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제활동
수마가 쓸고 간 양덕, 수해 복구 한창
수마가 쓸고 간 양덕, 수해 복구 한창
인민무력성 산하 공병국이 동원되어 9월 12일부터 고원-양덕 사이 철도가 임시대책으로 개통되었다. 임시대책이다 보니 하루 세 대의 열차가 서행으로 겨우 통과되고 있다. 그러나 완전히 복구되기까지 시일이 얼마나 걸릴지는 알 수 없다. 양덕 읍내 거리 곳곳에도 복구 작업이 한창이다. 복구 작업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물이 빠져 나간 후 읍내의 참상이 너무 끔찍했다고 전한다. 아름드리나무들은 뿌리 채 뽑히고, 쓰러져 있는 나뭇가지마다 죽은 사람의 시체가 걸려 있었다. 팔 다리가 잘려나갔거나 목이 없는 시체가 즐비하고, 땅을 파면 삽이나 곡괭이에 시체가 수시로 걸려 나올 정도였다. 집들은 아파트 몇 채를 제외하고는 멀쩡한 것이 없고, 아파트조차 허리 부분이 동강나 무너진 것이 태반이었다. 아예 흔적도 없이 사라진 단층집들이 많아 현재 단층집이 있던 자리에는 널찍한 신작로가 들어서고 있다. 산으로 피신해갔던 사람들은 물이 빠지고 난 뒤 자신의 집 자리를 찾아와 천막을 치고, 잃어버린 가족이 혹여 살아 돌아올까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다. 다행히 식량과 의약품은 직승기(헬리콥터)로 운반되어 배분되었다.
사람이 죽는 것을 보면서도 아무도 나서지 못했소
사람이 죽는 것을 보면서도 아무도 나서지 못했소
“
“두 달 만에 여기 와보니 수해 때 모습이 거의 없어졌구만. 마사진(부서진) 아파트만 아니면 처음 오는 사람은 몰라보겠소. 일이 안 될 때라 내가 도착한 날 봉변을 당했댔소. 7월 14일날 왔다가 저녁에 술을 먹고 려관(여관)에서 잠들었댔소. 밤중에 려관 관리원이 문을 두드리며 대피하라고 해서 문을 열어보니 비가 바게쓰로 붓는 것처럼 쏟아졌소. 나와 보니 어디가 어딘지 분간할 수 없었소. 할 수 없이 아파트에 올라갔소. 거기엔 숱한 사람들이 있었는데 물이 2층까지 올라왔소. 사람 살리라고 고함치는 소리가 사람이 죽는 것을 보면서도 아무도 나서지 못했소”
지난 7월 15일 수해 참상에 대한 충격이 주민들의 머릿속에 여전히 생생하게 살아있다. 함흥의 한 주민은 지난 수해 이후 두 달 만에 양덕을 방문해 빠른 속도로 복구되는 모습을 보고 놀라워했다. 업무 출장으로 비교적 자주 양덕에 방문한다는 그는 지난 7월 15일 수해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전했다.
여기저기서 들려오고 단층집 꼭대기까지 올라갔던 가족들인지 집이 무너지니 소리 한번 못치고 없어지더구만. 내가 올라갔던 아파트 옆의 아파트도 사람들이 많았는데 그게 글쎄 무너지면서 숱한 사람들이 물에 떠내려갔소. 사람이 죽는 것을 보면서도 누구도 나서지 못했소. 그저 양덕 사람들은 죽는 사람을 보면서도 누가 죽는구나, 누가 죽는구나 하면서 우리 아파트가 언제 무너지겠는지 걱정만 했소. 낮에 물이 빠진 다음에 내려와 보니 단층집들이 거의 없어지고 아파트도 무너지고 기울어지고 형편없었는데 넘어진 나무 주변과 남아있는 집터 주변엔 시체가 가득했소. 정말 그런 일을 두 번 다시 보면 숨이 질것 같소.”
9월 24일 양덕군의 한 여성은 수해 당일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밤에 비가 오기 시작하자 대피하라는 통보를 받았다. 비가 점점 세게 오기 시작하자 12시가 지나서부터는 바게쓰로 붓는 것처럼 왔다. 갑자기 마을 쪽에 물이 쏠리기 시작하는 바람에 우리 집 식구들은 다 산으로 올라갔다. 가족들이 서로 찾고 부르는 소리, 빗소리까지 온통 난리였다. 산에 올라올 때 보니 산기슭에 있는 집 마당에도 물이 차기 시작했다. 다음 날 아침에 비가 멎으니 물은 인차 빠지기 시작했다. 점심시간이 다 될 때쯤 마을로 내려오며 보니 우리 인민반 집들이 거의 20채가 마사지고, 무너진 것은 형체만 남았다. 우리 집도 집안 물건들이 다 떠내려가고 물에 잠겨 못 쓰게 되었다. 7세대 27명은 지금까지도 소식을 모르고, 우리 인민반에서만도 32명이 죽었다. 가족이 없거나 죽은 사람들은 대부분이 우물쭈물하다가 물이 갑자기 들이닥치는 바람에 피하지 못한 것 같다. 나뭇가지나 집이 무너진 데서는 거의 시체들이 나왔다. 복구하려고 집터나 강기슭을 파다가 사람 시체를 삽이나 곡괭이로 찍을 때도 많았다. 우리 양덕은 완전히 폐허나 마찬가지였다. 지금 이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니다.”
한편 양덕부터 내려온 대동강 물에는 셀 수 없을 정도의 많은 시체가 떠내려갔고, 땅에 매몰된 사람도 수없이 많다. 양덕지방의 갱도들에서도 전투준비상태로 갱도생활을 하던 군인들 수백 명이 갱도에 물이 차 한꺼번에 수장되기도 했다.
수재민 굶주림에 사망
지난 8월 중순 강원도 일부 수해지역에서 130여명의 수재민이 갱도 안에서 굶어죽는 사건이 발생한 후 북한정부는 최고지도부의 명령으로 수해지역에 최우선적으로 식량을 공급하도록 지시했다. 그래서 지금은 오히려 수해지역에서 식량가격이 가장 낮게 거래된다.
수해 복구에 여념이 없는 평성시
수해 복구에 여념이 없는 평성시
평성시는 수해복구를 위해 많은 노동력과 자재 및 자금을 수해피해 지역에 투입했다. 이번 수해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곳이 평안남도 지역에 집중되어 있어 국가적 지원과 함께 한국 및 국제기구 지원은 물론이고, 평안남도 자체에서도 지대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수해 피해가 가장 심했던 신양군과 양덕군에는 한국을 비롯한 국제기구의 지원 및 중앙 차원의 지원이 들어갔고, 그 이외의 다른 지역들은 평안남도 자체적으로 복구 노력을 기울였다. 특히 수해복구를 위해 평성시는 대학, 전문학교 학생들, 공장 기업소들을 동원해 철도와 도로를 복구하고 살림집들을 건설하고 있다. 평성시 주민들은 각종 수해지원과 복구 노력 동원으로 정신이 없다.
이 와중에도 도적패들은 잘 사는 집이나 못 사는 집을 가리지 않고 TV나 녹화기, 자전거 등을 훔쳐 함흥이나 남포, 원산 쪽의 도적 패에 넘기고 있다. 꽃제비들은 역과 시장을 돌며 구걸하며 살고, 이혼한 집의 아이들은 버림을 받거나 집을 나와 꽃제비 무리에 합류하기도 한다. 이러한 악습들이 많아지자 당국에서도 이혼하면서 자녀를 버리거나 부모를 잘 모시지 않는 현상을 막고, 영예군인들을 잘 도와줄 것에 관한 강연제강을 내려 보냈다. (41호)
요덕 수해복구에 한창인 함흥
함흥은 요덕군을 제외하고는 수해 피해를 많이 입지 않았으나, 요덕군은 구읍리 지역이 심한 피해를 입고 정치범 수용소인 제15호 관리소도 많은 손실을 입었다. 또 수해 피해로 온 가족이 없어지거나 행처를 파악하지 못한 사례가 수십 세대에 이른다. 구읍리는 교통이 불편하고 역에서도 거의 100리 이상 들어간 산골 마을로 가난한 지역이다. 함경남도에서는 이 지역에 살림집을 새로 건설하고 식량과 의약품을 지원하고 있다. 함흥시를 필두로 각 군들에서 집중적으로 요덕군의 수해복구에 식량과 자금, 자재를 지원한 결과, 9월 들어서부터 병들거나 굶어죽는 수재민들이 현저히 줄어들었다. 다만 아직까지 살림집 건설이 진행 중이라 수재민들이 추운 비닐 박막, 갱도 등 임시 대피소에서 고생하고 있다. (41호)
가을철 맞아 농작물 도난 사건 늘어
가을철 맞아 농작물 도난 사건 늘어
가을철이 되면서 농작물 도난사건이 많이 나타나고 있다. 당에서는 가을철 농작물 누수를 막기 위해 ‘농작물에 손대는 현상을 없애고 엄중성에 따라 법적 처벌까지 적용할 데 대한’ 지시를 내렸으나, 주민들은 내년에 식량가격이 현재의 2배 이상 뛰어오를 것이라는 소문에 곡물 확보에 비상이 걸린 상태이다. 돈 있는 사람들은 돈으로 곡물을 사들이면 되지만, 돈 없는 사람들로선 목숨 걸고 훔치는 방법 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실제 큰 도적은 권력계층에 많다. 이른바 농장의 책임일꾼들 중에 큰 도적이 많은데, 농장의 관리위원장, 작업반장, 분조장 등 자신의 직위를 조금이라도 이용할 수 있는 사람들은 예비양곡을 조성하고, 여러 방법으로 빼돌리기 바쁘다. 이들은 토지 면적을 정확히 보고하지 않고, 국가계획에 맞추는 범위에서 토지 보고를 한다. 또 새로 개간했거나 개인들에게 준 밭은 보고 내용에서 아예 제외한다. 보고에 올라가지 않은 토지에서 나오는 농작물로 종자, 비료, 농약, 농기구를 구입한다는 명목으로 개인이 가져간다. 농장 담당 보안원이나 보위원, 군당 부원이나 관리일꾼들은 옥수수와 벼를 1:1로 바꾸어 개인이 갖는다.
반면 아무런 힘이 없는 농민들이나 돈 없는 사람들은 한밤중에 옥수수를 따가거나 감자를 훔친다. 옥수수나 벼를 훔치다 잡히면 노동단련대, 심지어 교화소에까지 갈 수 있지만,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을 바에는 훔쳐서라도 살아 보겠다”는 것이 주민들의 한결같은 견해이다. 농작물을 남몰래 훔쳐서 저장하거나 팔면 그래도 살길이 생기기 때문에, 한 번 잘 못 걸리면 죽을 각오까지 해야 함에도 농작물 도난사건은 줄어들지 않는다. 한편 전국적으로 9월 20일 전후로 가을 전투가 시작되고 학생, 노동자, 사무원, 주부들까지 또 다시 농촌에 동원된다. 그런데 봄철 파종과 달리 각 농장들에서는 동원되는 지원자들을 많이 받으려고 하지 않는다. 이는 사람이 많이 오면 올수록 농작물이 그만큼 많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40호)
아이를 빈 집에 혼자 두고 일 다니는 부모들
평안남도 개천군의 한 젊은 농장원은 아내와 올해 네 살난 아이를 두고 있다. 이곳은 옥수수 농사가 잘 되는 곳이지만, 한 해 농사로 비료 값, 농기구와 농자재 값 등을 주고 나면 세 식구 먹을 식량도 빠듯하다. 아이를 탁아소에 보낼 형편이 안 돼서 일하러 나갈 때는 아이를 빈 집에 혼자 가두고 나간다. 탁아소에 맡기려면 아이가 먹을 입쌀을 내야 하는데, 옥수수로 낸다고 해도 자기들은 굶어 지낼 형편이라 그렇게 하지 못한다.
부모가 가버리고 나면 아이는 간식도 없이 빈방에서 홀로 울다가 잠들고, 대소변을 가리지 못해 집안 곳곳이 아이의 배설물로 난장판이 되어버린다. 일하러 나간 부모들도 집에 혼자 있을 아이 생각에 일손이 잡히지 않지만, 일을 하지 않으면 당장 굶을 판이니 어찌할 도리가 없다면서 울며 한탄할 뿐이다. 비단 이들 뿐만 아니라 개천군의 젊은 부부들의 집안 사정이 대개 비슷하다. (40호)
가정불화와 이혼율 늘어
가정불화와 이혼율 늘어
이혼하는 부부가 늘어나면서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고 있다. 해주시에 사는 한 여성은 남편이 돈 많은 여성과 함께 장사를 다니면서 불륜에 빠졌다며 이혼하겠다고 친정집에 알려와 그 부모형제가 근심에 빠졌다. 이른바 ‘8․3부부관계’ 때문에 기존의 부부관계가 흔들리고 있는 사례이다. ‘8․3 부부’란 8․3 노동자들이 기업소에 적을 두고 개인 장사를 다니면서 이성간에 부부처럼 지내는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다. 청진시에서도 이처럼 배우자가 이성과 함께 동업 형식으로 다른 지방에 장사를 다니다가 자연스럽게 부부생활로 발전하게 되어 기존 결혼생활을 정리하는 경우가 많다. 청진시에서 이렇게 이혼하는 비율이 무려 15%에 달한다고 한다.
남편이 돈을 벌어오기는커녕 집에서 술만 마시고, 술 사오라 행패를 부리는 통에 더 이상 살기 힘들다며 이혼하겠다고 집을 나오는 여성들이 늘고 있다. 함께 장사를 다니면서 강도로부터 지켜줄 수 있고, 무거운 짐도 같이 들어주는 연하의 남성들과 어느 정도 안정적으로 경제력을 갖춘 연상의 여성들이 굳이 결혼이라는 형식을 빌지 않고서도 부부관계로 지내는 비율이 높아가는 추세이다. 재판소나 법 기관 등에서는 이혼을 강력히 통제하고 있어 그동안 이혼하기가 어려웠으나, 이제는 돈만 있으면 뇌물을 주고 이혼하는 것이 쉬워졌다.
아직 결혼을 하지 않은 여성들도 굳이 빨리 결혼 상대자를 구하려고 하지 않는다. 가정이 있는 남자라 하더라도 자기를 먹여 살릴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괜찮다고 생각한다. 옛날에는 이런 게 모두 자본주의 생활 방식이라며 욕도 하고 투쟁도 했지만, 이제 누구도 먹여 살려주지 않기 때문에 이런 생각을 가졌다고 해서 무조건 그 사람을 비난하지 못하게 되었다. 전국 어디서나 돈 문제로 심하게 다투는 부부들을 쉽게 볼 수 있을 정도로, 이제 경제력이 가정의 화목을 지키는데 중요한 요소가 되어버렸다. 길거리에서 큰소리로 치고받고 싸우는 부부들을 바라보는 주민들 사이에서 “이러다 가정이라는 게 아예 없어지는 게 아닐까?”라는 우려의 소리를 쉽게 들을 수 있다. (40호)
현대판 심청이 신세가 된 북한의 젊은 여성들
중국에 가는 여성들이 줄어들 기미를 보이지 않고, 오히려 꾸준히 늘어나는 추세이다. 청진시에 사는 25세의 한 여성은 집안을 살리기 위해서라며 중국에 가는 방법을 물색하고 있었다. 중국에 가서 돈을 벌어 부모에게 전달해주고 싶다는 것이었다. 배천에 사는 20세 여성은 국경연선에 사는 친척을 방문하러가는 사람에게 “국경에 가면 중국에 갈수 있습니까? 소문을 들으니 중국에 가면 우리 같은 여자들을 집안도 도와주고 잘 산다고 하는데 이제 가면 보내줄 수 있습니까? 여기서는 아무리 살자고 애써도 앞이 보이지 않습니다. 이제 우리 할머니와 함께 찾아가면 꼭 도와주십시오”라고 간절하게 부탁하기도 했다. 함흥시의 27세 여성은 그동안 아버지 수입으로 괜찮게 살다가 남동생이 마약거래를 한 통에 빚을 잔뜩 지게 되자, 빚 독촉에 고초가 심한 부모님을 구하기 위해 자기를 중국에 팔아 달라고 부탁했다.
여성들이 어떤 경로를 통해서든 꾸준히 국경을 빠져나가는 바람에 결혼적령기에 접어든 남성들의 한탄이 이어지고 있다. 김책시에서도 중국에 가는 여성들이 많아지자, 배를 타는 한 남성은 술좌석에서 친구에게 “이제 몇 년 만 지나면 조선 남자들이 장가가기 힘들 거다, 여자들은 다 중국에 달아나고 남자들만 살아야 할 거야. 너도 늦기 전에 돈 많이 벌어가지고 장가를 들라. 이제 장가들어도 살기 힘들면 여자가 달아나지 않는다고 어떻게 장담하겠니?”라고 했다. (40호)
두 집 살림하는 탈북 여성들
두 집 살림하는 탈북 여성들
요즘 탈북 현상에서 두드러진 특징은 바로 탈북 여성들의 두 집 살림살이다. 어떤 여성들은 2-3개월은 중국에서 중국 남편과, 1-2개월은 북한에서 북한 남편과 지내며 양국을 오고간다. 양쪽 남편들은 이 사실을 알면서 묵과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중국 쪽은 화룡과 룡정의 농촌 지역에 이런 가정이 집중되어 있다. 중국에 돈 벌러 왔던 여성들이 중국 남편을 만나 자녀를 1-2명 낳아 기르게 되면서 북한으로 다시 나가지 못하는 여성들이 있지만, 대개 생활형편이 어려워 중국 남편과 2-3개월 지내면서 2-3천 위안을 벌어 북한의 가족에게 돌아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경우도 많다.
북한에 있는 어떤 남편들은 자신의 아내가 중국에서 가정을 이루고 살고 있어 오빠로 가장하고, 몇 개월에 한 번씩 아내를 찾아가 도움을 받기도 한다. 중국 남편은 그 사람이 전 남편인지도 모르고, 올 때마다 처남이 왔다고 물건이나 돈을 쥐어 주곤 한다. 현재 국경주변의 부모들은 딸들을 중국에 시집보내려고 중매를 찾는 현상이 늘어나고 있다. 가족이 직접 나서서 성매매를 주선하기도 한다. (40호)
회령시장 화재로 4,000여만 원 이상 재산손실
지난 8월 26일 회령시장 안에 있는 손 짐 보관 창고에 불이 나서 그 옆의 시장식당과 수매상점이 모두 불에 타고 벽체만 남았다. 이날 오후 1시 30분~2시 사이에 일어난 불로 창고에 있던 장사 물건과 수매상점에 있던 상품 4,000여만 원 정도가 불에 타버렸다. 손짐 보관 창고에 짐을 맡겨놓았던 사람들과 수매상점에 상품을 맡겨두었던 많은 사람들이 최소 10만 원에서 100만 원 이상의 손해를 보고 충격을 받았다. 국가에서 배상금을 줄 수도 없고 손짐 보관창고나 수매상점책임자가 변상할 수도 없을 만큼 엄청난 손실이었다. 이 화재로 8월 30일까지 화재복구를 하느라 잠시 시장 운영이 중단되었다. 화재의 원인은 손짐 보관창고에 넣어둔 짐 속에서 도색제를 푸는 시너 담은 병이 깨지면서 부딪쳐 불이 난 것으로 보고 있다. (40호)
■ 시선집중
수마가 쓸고 간 양덕, 수해 복구 한창-2006년 10월
수마가 쓸고 간 양덕, 수해 복구 한창
인민무력성 산하 공병국이 동원되어 9월 12일부터 고원-양덕 사이 철도가 임시대책으로 개통되었다. 임시대책이다 보니 하루 세 대의 열차가 서행으로 겨우 통과되고 있다. 그러나 완전히 복구되기까지 시일이 얼마나 걸릴지는 알 수 없다. 양덕 읍내 거리 곳곳에도 복구 작업이 한창이다. 복구 작업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물이 빠져 나간 후 읍내의 참상이 너무 끔찍했다고 전한다. 아름드리나무들은 뿌리 채 뽑히고, 쓰러져 있는 나뭇가지마다 죽은 사람의 시체가 걸려 있었다. 팔 다리가 잘려나갔거나 목이 없는 시체가 즐비하고, 땅을 파면 삽이나 곡괭이에 시체가 수시로 걸려 나올 정도였다. 집들은 아파트 몇 채를 제외하고는 멀쩡한 것이 없고, 아파트조차 허리 부분이 동강나 무너진 것이 태반이었다. 아예 흔적도 없이 사라진 단층집들이 많아 현재 단층집이 있던 자리에는 널찍한 신작로가 들어서고 있다. 산으로 피신해갔던 사람들은 물이 빠지고 난 뒤 자신의 집 자리를 찾아와 천막을 치고, 잃어버린 가족이 혹여 살아 돌아올까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다. 다행히 식량과 의약품은 직승기(헬리콥터)로 운반되어 배분되었다.
사람이 죽는 것을 보면서도 아무도 나서지 못했소-2006년 10월
사람이 죽는 것을 보면서도 아무도 나서지 못했소”
지난 7월 15일 수해 참상에 대한 충격이 주민들의 머릿속에 여전히 생생하게 살아있다. 함흥의 한 주민은 지난 수해 이후 두 달 만에 양덕을 방문해 빠른 속도로 복구되는 모습을 보고 놀라워했다. 업무 출장으로 비교적 자주 양덕에 방문한다는 그는 지난 7월 15일 수해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전했다.
“두 달 만에 여기 와보니 수해 때 모습이 거의 없어졌구만. 마사진(부서진) 아파트만 아니면 처음 오는 사람은 몰라보겠소. 일이 안 될 때라 내가 도착한 날 봉변을 당했댔소. 7월 14일날 왔다가 저녁에 술을 먹고 려관(여관)에서 잠들었댔소. 밤중에 려관 관리원이 문을 두드리며 대피하라고 해서 문을 열어보니 비가 바게쓰로 붓는 것처럼 쏟아졌소. 나와 보니 어디가 어딘지 분간할 수 없었소. 할 수 없이 아파트에 올라갔소. 거기엔 숱한 사람들이 있었는데 물이 2층까지 올라왔소. 사람 살리라고 고함치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오고 단층집 꼭대기까지 올라갔던 가족들인지 집이 무너지니 소리 한번 못치고 없어지더구만. 내가 올라갔던 아파트 옆의 아파트도 사람들이 많았는데 그게 글쎄 무너지면서 숱한 사람들이 물에 떠내려갔소. 사람이 죽는 것을 보면서도 누구도 나서지 못했소. 그저 양덕 사람들은 죽는 사람을 보면서도 누가 죽는구나, 누가 죽는구나 하면서 우리 아파트가 언제 무너지겠는지 걱정만 했소. 낮에 물이 빠진 다음에 내려와 보니 단층집들이 거의 없어지고 아파트도 무너지고 기울어지고 형편없었는데 넘어진 나무 주변과 남아있는 집터 주변엔 시체가 가득했소. 정말 그런 일을 두 번 다시 보면 숨이 질것 같소.”
9월 24일 양덕군의 한 여성은 수해 당일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밤에 비가 오기 시작하자 대피하라는 통보를 받았다. 비가 점점 세게 오기 시작하자 12시가 지나서부터는 바게쓰로 붓는 것처럼 왔다. 갑자기 마을 쪽에 물이 쏠리기 시작하는 바람에 우리 집 식구들은 다 산으로 올라갔다. 가족들이 서로 찾고 부르는 소리, 빗소리까지 온통 난리였다. 산에 올라올 때 보니 산기슭에 있는 집 마당에도 물이 차기 시작했다. 다음 날 아침에 비가 멎으니 물은 인차 빠지기 시작했다. 점심시간이 다 될 때쯤 마을로 내려오며 보니 우리 인민반 집들이 거의 20채가 마사지고, 무너진 것은 형체만 남았다. 우리 집도 집안 물건들이 다 떠내려가고 물에 잠겨 못 쓰게 되었다. 7세대 27명은 지금까지도 소식을 모르고, 우리 인민반에서만도 32명이 죽었다. 가족이 없거나 죽은 사람들은 대부분이 우물쭈물하다가 물이 갑자기 들이닥치는 바람에 피하지 못한 것 같다. 나뭇가지나 집이 무너진 데서는 거의 시체들이 나왔다. 복구하려고 집터나 강기슭을 파다가 사람 시체를 삽이나 곡괭이로 찍을 때도 많았다. 우리 양덕은 완전히 폐허나 마찬가지였다. 지금 이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니다.”
한편 양덕부터 내려온 대동강 물에는 셀 수 없을 정도의 많은 시체가 떠내려갔고, 땅에 매몰된 사람도 수없이 많다. 양덕지방의 갱도들에서도 전투준비상태로 갱도생활을 하던 군인들 수백 명이 갱도에 물이 차 한꺼번에 수장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