g에 3,000원에 팔 수 있습니다. 한 근이면 18,000원을 벌 수 있는 셈이죠. 털을 다 뽑고 깨끗이 씻으면, 오소리 고기는 정말 아무것도 버릴 것이 없습니다. 저울에 달아보니 고기와 내장을 합해서 8키로 나갔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끓는 가마에 삶아서 한번이라도 배부르게 고기를 먹어 보고 싶었지만, 하루 식량으로 없앨 수는 없었습니다. 시장에 내놓고 팔지는 못하지만 조용히 뒷거래로 팔면 500g에 3,000원 하니까 다 팔면 한 4만8천원은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곱을 판 것까지 6만 6천원을 벌 수 있습니다. 옥수수가 요즘에 kg에 900원 정도 하니까, 70kg 넘게 살 수 있는 아주 귀한 돈입니다. 동생과 둘이 나누면 못해도 35키로씩은 차례지는 셈입니다. 우리 집도 동생집도 식구가 셋씩 되는데, 두 집이 한 달 식량을 해결하게 되었습니다. 아직 팔지 못했지만, 벌써 너무 흥분이 되고 좋습니다. 오소리 고기를 본 다섯 살 큰 아들놈이 고기를 먹겠다고 칭얼대서 어제 아침에는 고기 대신 받아놓은 피를 끓여 먹였습니다. 반년이 넘게 고기 맛을 못 본 우리 집에서는 선짓국이 특식입니다. 오소리를 두 마리나 잡을 수 있었던 것은 운이 좋았습니다. 일단 이 놈들부터 처리를 하고, 직장 안 가는 날 틈틈이 종훈이와 오소리굴을 들여다보기로 했습니다. 요즘에는 꿈에서도 오소리 잡는 꿈을 꿉니다.”
염소젖으로 생계유지하는 모자(母子)
경남이는 현재 어머니와 단둘이 산다. 아버지와 누님이 고난의 행군 시기에 차례로 세상을 떠났는데, 경남이는 “아버지는 1등 머저리이고, 누님은 2등 머저리”라고 했다. 아버지는 당의 말이라면 하늘같이 떠받드는 사람이었다. 식량 배급이 중단된 뒤에 남들은 도강하거나 도둑질을 하거나 무슨 짓을 해서든 살아남으려고 몸부림쳤는데, 아버지는 당의 뜻에 어긋나는 일은 절대 할 수 없다며 어떤 불법도 저지르지 않았다. 몸은 점점 쇠약해지고, 결국 당신이 먼저 세상을 떠났다. 고지식하게 죽어간 사람들을 살아남은 사람들은‘머저리’라고 했다. 경남이가 죽다 살아남은 것은 아버지와 누나를 잃은 어머니의 처절한 몸부림 덕분이었다. 다음은 그의 얘기다.
“저는 올해 스물두살입니다. 원래는 공화국을 보위하는 인민군대에서 청춘의 끓는 피를 바쳐야 되겠건만 날 때부터 약골인데다, 구루병에 걸려 17살에 참군할 나이가 되었을 때 키가 겨우 150cm 될까 말까 해서 군대에 못 갔습니다. 이웃들은 제가 참군하지 못한 것이 오히려 다행이라고 말합니다. 지금 같은 세월에 군대에 나갔다가 허약에 걸려 죽기 십상이고, 의외의 사고로 다리병신, 팔 병신이 되거나 죽는 하전사들이 많다고 했습니다. 우리 인민반에도 아들이 허약에 걸려서 군대 간지 2-3년 만에 돌아온 집이 더러 있습니다.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키가 안 큰 것이 잘되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병들거나 굶어죽더라도 어머니 곁에서 죽을 수 있으니, 그것만으로도 안심이 됩니다.
저는 어머니와 단둘이 살고 있습니다. 아버지는 제가 철들기도 전 고난의 행군 때 벌써 돌아가셨습니다. 저보다 두 살 위인 누나가 있었지만, 누나는 파라티푸스 병에 걸려 죽었습니다. 사람들 말로 하자면, 아버지는 1등 머저리요, 누나는 2등 머저리인 셈입니다. 어머니가 아니었으면, 저는 3등 머저리가 될 뻔했습니다. 저도 누나처럼 파라티푸스에 걸렸는데, 어머니가 거의 미치광이 되다시피 울고 불며 친척집이라는 친척집은 죄다 돌아다니면서 돈을 꾸어 중국 약을 먹인 덕에 요행히 살았습니다. 그 빚을 갚으려고 어머니는 목숨을 걸고 도강해 중국 룡정에 갔다가 1년 만에 돌아오기도 했습니다. 마음씨 고운 한족 집에서 농사짓는 일을 거들어 주고 품삯을 받아왔는데, 어머니는 고작 1년을 일했을 뿐인데 시뻘건 인민폐 100위안짜리를 한 묶음이나 가지고 왔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한 사람이 죽을 때까지 벌어도 어림없는 큰돈입니다.
어머니가 벌어온 중국 돈으로 빚을 갚고도 많이 남아서 다 찌그러진 집도 수리하고 돼지새끼도 2마리 사서 기르고 염소도 한 마리 샀습니다. 염소젖을 날마다 짜서 먹은 덕으로 어머니와 저는 지금까지 큰 병을 앓지 않고 무탈합니다. 그때 샀던 돼지와 염소는 염소 새끼 2마리만 남기고 다 팔았습니다. 염소 새끼 두 마리가 커서 이제는 젖을 짤 수 있습니다. 잘 먹이면 염소젖이 한 병 넘게 나오는데, 옥수수 1kg를 바꿀 수 있어 염소들이 우리 두 식구의 명줄입니다. 그래서 겨울에 추울 때에는 냄새가 나더라도 염소들을 부엌에 들여놓고 삽니다. 구린내와 오줌 지린내가 온 집에 진동해서 괴롭지만, 염소들이 없으면 우리 모자가 어떻게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염소가 없어진다는 생각만 해도 눈앞이 캄캄합니다. 어머니와 저는 염소 두 마리에게 복덩이, 금덩이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항상 고마워하며 친 가족처럼 살고 있습니다.”
회령시 인계리농장 축산반, 사료부족 심각
함경북도 회령시 농장에 사료가 턱없이 부족해 축산반 가축들이 많이 죽어가고 있다. 작년 초까지만 해도 돼지 150마리에 토끼 80마리, 닭 300마리를 키우고 있었는데, 사료 부족에 병까지 돌아 돼지 40여 마리에 토끼 30여 마리밖에 안 남았다. 닭은 한 마리도 없다. 병에 잘 안 걸리고, 사료도 적게 먹는 염소가 80여 마리 남아있다. 염소가 험한 산에 잘 오르고 아무거나 닥치는 대로 먹는 짐승이라고는 하지만, 사료는커녕 변변한 먹을거리가 없어 홀쭉하다. 추운 겨울이라 젖도 나오지 않는다. 염소 80마리 중 절반은 오는 2월 16일 명절 때 군대로 지원할 계획이다. 축산반에서 일하는 사람은 총 34명인데 염소까지 줄면, 여남은 명만 남고 나머지는 일반 농사일로 돌려질 것이다. 축산반에도 옥수수밭이 약 20정보 있는데, 축산반 농장원들은 소출의 30%를 군량미, 10%는 애국미로 바치고 나머지로 가축들의 사료와 자기네들 식량을 해결한다. 작년에 옥수수 크기가 반 뼘도 안 될 정도로 농사가 잘 안됐다. 수확하기도 전에 농장을 쑥대밭으로 만들다시피 옥수수를 훔쳐간 군인들 때문에 정보당 2톤도 못 거뒀다. 식량도 부족한데 사료가 있을리 만무하다. 축산반 농장원들은 “사람이 먼저 먹고 살아야 짐승도 기르고 농사도 짓고 강성국가를 건설하여 주체 혁명 유업을 완수할 것이 아닌가? 먹을 수 있는 것은 다 먹고 먹고 죽지만 않으면 다 먹어도 부족하다. 어떻게 해서라도 먹고 버텨야 조국이 통일이 되는 그 날도 볼 수 있을 것이 아닌가? 우리 먹을 것도 없는 형편이니, 나머지 돼지와 토끼들도 굶어죽거나 병들어 죽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말한다.
중국 입쌀 반입 소문에 쌀값 급락
지난 12월에 kg당 5,000원까지 치솟았던 쌀값이 최근 빠르게 급락하고 있다. 함경북도 청진에서는 12월 말에 kg당 4,500원하던 쌀값이 1월 18일까지 3,500원 선을 유지하다가, 20일부터 3,000원대로 뚝 떨어졌다. 2월에는 급기야 2,700원으로 떨어져 사실상 4개월 만에 고공행진을 멈추었다. 식량 상인들은 중국에서 곧 대량의 입쌀 들어올 것이라는 소문이 전국에 퍼져 돈주들이 서둘러 쌀을 시장에 내놓고 있어서라고 말한다. 지난 1월 초, 인민폐 거래를 금지한 것을 가격 하락의 원인으로 지적하기도 한다. 인민폐 사용량이 급감하면서 인민폐의 가격이 눈에 띄게 떨어지고 있는데, 대부분이 중국산이라 물가 하락을 견인하고 있다는 얘기다. 공산품, 식품, 건설자재, 전자제품 등 전반적인 물가 하락이 나타나고 있으며 국내산 물품의 가격 하락으로 이어지는 추세이다. 돼지고기의 경우 11월까지 kg당 7,500원, 12월에 8,000원까지 하다가 1월 중순 6,400원대로 떨어졌다가 2월 초 6,200원까지 내려간 상태다. 하지만 하락세가 언제까지 지속될지는 예측하기 어렵다. 일각에서는 2월 16일 명절까지 하락세가 계속될 것이며, 명절 공급이 나오면 더 떨어지지 않겠느냐는 전망도 있으나, 중국에서 약속했다는 식량이 언제 들어올지 미지수이기 때문에 시장으로 나온 쌀이 언제 다시 들어갈지 알 수 없어 섣불리 예측하기 어렵다는 의견들이 많다.
2011.09-2012.02 함북 청진 물가동향
(단위: 북한 원)
2011년 9월 | 10월 | 11월 | 12월 | 2012년
1월 중순 | 1월 말 | 2월 초 | ||||||||
쌀 kg | 2,500 | 3,400 | 3,600 | 5,000 | 3,700 | 3,000 | 2,700 | |||||||
1달러 | 2,870 | 3,400 | 3,800 | 5,100 | 3,800 | 3,800 | 2,800 | |||||||
1위안 | 448 | 540 | 600 | 780 | 580 | 580 | 450 |
북녘 봄 농사, 우리가 돕자
유난히 한파가 기승을 부리는 올 겨울, 맨몸뚱이로 버텨야 하는 북한 주민들을 생각하면 춥다는 소리도 쑥 들어간다. 북한 주민들은 이 겨울을 어떻게 나고 있을까. 오소리 사냥 얘기를 이번에 처음 들었다. 오소리가 털 빼고는 버릴 게 없다며 핏물까지 받는다거나, 고기를 먹고파 하는 아이에게 그 핏물을 끓여주었다는 부정(父精)이 오래도록 가슴을 쳤다. 염소젖에 목숨 줄을 걸고 있는 모자(母子)의 이야기도, 화교에게 진 빚을 갚지 못해 전전긍긍하는 어머니의 얘기도 마음이 몹시 아리고 아팠다. 늘 고단하고 춥고 배고픈 북한 주민들이 단 하루라도 따뜻한 구들에서 푸짐한 밥 한 끼 먹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저절로 기도하는 마음이 든다. 가진 것이 너무 많고, 먹고 쓰지 않아 버리는 것이 넘쳐 나는 우리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현실이 죄스러울 뿐이다. 북한 어린이 돕기 거리모금을 하다보면, 북한 사람을 왜 도와주느냐며 고래고래 호통을 치는 어르신들을 만날 때가 있다. 전쟁을 겪은 세대에게 북한은 철천지원수니 당연한 반응이다. 그러나 욕하다가도 큰 지폐를 내어주는 분들도 역시 그 분들이다. 전란과 가난 속에 당신들은 직접 굶주림의 고통을 겪어보았기 때문이다. 정이 많아 가난해도 밥 한술이라도 나눠먹던 우리 민족이 어쩌다 서로를 이토록 미워하고 경원시하게 되었을까. 정치적으로 잘잘못을 따지는 일은 정부 당국자들이 대화로 풀어가고, 다시 우리네 인심을 회복했으면 좋겠다. 입으로는 욕을 해도 춥고 배고픈 이들에게 따뜻한 밥 한 끼 줄 수 있다면, 화해는 이미 이루어진 것이리라. 봄이 다가온다. 곧 농사를 시작할 그들에게 하루빨리 비료와 농자재를 지원해줄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하고 기도한다.
■ 사회
화교 빚에 전전긍긍하는 주민들
화교들에게 빚을 지고 갚지 못해 전전긍긍하는 북한 주민들이 많다. 중국에 간 식구들이 화교를 통해 돈을 부쳐주는 경우가 많은데, 일종의 중개수수료가 최소 20%에서 30%, 많으면 최고 50%까지 된다. 처음에는 자식들이 보내준 돈으로 장사를 해서 돈을 제법 벌기도 했지만, 장사라는 것이 잘 될 때도 있고 안 될 때도 있어 힘들 때는 화교들의 자금을 끌어 쓴다. 빚을 얻어 쓰면 2배로 갚아야 한다. 거기에 기한이 늦어지면 질수록 이자가 더 붙으니, 빚이 눈덩이처럼 늘어나는 건 순식간이다. 무산에 사는 경숙이 어머니도 화교 돈을 썼다가 갚지 못해 요즘 통 밤잠을 못 이루고 있다고 한다. 다음은 경숙이 어머니의 얘기다.
“쑹로얼이의 여편네가 오늘도 와서 야단을 치다가 최후통첩을 내리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문을 쾅 박차고 가버렸다. 이제 한주일 시간을 더 줄 터이니 그때까지 빚을 갚지 않으면 이 집을 내고 어디로 사라지든가, 그렇지 않으면 사람이고 뭐고 간에 몽땅 작살을 내버리고 말겠다고 큰 소리 땅땅 쳤다. 열흘 안에 물어 주마 하고 빌린 돈이 본전에 이자까지 합치니 2백만 원이 넘었다. 신정 전에 100만원을 갚기로 하고 50만원을 빌려 썼는데 그 빚을 갚지도 못하고, 또 다시 구정 전에 갚기로 하고 60만원을 빌려서 120만원을 갚아주어야 한다. 신정 때에도 서슬이 퍼래서 빚 받으러 온 쑹로얼이에게 사정해서 2월 16일 명절 전에는 두 번에 빌린 돈을 한꺼번에 본전에다 이자까지 다 해서 220만원으로 주겠다고 약속하고 얼려 보냈는데 이번에도 못 주면 그대로 넘겨 보내기 어려울 것 같다. 원래 술을 좋아하고 웬만한 일은 그대로 넘겨버리는 쑹로얼인데 그 녀편네가 지독하다.
3년 전에 중국에 들어간 딸 경숙이한테서 돈이 올 때가 벌써 지났는데 지금까지 돈은커녕 무사하다는 소식도 한번 없으니 혹시 사고라도 나지 않았는지 걱정이다. 목단강인가 하는 어디에서 한족 신랑을 만나서 배는 곯지 않고 살고 있다는데 왜서 요새는 소식이 없을까? 쑹로얼이가 화교여서 그 사람을 통해 경숙이가 보낸 돈을 받아 겨우겨우 살아가고 있었는데, 작년에 장사가 너무 안 돼 돈을 빌린 게 화근이었다. 처음에는 딸아이가 부쳐준 돈에서 쑹로얼이 10%를 가져가더니, 어느 때부터인가 20%로 되었고 작년부터는 30%를 받기 시작했다. 그것도 성에 차지 않는지, 좀 깔보이는 사람들한테서는 50%까지 받고 있다. 그래도 어디 가서 해볼 데도 없고 그저 얼마라도 받으려면 잠자코 있어야 한다. 그걸 가지고 그놈들과 시비를 하다가 나중에 시비가 커져서 손찌검, 발 찌검이 나는 건 아무것도 아니지만 그놈들이 보위부와 안전부에 다 뒤를 봐주는 대가리들이 있어서 일단 그 대가리들에게 밀고하여 걸려들기라도 하면 거기에서 다 끝나버리고 만다. 아무리 억울해도 그냥 참아야 한다.
우리 사람들이 목숨 걸고 도강해서 피땀 흘려 번 돈이 화교놈들 배 채워주는데 더 많이 들어가고 있다. 가만히 앉아서 전화나 받고 뜯어먹는 돈이 일년에 인민폐로 5~6만원 많이는 10만원이 넘게 번 놈들도 수두룩하단다. 우리 집도 쑹로얼네 바친 돈이 집 한 채 값이 넘을 것이다. 다 우리 경숙이가 저 안 먹고 안 쓰고 번 피 같은 돈이다. 경숙이 덕분에 우리는 쑹로얼네와 친분이 있어서 덕 보는 것도 있다. 그집에 불려가 일해주고 밥 한 끼 얻어먹거나 소주 몇 잔쯤 얻어 마시기도 한다. 이 동네에서는 속도 모르고 그저 부러운 눈길로 쳐다본다. 마치 옛날 지주집 마름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이다. 하기야 마름이나 다름이 없지.
작은 일을 자기가 직접 하고 큰일은 애 아버지가 일군들을 불러 모아 동아리를 만들어 가지고 하는 판이다. 그럴 때에는 먹이기는 잘 먹이지만 절대로 자기 집에서 음식을 쓰지 않는다. 조선 사람들은 어지럽고 보이는 것은 뭐나 다 욕심을 내고 빌거나 그렇지 않으면 훔쳐간다고 경계가 심하다. 일을 끝내고 돌아갈 때 주머니까지 뒤집어보지는 않지만 꼼꼼하게 살펴본다. 사람들이 많이 왔다 가는 날에는 무엇이든 꼭 없어진단다. 새것도 아닌 신발짝이거나 심지어는 화장실에 놓아둔 종이까지 어쨌든 무엇인가가 꼭 없어진다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쑹로얼이네 집에는 진짜 없는 것이 없다. 그것도 다 중국산 고급품이다. 참으로 중국 놈들은 무엇이나 재치 있게 잘도 만든다. 무릇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그들이 다 만들어 낸다. 참으로 대단한 놈들이다.
쑹로얼은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도 돈 문제만은 확실히 한다. 차용증을 쓰고 수표하고 지장 찍고 보증까지 선다. 그렇게 힘들게 빌린 돈을 이젠 구정이 며칠 앞으로 다가왔는데도 갚을 길이 막막하다. 우리 경숙이한테서는 벌써 몇 달 째 아무 연락이 없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야 돈 나올 데가 없다. 그저 경숙이 연락을 기다리는 수밖에.‘아이고, 경숙아. 네가 돈을 보내지 않으면 우리는 작살 맞고 바깥에 나 앉아야 하는 신세가 된단다. 다는 못해주더라도 얼마 돌려서라도 보내다오. 그래야 이 불쌍한 애비, 에미가 쑹로얼이를 어떻게 얼려 넘겨보지 않겠냐.’매일매일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고 또 기도해본다.”
■ 식량소식
오소리 사냥으로 겨울나기
종국씨(33)는 동생 종훈씨(32) 와 오소리 사냥을 하며 겨울을 나고 있다고 한다. 오소리 사냥을 어떻게 하느냐는 물음에 제법 상세하게 말해준다.
“동생 종훈이와 둘이서 나흘 동안이나 산중턱에 있는 오소리 굴을 팠습니다. 저는 괭이질을 하고, 종훈이는 삽질을 했는데, 어림짐작에 한 4-5미터는 팠던 것 같습니다. 내복 한 벌에 낡은 잠바 하나 걸치고 일을 하는데, 맥도 빠지고 배는 빨리 고파지고 아주 힘들었습니다. 고생한 보람이 있어서 엊그제는 오소리를 두 마리나 잡았습니다. 별로 크지도 않고 살이 찐 편도 아니지만, 두 놈을 합치면 한 10kg는 되어 보였습니다. 그놈들이 먹는 도토리니 개구리니 인간들이 다 먹어버렸으니, 살이 찔 수가 없었겠죠. 그러고 보면 인간들이 독하긴 합니다. 야생 짐승들이 살아가는 령역에서 야생 짐승들의 먹거리를 빼앗아 먹고, 나중에는 그 야생 짐승까지 잡아먹으니까요. 요새 인간들은 못 먹는 것이 없습니다. 동물이든 인간이든 먹어야 살 수 있으니까 배고프면 별로 가리는 게 없어지나 봅니다.
하여간 두 마리를 발견했을 때 그 기쁨이란 말도 못합니다. 조막 도끼를 가져갔는데, 놈들의 대가리를 까서 죽인 다음 배낭에 하나씩 넣고 그 우에는 삭정이를 주워 담았습니다. 살림 경비대원들에게 들키면 다 빼앗겨 말짱 헛수고입니다. 보호 동물이라면서 빼앗아서는 자기네 배를 불리거든요. 동생이 저만치 앞에서 걸으면서 주위를 경계하고 저는 뒤에서 걸으면서 연신 그들의 눈을 피하고 나타나면 숲에 숨고 하면서 집에 무사히 도착했습니다. 걸어서 한 시간이면 갈 거리를 그날은 한 세 시간 넘게 걸었던 것 같습니다. 배낭을 벗어놓고는 얼른 문을 잠그고 창문에는 두꺼운 수건으로 가려 놓았습니다. 누가 보고 소문을 내면 안 되니까요. 너무 허기가 져서, 맨 물에 옥수수밥을 말아서 간단히 요기했습니다.
오소리 고기 만드는 거 본 적 있으십니까? 일단 칼을 집어 들고 오소리 껍질을 벗깁니다. 옛날에는 껍질을 벗기고 고기만 먹었겠지만 지금은 끓는 물에 데친 다음에 털을 뽑습니다. 껍질(가죽)도 먹어야 하니까요. 배를 가르니 창자가 흘러나오고 흥건하게 핏물이 콸콸 쏟아져 나와 얼른 그릇에 받쳐 담습니다. 원래는 멱을 따서 피를 빼버려야 하지만 그 피도 아까워서 버리지 못합니다. 종훈이는 신장과 타래곱을 잘라내 그대로 입에 꾸겨 넣고는 생채로 삼켜버렸습니다. 입가에서 선지피가 뚝뚝 흘러 떨어지는 걸 보니 괴이하긴 합니다. 그놈들 뱃가죽에서 떼여낸 곱이 한 서근은 될 것 같더군요. 저것을 기름으로 빼내면 한 근은 될 것입니다.
불에 덴 상처(화상)에 바르면 이보다 좋은 약이 없으니 장마당에서는 100g에 3,000원에 팔 수 있습니다. 한 근이면 18,000원을 벌 수 있는 셈이죠. 털을 다 뽑고 깨끗이 씻으면, 오소리 고기는 정말 아무것도 버릴 것이 없습니다. 저울에 달아보니 고기와 내장을 합해서 8키로 나갔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끓는 가마에 삶아서 한번이라도 배부르게 고기를 먹어 보고 싶었지만, 하루 식량으로 없앨 수는 없었습니다. 시장에 내놓고 팔지는 못하지만 조용히 뒷거래로 팔면 500g에 3,000원 하니까 다 팔면 한 4만8천원은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곱을 판 것까지 6만 6천원을 벌 수 있습니다. 옥수수가 요즘에 kg에 900원 정도 하니까, 70kg 넘게 살 수 있는 아주 귀한 돈입니다. 동생과 둘이 나누면 못해도 35키로씩은 차례지는 셈입니다. 우리 집도 동생집도 식구가 셋씩 되는데, 두 집이 한 달 식량을 해결하게 되었습니다. 아직 팔지 못했지만, 벌써 너무 흥분이 되고 좋습니다. 오소리 고기를 본 다섯 살 큰 아들놈이 고기를 먹겠다고 칭얼대서 어제 아침에는 고기 대신 받아놓은 피를 끓여 먹였습니다. 반년이 넘게 고기 맛을 못 본 우리 집에서는 선짓국이 특식입니다. 오소리를 두 마리나 잡을 수 있었던 것은 운이 좋았습니다. 일단 이 놈들부터 처리를 하고, 직장 안 가는 날 틈틈이 종훈이와 오소리굴을 들여다보기로 했습니다. 요즘에는 꿈에서도 오소리 잡는 꿈을 꿉니다.”
염소젖으로 생계 유지하는 모자
경남이는 현재 어머니와 단둘이 산다. 아버지와 누님이 고난의 행군 시기에 차례로 세상을 떠났는데, 경남이는 “아버지는 1등 머저리이고, 누님은 2등 머저리”라고 했다. 아버지는 당의 말이라면 하늘같이 떠받드는 사람이었다. 식량 배급이 중단된 뒤에 남들은 도강하거나 도둑질을 하거나 무슨 짓을 해서든 살아남으려고 몸부림쳤는데, 아버지는 당의 뜻에 어긋나는 일은 절대 할 수 없다며 어떤 불법도 저지르지 않았다. 몸은 점점 쇠약해지고, 결국 당신이 먼저 세상을 떠났다. 고지식하게 죽어간 사람들을 살아남은 사람들은‘머저리’라고 했다. 경남이가 죽다 살아남은 것은 아버지와 누나를 잃은 어머니의 처절한 몸부림 덕분이었다. 다음은 그의 얘기다.
“저는 올해 스물두살입니다. 원래는 공화국을 보위하는 인민군대에서 청춘의 끓는 피를 바쳐야 되겠건만 날 때부터 약골인데다, 구루병에 걸려 17살에 참군할 나이가 되었을 때 키가 겨우 150cm 될까 말까 해서 군대에 못 갔습니다. 이웃들은 제가 참군하지 못한 것이 오히려 다행이라고 말합니다. 지금 같은 세월에 군대에 나갔다가 허약에 걸려 죽기 십상이고, 의외의 사고로 다리병신, 팔 병신이 되거나 죽는 하전사들이 많다고 했습니다. 우리 인민반에도 아들이 허약에 걸려서 군대 간지 2-3년 만에 돌아온 집이 더러 있습니다.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키가 안 큰 것이 잘되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병들거나 굶어죽더라도 어머니 곁에서 죽을 수 있으니, 그것만으로도 안심이 됩니다.
저는 어머니와 단둘이 살고 있습니다. 아버지는 제가 철들기도 전 고난의 행군 때 벌써 돌아가셨습니다. 저보다 두 살 위인 누나가 있었지만, 누나는 파라티푸스 병에 걸려 죽었습니다. 사람들 말로 하자면, 아버지는 1등 머저리요, 누나는 2등 머저리인 셈입니다. 어머니가 아니었으면, 저는 3등 머저리가 될 뻔했습니다. 저도 누나처럼 파라티푸스에 걸렸는데, 어머니가 거의 미치광이 되다시피 울고 불며 친척집이라는 친척집은 죄다 돌아다니면서 돈을 꾸어 중국 약을 먹인 덕에 요행히 살았습니다. 그 빚을 갚으려고 어머니는 목숨을 걸고 도강해 중국 룡정에 갔다가 1년 만에 돌아오기도 했습니다. 마음씨 고운 한족 집에서 농사짓는 일을 거들어 주고 품삯을 받아왔는데, 어머니는 고작 1년을 일했을 뿐인데 시뻘건 인민폐 100위안짜리를 한 묶음이나 가지고 왔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한 사람이 죽을 때까지 벌어도 어림없는 큰돈입니다.
어머니가 벌어온 중국 돈으로 빚을 갚고도 많이 남아서 다 찌그러진 집도 수리하고 돼지새끼도 2마리 사서 기르고 염소도 한 마리 샀습니다. 염소젖을 날마다 짜서 먹은 덕으로 어머니와 저는 지금까지 큰 병을 앓지 않고 무탈합니다. 그때 샀던 돼지와 염소는 염소 새끼 2마리만 남기고 다 팔았습니다. 염소 새끼 두 마리가 커서 이제는 젖을 짤 수 있습니다. 잘 먹이면 염소젖이 한 병 넘게 나오는데, 옥수수 1kg를 바꿀 수 있어 염소들이 우리 두 식구의 명줄입니다. 그래서 겨울에 추울 때에는 냄새가 나더라도 염소들을 부엌에 들여놓고 삽니다. 구린내와 오줌 지린내가 온 집에 진동해서 괴롭지만, 염소들이 없으면 우리 모자가 어떻게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염소가 없어진다는 생각만 해도 눈앞이 캄캄합니다. 어머니와 저는 염소 두 마리에게 복덩이, 금덩이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항상 고마워하며 친 가족처럼 살고 있습니다.”
회령시 인계리농장 축산반, 사료부족 심각
함경북도 회령시 농장에 사료가 턱없이 부족해 축산반 가축들이 많이 죽어가고 있다. 작년 초까지만 해도 돼지 150마리에 토끼 80마리, 닭 300마리를 키우고 있었는데, 사료 부족에 병까지 돌아 돼지 40여 마리에 토끼 30여 마리밖에 안 남았다. 닭은 한 마리도 없다. 병에 잘 안 걸리고, 사료도 적게 먹는 염소가 80여 마리 남아있다. 염소가 험한 산에 잘 오르고 아무거나 닥치는 대로 먹는 짐승이라고는 하지만, 사료는커녕 변변한 먹을거리가 없어 홀쭉하다. 추운 겨울이라 젖도 나오지 않는다. 염소 80마리 중 절반은 오는 2월 16일 명절 때 군대로 지원할 계획이다. 축산반에서 일하는 사람은 총 34명인데 염소까지 줄면, 여남은 명만 남고 나머지는 일반 농사일로 돌려질 것이다. 축산반에도 옥수수밭이 약 20정보 있는데, 축산반 농장원들은 소출의 30%를 군량미, 10%는 애국미로 바치고 나머지로 가축들의 사료와 자기네들 식량을 해결한다. 작년에 옥수수 크기가 반 뼘도 안 될 정도로 농사가 잘 안됐다. 수확하기도 전에 농장을 쑥대밭으로 만들다시피 옥수수를 훔쳐간 군인들 때문에 정보당 2톤도 못 거뒀다. 식량도 부족한데 사료가 있을리 만무하다. 축산반 농장원들은 “사람이 먼저 먹고 살아야 짐승도 기르고 농사도 짓고 강성국가를 건설하여 주체 혁명 유업을 완수할 것이 아닌가? 먹을 수 있는 것은 다 먹고 먹고 죽지만 않으면 다 먹어도 부족하다. 어떻게 해서라도 먹고 버텨야 조국이 통일이 되는 그 날도 볼 수 있을 것이 아닌가? 우리 먹을 것도 없는 형편이니, 나머지 돼지와 토끼들도 굶어죽거나 병들어 죽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말한다.
중국 입쌀 반입 소문에 쌀값 급락
지난 12월에 kg당 5,000원까지 치솟았던 쌀값이 최근 빠르게 급락하고 있다. 함경북도 청진에서는 12월 말에 kg당 4,500원하던 쌀값이 1월 18일까지 3,500원 선을 유지하다가, 20일부터 3,000원대로 뚝 떨어졌다. 2월에는 급기야 2,700원으로 떨어져 사실상 4개월 만에 고공행진을 멈추었다. 식량 상인들은 중국에서 곧 대량의 입쌀 들어올 것이라는 소문이 전국에 퍼져 돈주들이 서둘러 쌀을 시장에 내놓고 있어서라고 말한다. 지난 1월 초, 인민폐 거래를 금지한 것을 가격 하락의 원인으로 지적하기도 한다. 인민폐 사용량이 급감하면서 인민폐의 가격이 눈에 띄게 떨어지고 있는데, 대부분이 중국산이라 물가 하락을 견인하고 있다는 얘기다. 공산품, 식품, 건설자재, 전자제품 등 전반적인 물가 하락이 나타나고 있으며 국내산 물품의 가격 하락으로 이어지는 추세이다. 돼지고기의 경우 11월까지 kg당 7,500원, 12월에 8,000원까지 하다가 1월 중순 6,400원대로 떨어졌다가 2월 초 6,200원까지 내려간 상태다. 하지만 하락세가 언제까지 지속될지는 예측하기 어렵다. 일각에서는 2월 16일 명절까지 하락세가 계속될 것이며, 명절 공급이 나오면 더 떨어지지 않겠느냐는 전망도 있으나, 중국에서 약속했다는 식량이 언제 들어올지 미지수이기 때문에 시장으로 나온 쌀이 언제 다시 들어갈지 알 수 없어 섣불리 예측하기 어렵다는 의견들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