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선집중
교통사고로 생계 막막
함경남도 단천시 금봉동에 사는 한석중(40대)씨는 2005년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홀어머니와 장가 못 간 남동생을 데려와 일곱 식구의 가장이 되었다. 2007년부터 식량 사정이 나빠지면서 대가족을 먹여 살리기가 날로 곤란해졌다. 그는 아내와 함께 어촌을 돌아다니며 낙지(오징어), 명태, 생복, 해삼 등을 넘겨받아 신의주, 혜산 등지로 장거리 장사를 다녔다. 그러다 작년 여름에 평성에 다녀오다가 그만 자동차 사고를 당해 심하게 다치고 말았다. 한씨는 사고로 두 다리를 잃고, 그 아내는 발목과 손목을 한쪽씩 잃었다. 가족을 먹여 살리던 두 사람이 운신을 못하게 되자, 어머니는 충격으로 심장마비에 걸려 그만 세상을 뜨고 말았다. 장가 못 간 동생은 어린 조카들을 살려보겠다고 집을 나갔다. 12살, 15살 딸아이들이 어머니, 아버지를 대신해 먹을 것을 구하러 다녔다. 딸들은 10리 넘게 걸어가 나무를 해왔다. 고갯길에서 숱하게 넘어지면서도 등짐을 져다 시장에 나가 팔았다. 또 산과 들에 나가 풀뿌리와 나물을 캐 나물죽을 끓여 부모님을 봉양했다. 한씨와 그 아내는 어린 딸들이 고생하는 것을 지켜보면서도 어떻게 도와줄 수 없어 대단히 안타까워했다. 한씨는 딸들에게 “너희는 절대로 차타고 다니면서 장사하지 말라. 차 사고로 죽는 사람, 나처럼 불구되는 사람이 얼마나 많으냐”며 당부하고 또 당부했다. 그러다 한씨가 먼저 세상을 떠났고, 이듬해인 올해 1월 6일, 아내도 남편 뒤를 따랐다. 두 딸아이는 결국 고아가 돼 의지할 곳이 없어졌다.
어린 자녀 봉양에 눈물만 흘리던 모정
함경남도 단천시 금봉동에 사는 서길림(30대)씨는 전신을 움직이지 못하는 남편과 어린 두 자녀의 생계를 책임져왔다. 남편은 일찍이 고난의 행군 시절 병을 얻었는데, 13년 동안 대소변을 받아내며 가정을 꾸려왔다. 그러다 작년 초봄부터 먹을 것이 떨어져 사는 게 더 힘들어졌다. 남편 약 값에 아이들 학교 보내랴, 풀죽이라도 매일 끊이지 않도록 끼니 마련하랴, 혼자 온갖 고생을 다했다. 남의 물건을 넘겨주는 일을 하며 돈을 얼마씩 벌었으나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아, 시간 날 때마다 산나물과 풀뿌리를 캐다 끼니를 만들었다. 설령 서씨 자신은 굶더라도 아이들과 남편 입에 뭐라도 꼭 넣어주려고 애썼다. 그러다보니 춘궁기를 간신히 넘기는가 싶더니, 그만 서씨가 먼저 쓰러지고 말았다. 유일하게 생계벌이를 하던 어머니가 쓰러지자, 이제 막 10살이 넘은 두 아이가 어머니, 아버지 병간호를 한다고 그릇을 들고 먹을 것을 빌러 다니기 시작했다. 자기네는 굶으면서 부지런히 이집, 저집 돌아다니며 먹을 것을 구했다.
서씨는 꼼짝 못하고 누워있는 스스로를 책망하며, 아이들이 구해온 음식을 차마 먹지 못하고 눈물로 하루하루를 보낼 때가 많았다. 13년 넘게 가족들에게 아무 도움을 주지 못했던 아버지도 “내가 죽어야지, 내가 죽어야지”라는 말만 하다가 결국 세상을 뜨고 말았다. 남편을 잃은 상심에 빠져있던 서씨는 아이들을 생각해 애써 몸을 추스렸다. 아이들에게 더는 부담을 주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지팡이를 짚고 일어나 미역이나 곤포 등이라도 주우려고 바닷가에 나갔다. 기력이 워낙 쇠약해져있는 상태에서 파도가 밀려드니 그만 바다에 빠져 목숨을 잃고 말았다. 졸지에 어머니마저 잃고 고아가 된 어린 남매가 어찌나 서럽게 우는지, 차마 보기 힘들 정도였다. 아이들은 이때부터 떠돌이가 되어 방랑생활을 시작했다.
가족들 하나, 둘 세상 떠나고 정신이상 증세
함경남도 단천에 사는 류성희(17세)양은 어머니, 아버지, 그리고 두 여동생과 함께 어렵게 살아왔다. 아버지가 단천 마그네슘크링카공장 노동자이지만 ‘먹을 나날’은 별로 없었다. 어머니는 원래 신경이 약해 평소에도 몸이 안 좋았는데, 끼니를 잘 챙겨먹지 못하다보니 점점 신경증세가 악화됐다. 하루에 많이 먹으면 두 끼, 아니면 한 끼 먹는 게 예삿일이 되면서 아버지가 먼저 쓰러지고 말았다. 어머니는 신경쇠약으로 고생하다가 작년 6월 달에 물에 빠져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막내 여동생은 몸이 퉁퉁 붓는 병이 걸렸는데 약 살 돈이 없어 병원에 가보지도 못했다. 성희와 둘째 동생 정희(15세)양은 다니던 학교를 그만두고 부지런히 먹을 것을 구하러 다녔다. 뭐라도 먹을 게 생기면 아버지와 막내 동생에게 갖다 먹이느라, 정작 자신들은 얼마 먹지 못해 날마다 뼈만 앙상하게 남을 정도로 몸이 약해졌다. 작년 가을에 아버지와 막내 동생이 차례로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를 떠나보내고, 아버지와 막내 동생마저 세상을 떠나자 남은 두 자매는 서럽게 울면서 보냈다. 주위에서 차마 말리기 어려울 정도로 서럽게 울더니 아이들이 정신 이상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이유 없이 괜히 헤죽헤죽 웃고 다니는 자매의 모습에 주민들은 애들이 미친 게 아닌 가 의심하고 있다.
생계벌이하던 아내 죽자 가족들 꽃제비 전락
함경남도 홍원군에 사는 강정길(40대)씨는 작년 춘궁기 전만 해도 공장에 다니고 있었다. 배급과 노임이 안 나왔어도 결근을 하지는 않았다. 두 자녀와 홀어머니까지 5식구를 부양하는 것은 아내의 몫이었다. 춘궁기가 되자 하루하루 죽도 제대로 못 먹을 정도로 힘든 나날이 계속됐다. 칠순이 넘은 어머니는 오랫동안 굶주림에 지쳐 몸져눕고 말았다. 급기야 풀죽이라도 쒀보려고 산에 나물을 뜯으러 갔던 아내가 굴러 떨어져 운신을 못하게 됐다. 잡화장사를 하면서 간간이 풀과 나물을 뜯어 끼니를 마련해주던 아내가 움직이지 못하자, 가족들은 당장 타격을 받았다. 어머니가 먼저 여름을 못 넘기고 돌아가셨다. 강씨가 아내 대신 남은 식구들을 살려보겠다고, 산에 가서 나무를 해다 팔기도 하고, 어촌에 나가 고기를 잡아 팔기도 하는 등 온갖 애를 다 썼지만 형편이 좋아지지 않았다. 아직 철없는 아이들은 밥 달라고 조르고, 집안 살림살이는 어지럽기만 했다. 날마다 몸이 쇠약해지던 아내는 작년 겨울 초입이 되자 그만 숨을 놓았다. 강씨는 4살, 6살 두 딸아이를 데리고 방랑 생활을 시작했다.
“작년에 죽은 집마다 눈물겨운 쓰라린 이야기가 하늘을 찌를 지경”
지난해 춘궁기 시기, 황해남북도와 함경남도, 평안남도, 강원도와 자강도 일부 지대의 식량난이 매우 심각했다. 평양, 회령, 라선, 혜산, 강계 등지는 그나마 식량 사정이 나은 편에 속했다. 예년 같으면 황해남북도의 경우 군량미를 바치고, 해당 지역에 필요한 식량을 확보하고도 식량이 남으면 다른 지역에도 보낼 정도로 대표적인 벌방지대였다. 그런데 2년 연속 큰물피해를 입으면서 생산량이 급감했다. 이 지역에서 시작된 식량난은 곧 전국적인 식량난을 초래했다. 국경연선지역은 그나마 중국과의 밀무역 등으로 생활이 나은 편이었으나, 함경남도 함흥시, 신포시, 고원군, 홍원군, 리원군 등지와 함경북도 김책시, 길주군 등은 식량난이 날로 심화되고 있다. 인구에 비해 인근 알곡 생산량이 적어 식량 사정이 더 나쁜 편이다. 작년에는 많은 사람들이 굶주림에 지쳐 병들어 쓰러지고 목숨을 잃었다. 주민들은 “죽은 집들마다 눈물겨운 쓰라린 이야기가 하늘을 찌를 지경이다. 하늘이 있다면 지구상에서 조선인을 싹 굶겨죽이려는 것이 아닌가 생각될 정도”라고 말하며, 가슴 아픈 일이 너무 많다고 했다.
■ 식량소식
김책제철소 용해직장만 2월 식량 분배
함경북도 청진시 김책제철소는 그동안 배급을 하지 못하다가 용해직장만 지난달에 식량을 분배했다. 통옥수수 14kg를 상․하순 한 달 분량으로 주었다. 용해직장 이외의 다른 직장들은 지금껏 배급을 하지 못했다. 김책제철소가 2월 생산해야할 과업 중에는 일반 강재를 제외하고 특수강을 200톤 하는 과업이 가장 중요했다. 그런데 노동자들은 배급이 없어 도저히 일하기 힘들다며 결근자가 속출하고 있다. 새해 들어 결근자가 많아지자, 생산에도 크게 차질이 빚어지고 있다. 김책제철소 후방부일꾼들이 배급을 조금이라도 주려고, 철을 수출하자는 제안서를 올렸는데 중앙당에서 부결됐다. 배급여건이 좀처럼 개선되지 않자, 노동자들의 생산성이 덩달아 떨어지고 있다.
청진 직하리농장 식량 6개월 분배
함경북도 청진시 청암구역 직하리농장에서는 작년 말, 11개월 분량의 식량을 분배했다. 이 때 군대 고기 지원을 비롯해 사회에서 제기된 과제들을 모두 제외하고 보니, 실제 분배량은 6개월에 불과했다. 일부에서는 3월초 현재 식량이 떨어져 벌써부터 고리대를 빌리는 세대가 늘고 있다. 가을에 2배로 갚기로 하고, 통옥수수를 빌려 먹는 집들은 대체로 가족 수가 많아 식량이 턱없이 부족한 집들이다.
■ 경제활동
리원군 침목공장, 풀뿌리 나물이 주식
함경남도 리원군 라흥침목공장도 다른 공장과 마찬가지로 노동자들의 생계가 매우 열악하다. 이 공장에서는 철도 궤도 밑에 까는 콘크리트 침목을 생산하지만, 배급이 나온 적이 없다. 공장 종업원 수는 약 2천여 명인데 이 중 90%가 풀뿌리 나물을 주식삼아 끼니를 때우고 있다. 예전만 해도 풀죽에 옥수수나 콩 등 알곡을 같이 끓여먹을 수 있었는데, 작년에는 그런 알곡마저 없었다. 이 공장에 다니는 조운철(40대)씨는 “어디 가서 알곡을 좀 변통하자고 해도, 어느 집이나 사정이 똑같으니 도와주거나 도움 받을 생각을 할 수가 없다. 작년에 죽은 사람이 많다. 병에 걸려 죽었다고는 하지만 실지 먹지 못해서 죽은 거다. 사람들이 배급 한 번 안 나온다고 얼마나 원망하는지 모른다”고 했다. 그의 아내도 “우리 세대주가 일을 안 하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일하러 나가는 사람, 매번 굶길 수도 없고. 배급 한 번 나와서 쌀 한 톨 먹여 (공장에) 보내는 게 소원”이라며 눈물을 글썽였다.
‘7월 6일 차량공장’, 차량부품 생산 저조
함경남도 리원군에 있는 ‘7월 6일 차량 공장’의 생산량이 저조하다. 기본적으로 차량부품을 생산하지만, 노동자들의 출근율이 떨어져 생산성도 그만큼 낮아지고 있다. 이 공장에는 약 7천 명의 노동자가 일하지만, 이들은 작년부터 한 번도 배급을 받아본 적이 없다고 말한다. 점심을 굶는 것은 이제 보통 일이다. 공장 배급을 기대하지 않고, 그저 자체적으로 벌어서 생활을 유지하고 있다고 했다. 주로 여성들이 풀뿌리와 산나물을 캐서 옥수수가루와 함께 죽을 끓여 식구들을 먹여 살린다. 작년에는 영양실조로 한두 명이 쓰러지기 시작하더니 이 공장에서 목숨을 잃은 사람만 수십 명이 넘었다.
단천제련소 환경오염에 주민들 아우성
함경남도 단천제련소의 환경오염 때문에 주민들의 아우성이 높다. 이 공장은 종업원 8천 명의 연, 아연, 동 생산업소인데, 굴뚝 연기가 독가스나 마찬가지다. 연기를 맡으면 기침을 심하게 하거나 눈물을 흘리게 된다. 오랫동안 피해를 입었던 주민들은 “나라에서 어째 대책을 세우지 못하는 가. 환경오염 검열이라도 나와서 료해하면 대책을 내야 할 게 아니냐”며 대책 마련을 촉구한다. 문제는 검열에 걸려도 벌금을 내면 그만이라 바뀌는 게 없다는 거다. 주민들은 벌금제로 하지 말고, 차라리 공장 지배인이나 당비서를 처벌하거나 로임을 자르는 등의 대책을 마련하라고 말한다. 심지어 공장을 폭파시켜 없애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주민들은 “공장 로동자들도 자기들이 생산한 물건을 훔쳐 팔아먹으면서 자기들 릿속만 채운다. 우리들한테는 아무 도움을 주지 않고 피해만 준다”고 말한다. 공장 인근에 사는 주민들 중에는 각종 질병으로 장기 환자가 된 사람들이 많지만, 별다른 대책이 없는 상태다.
“폭풍시간 되기 전에 장사해야”
신의주에는 3개의 시장이 있다. 신의주 주민들 중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모두 시장에서 물건을 구입한다. 그렇다고 시장 안에서만 물건을 사고파는 것은 아니다. 장마당 주변이나 마을 어귀에는 맨 땅에 물건을 펼쳐놓고 파는 사람들이 줄지어 앉아 있곤 한다. 이들이 주로 활동하는 시간은 정오 12시부터 오후 2시 정도이다. 간혹 단속이 없을 때가 있는데, 주민들은 이때를 ‘폭풍 시간 전’이라고 말한다. 골목길에서 장사하는 정윤금(40대)씨는 “폭풍 시간 전에 사람들이 물건을 하나라도 더 팔려고 기를 쓰고 나와 서로 밀치고 자리다툼하며 난리가 난다”고 말한다. 그러다 기동순찰대가 오토바이를 타고 나타나 사방에서 포위해 들어오면 “그야말로 눈 깜짝할 새 숱한 진이 허물어지듯이 싹 빠져나간다. 군대 기동대도 그 만한 속도는 못 낼 것”이라고 말했다. ‘폭풍 시간’이 되면, 요령 있는 사람들은 다짜고짜 인근 마을 창고나 단층집에 들어간다. 사전에 미리 짐 보관료를 지불하고, 단속원들이 뜨면 바로 그곳으로 피신하곤 한다.
장마당을 담당하는 기동순찰대는 “파리 쫓아내듯 장사꾼들을 몰아낸 뒤”에도 한동안 잠복한다. 한참 있다 눈치를 슬슬 보면서 다시 나타나는 장사꾼들의 물건을 가차 없이 회수해간다. 물건을 뺏긴 사람들은 보안서나 분주소 앞에서 밤늦게까지 버티고 서있거나, 아니면 담배 한 곽이라도 바치고 물건을 찾아간다.
골목 장사에 물건을 사러 나섰던 장만영(50대)씨는 지난 25일 있었던 일을 얘기했다.
“장마당은 멀지, 갑자기 손님이 와도 그래, 주변 상점은 일년 열두달 문 잠겨있지. 장마당 한 번 가려면 치마로 갈아입어야지. 반찬감 하나 사자고, 인산인해로 붐비는 곳에 들어가기 싫지. 그래, 할머니들이 남새철에 농장에서 직접 넘겨 받아와서 마을 근처에 앉아 팔면,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거지. 할머니들이 그렇게라도 용돈을 벌어야 젊은 애들과 손자 애들이 좋아하지 않겠는가?
바로 오늘 오전 담당보안원이 오토바이를 타고 한 바퀴 돌며 다들 들어가라고 소리소리 지르지 않았겠어? 아무리 들어가라고 해도 누구 하나 까딱 하지 않았지. 다른 지구까지 다 돌고 올 동안에도 안 움직이니까 오토바이에서 내리더니만 가까운데 있는 지함을 막 걷어차지 않았겠어. 다른 할머니들은 멀리서 오토바이 오는 걸 보고는 슬금슬금 내뺐는데, 완전히 귀가 먹은 여든 살 넘은 할머니가 그만 걸리고 말았지. 영하에 북풍이 불어 꽤나 추웠지. 앉아서 꽁꽁 얼은 할머니가 제대로 일어서지 못하다가 그만 보안원에게 대들었지.
‘나보고 장사하지 말라면 굶어죽으라는 거냐?’
‘장마당을 나가란 말이야. 여기 앉아 파는 건 비사회주의란 말이야’
‘먹고 살기 위해 하는 짓이 비사현상이면, 대체 어떤 것이 사회주의란 말이야?’
서로 거친 말이 오가면서 실랑이가 벌어졌지.
할머니가 지지 않으려고 하니까, 보안원이 잔뜩 성이 났지.
‘당장 인민반장 나오라~ 인민반장 어딨네?’라고 고함치는데, 어쩌지?
바로 인민반장네 시어머니란다.
인민반장이 부리나케 달려 나와 보안원에게 싹싹 빌었지.
‘그만큼 나가지 말라고 설복해도 막무가내여서 내버려두었습네다.’
사실 담당 보안원들은 인민반장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지. 인민반의 사소한 모든 일을 인민반장이 보고해주니까. 인민반장도 사정사정하고, 또 하도 80 고령이라 문제가 더 커지지는 않았어. 할머니는 노여움이 안 풀렸는지 반발심으로 또 나가 앉더라고. 폭풍시간에 이런 일은 흔하게 볼 수 있어”
■ 정치생활
강선무역회사, 대금을 쌀로 받지 않아 처벌
량강도 강선 무역회사가 대금을 쌀로 받으라는 무역국 지시를 어겨 처벌됐다. 무역국에서는 물품을 수출하면 반드시 알곡으로 대금을 결재하라고 지시한 바 있다. 그런데 강선무역회사가 중국 회사로부터 쌀을 받지 않고 다른 공업품으로 받았는데, 이는 쌀보다 공업품류가 더 이윤이 많이 남기 때문이다. 무역국 지시를 어긴 죄로 강선회사 무역일꾼들이 일부 해임되거나 당 책벌을 받았다.
신장 168cm 이상 남학생, 의장대로 양성
인민무력부에서는 올해부터 중학교 졸업생 중에서 168cm 이상의 건강한 학생들은 무조건 입대시켜 의장대 성원으로 양성하라는 지침을 내렸다. 또 각 지방의 군사학교를 졸업한 학생들은 1년간 하사생활을 하다가 군복무 2년차가 되면 군관학교에 입학시키라고 했다. 군사학교에 입학하면 2년 동안 병종에 대한 일반 군사 기초 교육을 실시한 뒤 지휘관 자질을 습득토록 하기로 했다. 한 무력부 성원은 “훌륭한 지휘관으로 양성시켜 그들이 부대에서 막힘없이 부대 관리를 잘 할 수 있게 하는 것이 현 선군 정치의 기본”이라고 말했다.
■ 사회
60대 할머니, 손달구지 단속당해 울분 토로
한정금(60대 여성)씨는 평안북도 신의주에서 손 달구지를 끌며 살아왔다. 남편은 사회보장자로 어느 기업소에서 밤 경비를 서는데 생계에 도움이 되지는 못한다. 작은 아들은 군대에 갔다. 서른 넘어 늦게 본 큰아들은 정신지체장애로 글을 읽을 줄도 쓸 줄도 모른다. 한씨에 따르면 그저 먹고 자고 힘쓰는 일만 안다. 그래도 어머니는 큰아들이 있어 든든하다고 한다. 짐을 실어다주고 돈을 버는 손달구지 삯벌이에 큰아들이 큰 몫을 해주기 때문이다. 아들이 웬만한 짐은 다 싣고 끌고 운반한다. 원래는 손달구지도 없었는데, 아득바득 모아서 작년 말에야 겨우 10만 원짜리 손 달구지를 마련할 수 있었다. 그런데 2.16 명절이 지난 지 며칠 안 돼 골목길 장사를 단속한다고 하더니, 그만 손달구지를 몰수당하고 말았다. 하루아침에 생존수단을 잃어버린 것이다. 얼마나 울었는지 한씨는 거의 탈진한 상태에서 넋을 잃고 있다가 울분을 토했다. “참고 견디자니 당장 죽을 것 같다. 그렇다고 어디 하소연할 데가 아무데도 없다. 이제 우리 식구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고 울기만 했다.
어느 60대 부부, 8식구 생계 막막
평안남도 신양군에는 한 집에 여덟 식구가 모여 사는 세대가 있다. 60세가 넘은 부모와 시집갔다 친정집에 의탁하고 있는 두 딸과 그 아이들, 그리고 얼마 전에 제대한 아들과 그의 아내가 모여 산다. 나이 많은 부모님은 신발 수선 일을 한다. 하루 종일 추운 겨울에도 밖에 앉아서 손님을 기다린다. 두 사람이 앉기 좋은 크기로 조립식 비닐집을 만들고, 양동이만한 화로를 두어 그나마 추위를 막는다. 아침 8시부터 저녁 해질 무렵까지 손님을 기다린다. 이렇게 해서 버는 돈은 하루 기껏해야 2-3천원이다. 남편이 은퇴하기 전에 러시아 벌목공으로 3년간 일해서 번 돈이 있어 지금껏 버텨왔다.
5살 딸아이를 데리고 들어온 큰딸은 몸이 아파 일을 하지 못한다. 아직 마흔이 안 된 둘째딸은 장사를 잘했는데 그만 사기를 당해 이혼하고 아들아이를 데리고 친정에 돌아왔다. 다시 재기를 노리지만 워낙 잃어버린 재산이 커서 자본금을 다시 마련하지 못하고 있다. 외아들은 외지 여자와 결혼했는데 집이 없어 부모님 집에 얹혀산다. 게다가 아직 대학생이라 돈벌이를 못하고 있다. 어머니는 자식들 걱정 때문에 신경이 쇠약해져 건강이 좋지 못하다. 주위 사람들은 장성한 자녀들이 부모를 도와주기는커녕 더 힘들게 한다고 못마땅해 한다. 이웃에 사는 장경화(60대)씨는 “요즘 자식 덕 보려고 할 사람이 어디 있나. 그래도 자식들이 제 앞가림만 해줘도 좋을 텐데 그런 집 찾기가 어렵다”고 했다. 당사자인 김철(60대, 남편)씨는 “그래도 우리 애들이 죽지 않고 살아있는 게 어디냐. 그것만으로도 감사하다”고 말했다.
“연탄가스로 죽었는데 심장마비?”
연탄가스 사고사가 심장마비로 둔갑되는 일이 일어났다. 지난 해 12월 말, 평안북도 한 도시에서 한 40대 아주머니가 연탄가스를 마시고 사망했다. 두 아들은 군복무 중이고, 남편은 보위부원으로 량강도 백두산 건설에 나간 지 오래돼 혼자 살던 중이었다. 시신은 사망한 지 하루가 지난 다음 날 저녁에야 발견됐다. 인민반에서는 장례를 치르려고 5일 넘게 남편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다가 기별이 없자, 결국 먼저 장사지냈다. 남편은 장례식이 끝난 며칠 뒤에 돌아왔다. 그는 돌아오자마자 아내의 무덤을 맨손으로 파헤쳐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아내를 잃은 슬픔 때문에 정신이 이상해진 것 아니냐는 눈길을 받았다.
사망자의 남편은 “인민반 가두 순찰이 제대로만 돌았어도 그렇게 죽지는 않았을 것이다. 가두 순찰을 제대로 하지 않은 인민반장 책임이 크다. (사정을) 뻔히 아는데도 이 사람들이 심장마비로 죽었다고 거짓말했다. 자기들이 책임을 안 지려고 그런 거다. 내 반드시 (인민반장이) 책임지게 하겠다”고 했다.
실제 북한 전역에서는 겨울철 연탄가스 사고가 빈번하게 일어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가두순찰’을 운영하고 있다. 각 인민반들은 ‘가두순찰조’를 구성해 밤 12시부터 새벽녘까지 연탄 때는 집들을 돌아다닌다. 보통 2번씩 도는 곳이 많은데 구역에 따라 3번 도는 곳도 있다. 잠든 사람들을 깨워 대답하면 다음 집으로 가고, 대답이 없으면 직접 들어가 확인해본다.
조연경(43세)씨는 “탄 때는 집은 무조건 순찰하게 돼있다. 가스사고로 사람이 죽으면 인민반장이 책벌 받는다. 인민반장이 책벌이 무서워 심장마비로 죽었다고 했을 것이다. 힘없는 사람들이라면 가만히 있겠지만, 남편 되는 사람이 보위부원이라 힘 좀 있으니까 혼내야겠다고 해서 끝까지 추적하는 것 같다. 법의학 진단하면 중독인지 심장마비인지 간단히 알 수 있으니까 묘를 판 거다. 처벌이 무겁지는 않을 거다. 정치적 과오가 아니라 큰 처벌은 아닐 거”라고 말했다.
이웃들은 이 소식을 듣고, “가두순찰이 사람 못 살게 구는 건 맞다. 하룻밤에 한 번 깨우고 가면 다시 잠들기까지 얼마나 힘든지 모른다. 그것도 두 번씩 깨우니까 아주 죽을 맛이다. 잠 한 번 푹 자보는 게 소원이다. 하지만 죽을 사람 살리는 일이라 마지못해 넘어가는 건데, 순찰을 제대로 했어도 그렇게 안 죽었을 거다. 그 집 남자 말이 백번 옳다”는 의견이 많았다. 한편 이번 사건으로 주목받게 된 인민반장은 현재 보안서 예심 중이다. 사인을 심장마비로 하는 과정에서 인민반장이 사망자 친척들을 입막음하려고 돈을 건넨 사실이 드러나 조사에 들어갔다.
마약 사려고 빚낸 사람은 ‘코 빚쟁이’
함흥, 청진, 평성, 평양 등 전국 주요도시에서 해가 갈수록 마약 사용자가 늘어나면서 가산을 탕진하는 세대도 늘고 있다. 마약 때문에 빚을 지는 사람들을 흔히 ‘코 빚쟁이’라고 부른다. 마약을 코로 흡입하는 데서 ‘코’가 마약을 의미하게 됐다. 한 번에 큰돈을 주고 사기가 어려워 1만 원짜리 작은 봉지를 구입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들은 ‘코 파는 집’에서 구입한다. 작은 마약 봉지를 판매하는 집을 ‘코 파는 집’이라고 한다. 중독자들은 앉은 자리에서 한 번에 2-3봉지를 사용하곤 한다. 이들은 “한 봉지 해봤자 기별이 안 가기 때문에 2-3봉지는 해야 한다”고 말한다. 아무리 적게 쓴다고 해도 하루에 몇 만원을 훌쩍 넘기니 몇 백만 원 날리는 게 예사다. 나중에는 돈이 없으니 물건을 낸다.
마약을 사려는 사람들은 외상이 안 되기에 가전제품, 옷감, CD 등 돈 될 만한 것은 무엇이든 가져간다. 그렇게 들어온 물건들은 시장 장사꾼에게 넘겨진다. 이렇게 코 파는 집에는 코(마약)를 사려는 사람 외에도 물건을 가지러 오는 시장 장사꾼들이 고정적으로 드나든다. 지난 달 초, 함경북도 청진시 라남구역에서 코 파는 집이 걸렸는데, 이 집에서 나온 물건들을 회수했더니 한 차량도 모자라 한 차량을 더 불러야 할 정도였다. 한 간부는 “먹을 게 없어서 못사는 사람들도 많지만 얼음(마약)하는 사람도 늘어나 큰일이다. 아무리 단속해도 늘어만 가니 대책이 없는 것 같다”고 말했다. 평성에서 코 파는 장사를 하는 한 40대 여성은 “장사도 하지 마라, 뭐도 하지 마라 하니 우리가 먹고 살게 이런 것밖에 없지 않나. 돈을 벌 수 있으면 뭐든 하는 거지. 나라에서 우리보고 더 하라고 떠미는 격”이라고 말했다.
■ 여성/어린이/교육
“동생은 제가 지킬 겁니다”
량정학(12세), 정혁(9세)군은 작년만 해도 어머니와 아버지의 사랑 속에 남부러울 것 없이 살았다. 배불리 먹지는 못했지만 집에서 웃음소리와 노랫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오랜 지병으로 공장에 나가지 못하는 아버지는 어머니 대신 집안 구석구석을 손질하고 정리했다. 떨어진 문짝을 고치거나 이빨 빠진 칼을 시퍼렇게 갈아놓는 일은 아버지 몫이었다. 어머니는 아버지 약값과 식구들 식량을 구하려고 중고 옷 장사를 다녔다. 한 번 떠나면 일주일, 열흘은 보통 걸리지만, 어머니가 돌아올 날을 손꼽아 기다리는 재미도 있었다. 어머니는 꼭 밀가루든 옥수수든 먹을 것을 들고 오셨다. 오랜만에 어머니가 해주는 저녁밥을 먹은 날이면, 온 식구가 한 방에 모여 노래자랑을 한다. 아버지의 손바닥 장단에 맞춰 형이 노래를 부르고 동생은 춤을 춘다. 어머니는 손뼉 치며 웃는다. 전깃불은 없지만 양초 하나 밝힌 방은 늘 그렇게 환했다.
행복한 나날은 곧 끝이 났다. 작년 11월 7일, 장사 나갔던 어머니가 교통사고로 그만 세상을 떠났다. 사랑하는 어머니를 잃은 슬픔을 충분히 느낄 새도 없이 당장 먹을 것이 떨어져 형제는 구걸하러 다녀야 했다. 아버지는 지병이 급격히 악화되기 시작했다. 급기야 손을 들어 음식을 집어먹기도 힘들 지경에 이르렀다. 형제가 먹고 싶은 마음을 꾹 참고 가져온 빵을 아버지는 잘 넘기지 못하셨다. 어머니가 떠난 지 한 달째 되는 날,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났다. 졸지에 부모를 잃은 두 아이가 의지할 곳은 아무데도 없었다. 형제는 집을 나와 역과 시장을 떠돌아다니며 꽃제비가 되고 말았다. 정학군은 “언제까지 이렇게 살지는 않을 겁니다. 우리 혁이 학교도 보내줘야 됩니다. 어머니, 아버지 대신해서, 이제 동생은 내가 꼭 지킬 겁니다”라고 말했다. 정학이는 오늘도 단천역 앞에서 어머니, 아버지와 함께 불렀던 노래를 부르며 그 돈으로 동생에게 빵을 사주고 있다.
원산 꽃제비 구제소, 임시 교육 실시
강원도 원산시 꽃제비 구제소에서는 올해부터 아이들을 대상으로 하루 한 시간 글쓰기 교육을 시작했다. 작년 12월 25일까지 꽃제비 아이들을 인근 계모학원 또는 초등학원 등에 모두 분산해 보냈는데, 올해 꽃제비들이 60여 명 더 생겼다. 계모학원 등지에서는 작년에 들어온 꽃제비들 수가 너무 많아 더 이상 받을 수 없다고 했다. 평소에도 계모학원에서는 꽃제비 아이들을 잘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다. 들어온 아이들이 곧잘 도망가기 때문이다. 작년에는 당에서 정치적으로 압박해 할 수 없이 아이들을 받았지만, 올해는 수용 인원 초과를 이유로 거절하고 있다. 이에 구제소에서는 임시적으로나마 아이들에게 글공부를 시키고 있다. 특히 중학교 졸업할 나이가 된 꽃제비들은 가능한 졸업을 시켜 다른 도에 돌격대로 보낼 예정이다.
어느 가정주부의 하루
조정희(40대)씨는 가두순찰 당번인 날은 잠자기를 포기한다. 밤 12시에 한 번 가두순찰을 돌고, 새벽 3시에 다시 돈 다음, 동사무소에 가서 확인을 받아야 한다. 조씨네 인민반에는 24세대가 있는데, 인민반 반장을 빼면 23일 만에 매 세대마다 한 번씩 순번이 돌아온다. 조씨는 “요령 있는 사람은 바람 센 날에는 그냥 두드리고 가지만, 고지식한 사람들은 문을 두드린 다음, 안에서 답변할 때까지 계속 두드린다. 잠자는 사람들은 한 번 깨고 나면, 그 시간부터는 아예 잠을 못 잔다”고 했다.
새벽 5시가 되면 전기가 잠깐 들어오기 때문에 양수기를 돌려 물을 퍼 올린다. 아침 식사 준비를 하고, 나머지 식구들을 깨워 출근을 시켜야 한다. 간혹 조기 청소나 작업에 나가야 할 때도 있다. 아침 7시부터는 시골에서 온 쌀장사, 계란 장사꾼들이 “싸구려”를 외친다. 이들은 한밤중에 길을 떠나 사오십리를 꼬박 걸어온다. 조금 있으면 설기떡, 국수, 펑펑이 장사꾼 들이 꾸역꾸역 모여든다. 1주일마다 학습 생활 총화를 해야 하고, 기념일 전에는 영화문헌학습이나 참관학습으로 하루 온종일 또는 오전 한 때를 보낸다.
동냥을 얻으러 다니는 꽃제비들이 지나가고, 오후 2시부터는 장사하러 장마당에 나간다. 조씨는 “사람이 기계가 아니고서야 아픈 날도 있고, 빠질 때도 있다. 하도 많이 빠지고, 어떤 사람은 일부러 노골적으로 빠지니까 말이 많다. 그래서 학습이나 분토반출 등 조직생활에 한 번씩 빠지면 매번 2천 원씩 내야 한다는 법을 내놓았다. 종일 장마당에 앉아있어야 겨우 하루 2-3천원 버는데, 벌금 2천원 내라고 하니 의견이 있어도 울며겨자먹기로 내야한다”고 했다.
한 가내반에 20여 명이 있는데, 이렇게 모은 돈이 3-4만 원 정도 된다. “년간 결산총회를 하면 의례히 회식과 같은 다과회를 한다. 올해 1월부터 분토 값이다, 유원지 건설 값이다 너무 돈 내라는 데가 많아 도저히 회식비까지 마련할 수 없었다. 녀맹위원장과 관리위원장을 청해 식사를 대접해야 했지만, 두 사람에게 각각 2만원씩 주고 말았다. 조직생활 빠진 벌금으로 모은 돈을 이렇게 썼다. 녀맹위원장이 추운 사무실에 온종일 앉아 사업을 해도 돈과 배급을 누가 주는 게 아니라 이런 식으로라도 위해줘야 한다”고 했다.
새벽부터 각종 조직생활에 끼니벌이 장사에 숨 돌릴 틈 없이 돌고 나면 다시 집에 돌아와 살림을 해야 한다. 조씨는 잠을 못자고 몸이 힘든 건 아무 일이 아니라고 말한다. 다만 하루라도 마음 편히 먹을 걱정 안하고 살았으면 좋겠다며, 언제쯤이면 그런 날이 오겠는지 모르겠다고 한숨 쉬었다.
■ 사건사고
침목 깔려 노동자 사망
지난 1월 21일, 함경남도 단천시 대흥지구에서 한 노동자가 철도 궤도와 침목을 같이 나르던 중 잘 못 깔려 사망했다. 함흥 철도총국 단천분국 객화차대기업소에 다니는 강영철(51세)씨는 철도 궤도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목숨을 잃었다. 강씨와 같은 직장에서 근무했던 정필규(50대)씨는 “올해 첫날부터 ‘철도 정상운행을 위해 분투하자’고 날마다 회의하고 결심을 다졌다. 그런데 정작 우리 같은 로동자들은 레루(rail)에 깔려죽고 먹을 게 없어 못 먹어죽고 비참할 뿐이다. 강동무도 여러 날 못 먹어서 제대로 서있기도 힘들어하는데, 침목 생산하라고 떠밀리다시피 나간 거였다”고 했다. 심영환(40대)씨도 이번에 사고로 사망한 강씨의 일이 남의 일 같지가 않다고 했다. “조금이라도 맥이 있었으면 그렇게 어이없게 손 한 번 못써보고 깔려죽지는 않았을 거다. 옆에서 일하던 사람들이 빨리 손을 쓴다고 썼는데 얼마 못 버티고 그냥 숨을 놓더라”고 했다. 심씨는 “천리 철길 정상운행하자고 맨날 떠드는데, 천리 철길이 아니라 ‘한 치 식도부터 뒷구멍 길’만이라도 제대로 소통시키면 좋겠다. 작년에 이 한 치 길마저 제대로 소통 못시켜 얼마나 많이 죽었는가. 그러면서 로동자들한테 무슨 열성을 바라는가?”라고 했다. 단천분국 객화차대기업소 노동자들은 안전사고도 ‘못 먹어서’ 생긴 것으로 이해했다. 한편 이 기업소는 50여 차량의 객차를 보유하고 있으나 자재가 없어 수리를 못해 겨우 20량 정도를 운행 중이다. 나머지는 차량불량으로 서있다. 화물차량도 제때 수리하지 못해 100여 차량이 단천역내에 그대로 서있어 수송에 혼란을 주고 있다.
■ 논평
북한의 식량 부족과 조평통의 성명서
북한이 조국평화통일위원회의 성명을 통해 동해상에서 남한 민간 항공기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남북한의 평화와 교류, 협력을 열망하는 많은 사람들은 이 성명에 당혹감을 금치 못하고 있다. 지난 1년간 남한의 대북정책이 ‘민족적 화해와 단합에 대한 로골적인 부정’, ‘평화와 번영에 대한 공공연한 도전’, ‘통일에 대한 용납할 수 없는 역행’이라던 북한이 오히려 일촉즉발의 긴장 상태를 고조시키고 있다.
국제사회는 1949년에 전시중이라도 민간인은 해치지 않고 보호할 것을 협약으로 채택한 바 있다. 이번에 북한이 대남 압박의 수단으로 민간 항공기의 안전을 거론한 것은 국제적인 명분을 스스로 잃는 것이다. 북한은 성명서를 즉시 철회하고 동해상을 운행하는 민간 항공기와 선박의 안전을 보장해야 한다.
최근 북한은 밖으로 공세적인 외교 노선을 유지하면서 동시에 내부 사회 통제를 강화하고 있다. 이는 미국과 남한의 대북 정책에 대한 맞대응의 성격이라기보다는, 북한 내부의 불안 요소에 기인하는 바가 더 커보인다. 대다수 남한 언론이 관심을 가지는 건강 이상설과 후계 구도 문제가 그 핵심은 아니라고 본다. 지금까지 북한 사회의 변화를 추적해 본 결과, 북한 사회의 근간을 흔들어놓고 있는 것은 바로 에너지와 식량 부족 문제이다. 물질 자원이 고갈된 북한 정부로선 외부에 적대 세력을 상정해 전시태세를 조성함으로써 내부 통제력을 강화하고자 하는 것이다.
미국과 중국의 중유 지원이 일단락된 상태에서 남은 건 일본과 한국의 지원뿐이다. 그런데 일본은 납치자문제로, 남한은 북한의 대남 공세적 태도 등으로 에너지 지원이 불투명하다. 식량도 마찬가지다. 미국은 한국어 구사 가능한 WFP요원 인원 수 문제로 북한 측과 견해차가 생기면서 지난 해 9월부터 WFP를 통한 식량 지원을 중단한 상태다. 국제사회는 WFP가 아무리 북한의 식량 사정이 긴박함을 호소해도 누구도 선뜻 나서지 않고 있다.
북한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에너지와 식량 부족은 곧바로 북한 주민의 생존문제와 직결된다. 무엇보다 작년부터 가속화되고 있는 가족 해체 문제는 식량 부족이 사회적으로 얼마나 심각한 파장을 미치고 있는지 보여준다. 작년 춘궁기에 가족을 먹여 살리던 생계부양자, 주로 어머니가 사고를 당하거나 사망한 취약계층의 경우 거의 자동적으로 가족이 해체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가족 해체가 심화되고, 방랑자가 많아지면, 자연히 국가 통제력이 약화되어 사회 불안으로 이어진다. 취약계층을 안정시키는 길이 곧 북한 사회의 안정성을 높이는 방법이다. 이들을 도울 수 있는 국가적인 대책이 필요한데도, 북한 당국의 관심은 오로지 외부 공세에만 집중되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
이제 언 땅이 풀리고 농사 준비를 서둘러야 할 시기이다. 여전히 비료는 부족하고 작년 춘궁기에 많은 사람들을 잃은 농촌에서는 일손마저 부족한 형편인데, 다가올 봄을 또 어떻게 준비해야 할지 난감한 실정이다. 남북한 긴장이 격화될수록, 또 남북한 정부가 주민들의 어려움을 외면하고 정치 공세에만 몰두할수록, 북한 주민들이 겪어야 할 고통은 커져만 간다. 봄은 왔지만 한반도의 정세는 봄을 외면하고 있다.
■ 집중탐구
어느 간부의 편지-1997년 여름, 나는 입을 다물었다
1997년 8월, 이 시기는 사람들이 너무 많이 죽어 민심이 황황하던 때였다. 100만 명이 넘게 죽었다고, 간부들끼리 뒷공론하던 때였다. 이 시기에 나는 식량을 받으려고 청진항, 흥남항, 남포항 등지로 부지런히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 날은 평안남도 남포시 남포항에 안남미 15톤을 인수하러 갔다. 우리 직장 로동자들이 많이 죽어나가는 때라, 급한 김에 밤을 새우면서 안남미를 받아왔다. 도착했더니 비서가 식량 일부를 상급당 일꾼들에게 풀라고 했다. 너무 기가 막혀 “그렇게 못 하겠다”고 했다. 그랬더니 당 권한을 부리면서 무조건 하라고 내리먹이는 것이었다. 나는 “못 하겠다”고 언성을 높였다. 로동자들이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 식량은 로동자용으로 받아온 것인데, 무엇 때문에 웃기관에 바치겠는가? 당신 눈에는 직장 로동자들이 죽어가는 게 보이지 않는가?”
“당에서 하라는 대로 하면 될 것이지 왜 시끄럽게 구는 거야?”
“이거 바치고 나면 로동자들은 무얼 먹나?”
“잔말 말고 상부에 바치라”
아무리 열을 내어 소리쳐도 내 말은 근본 듣는 둥 마는 둥했다. 결국 로동자로 강직돼 힘든 일을 하게 됐다. 억울한 마음에 로동자들 주려고 받아온 식량을 상급 일꾼들이 다 가져갔다고 소문을 냈다. 이 소문에 굶어죽은 집들에서 크게 떠들어댔다. 군중들 여론이 날로 높아가고, 다른 대중들도 떠들어 사태가 커지자 당중앙위원회에까지 신소가 올라갔다. 곧 조사가 내려온다고 하니 상급 단위에서 급히 불러 당적 담화를 나누고, 나를 더 높은 급으로 이동시켰다. 대신 지나간 일을 무조건 함구하라고 했다.
조사가 시작되자 나는 입을 다물었다. 그 대가로 어려운 식량난 속에서 퇴직하기 전까지 다른 사람들보다 편히 살게 되었다. 수많은 죽은 령혼들을 팔아 나와 내 가족을 살린 것이다.
10년이 지났다. 작년부터 또 다시 식량난이 시작되고, 하나 둘 쓰러지는 사람들을 보니, 지나간 내 과거가 한없이 마음에 걸린다. 이제 일흔이 다 된 나이에 무엇이 두렵겠느냐만 나로 인해 억울하게 굶어 죽어간 사람들을 생각하니 마음이 편치 못하다.
이렇게 권력을 쥐고, 백성의 생명을 초개같이 여기는 것이 바로 위대한 김일성 수령께서 헐벗고 굶주린 백성을 위해 창건한 로동당의 현재 모습이다. 권력 있는 사람들이 자기들 마음대로 하고 사는 그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됐다. 그 때 내가 권력에 눈이 멀지 않고, 안남미를 로동자들에게 돌려주었다면 죽지 않고 살았을 목숨이 얼마였겠는가. 이제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지금, 나는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할 것이다. 죽은 령혼들에게 어찌 용서를 다 구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