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선집중
평양 시장에서 쌀 찾기 어려워
평양 각 구역 시장에서 쌀 찾아보기가 어렵다. 쌀 판매를 전면금지했기 때문이다. 쌀 판매 현장을 들키는 즉시 회수당하기 때문에 누구도 쌀을 밖에 내놓고 팔지 못한다. 옥수수와 옥수수쌀도 팔지 못하기는 마찬가지다. 대신 콩이나 기장 등의 곡물은 판매 가능하다. 어쩔 수 없이 상인들은 알곡을 은밀히 거래하는데, 쌀값이 점점 떨어지고 있다. 만경대구역 당상동 시장에서는 지난 달 말까지만해도 kg당 2,100원 하던 쌀값이 6월 초 현재 1,700원선으로 떨어졌다. 6월 춘궁기인데도 쌀값이 작년과 달리 오르지 않는 이유에 대해 한 간부는 세 가지를 꼽았다. 그는 첫째 정부의 쌀 판매 금지 조처가 그 어느 해보다 강화됐고, 둘째 150일 전투 기간이라 장사꾼의 이동 및 물자 유통이 안 되며, 장사할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점, 마지막으로 주민들이 작년 춘군기를 넘기면서 돈을 다 써버려 올해 구매력이 현저히 떨어진 점을 들었다.
도매시장 역할 하는 평성시장, 폐쇄 결정
중앙당은 평성 시장을 폐쇄하기로 결정했다. 북한 당국은 올해 1월부터 종합시장을 폐지하고, 농민시장으로 전환하려고 했으나 지방의 반발이 너무 심해 6개월 유보하기로 결정한 바 있다. 그동안 평성 시장은 전국적으로 가장 큰 도매시장 역할을 해왔다. 이에 도매시장 역할을 한 평성시장을 없애면 전국 시장이 다 축소될 것이라는 판단에 따라 폐쇄 결정을 내린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평성시는 시장이 없어지면, 각 구역마다 소규모 장마당을 운영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또 장사 연령 제한도 다시 강화한다. 단, 각 인민반에서 가장 생활이 곤란한 세대 중 3세대만 뽑아 장사를 허용해주기로 했다.
■ 식량소식
단천시 간부 성원 600여명 생계걱정 없어
함경남도 단천시 4개 당위원회 성원은 약 600여명에 이른다. 시당, 건설련합당, 광업당, 철도당 이상 4개 당 안에는 책임비서, 조직비서, 선전비서로부터 간부과, 조직부, 선전부 등 당 위원회 성원 등이 있다. 이들은 보안원과 보위부원 등 보안일꾼들과 함께 생계걱정 없이 생활하는 최상층부에 속한다. 시당은 지방 산업, 수산, 농업 부문 등을 모두 관할하므로 자신들의 배급만큼은 차질 없이 받고 있다. 지방 공장들로부터 기름, 술, 간장, 된장 등 식료품 일체를, 수산 부문에서는 어류들을, 그리고 농업 부문에서는 곡물들을 공급받기 때문에 먹을 걱정을 전혀 하지 않는다. 그 외 건설련합당 등의 간부들도 마찬가지로 어떻게든 자기들의 먹을 것을 최우선적으로 확보한다. 그래서 주민들이 “요즘은 간부들만 살아남는 시절”이라고 말할 정도다. 반면 일반 주민들은 올해도 풀뿌리와 나무껍질을 벗겨먹는 형편이다. 이들보다 형편이 좀 낫다 싶으면 옥수수죽과 옥수수국수를 끓여먹는다. 전체 단천 인구의 약 60% 정도가 이렇게 산다. 주민들은 간부들이 “자기 리속만 채우고, 오직 자기 자신만 잘 살면 된다는 식이다. 그러니 하층민들만 곤란하게 생활하고 있다. 아무도 (가난한 사람들을 보고) 가슴 아파하거나 관심을 가져주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평양 휘발유통 생산 공장, 배급 있어도 한 끼는 죽
평양시 승호구역 화천동에는 후방총국 연유관리국산하 휘발유통 생산 공장이 있다. 이 공장은 군부대 소속 공장으로, 공장 노동자의 약 95%가 ‘줄을 타고 온’ 제대군인들이다. 매달 노동자 본인에게는 상․하순 배급 전량이, 그 가족에게는 상순(15일) 분량이 공급되고 있다. 입쌀과 통옥수수를 4 대 6의 비율로 준다. 이렇게 배급을 꼬박꼬박 받긴 하지만, 승호구역이 워낙 가난한 곳이라 먹는 게 신통치 못하다. 장사를 하고 싶어도 인구수도 적고, 주변이 다 가난해 장마당이 잘 형성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저 집에서 돼지, 토끼 등의 가축을 키워 살림에 보태는 수준이다. 그렇다보니 하루 세 끼니 중 적어도 한 끼는 죽을 쒀 먹는 집들이 많다. 서미숙(가명, 40대)씨는 다른 공장에 비해 배급 사정이 월등히 좋은 것은 사실이나, 장사 등 다른 부업을 못하게 하니 먹는 사정이 썩 좋지 않다고 말한다. 서씨는 “배급을 준다고 해서 규율과 로동강도가 군대 못지않게 강하다. 더 잘 먹어야 하는데, 한 끼나 두 끼를 죽으로 먹다보니 공장에 나가는 우리 세대주(남편)가 많이 힘들어 한다”고 했다.
평양 중심구역, 7월부터 식량 공급 차질 예상
평양 중심구역에서는 6월까지 15일 분량의 식량을 공급했다. 원래 상순과 하순 두 차례에 걸쳐 공급돼야 하나, 식량 원천 부족으로 상순 배급만 지급됐다. 7월부터는 배급 전망이 이마저 불투명하다. 시량정부에서는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 7월부터는 자체로 식량을 해결하라고 했다. 량정부의 한 관계자는 식량 배급이 정상 공급된다 해도, 쌀이나 옥수수, 밀가루 등 알곡이 아니라 올감자로 지급될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한편 주변구역에서는 6월 현재까지 식량 공급이 중단된 상태다. 선교구역에 사는 함미경(38세)씨는 “중심구역 사람들이야 집안에 6개월 정도 기본 먹을 걸 저장해놓고 살지만, 주변구역은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많다. 중심구역은 배급 없어도 일없으니 거기 갈 식량을 주변구역에 좀 나눠줬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피력했다.
■ 경제활동
회령시, 질안 비료 1차 수송 완료
지난 5월 31일 저녁, 함경북도 회령시는 흥남비료공장으로부터 질안비료 1차 수송을 완료했다. 이번에 들어간 질안비료는 약 1,250톤이었다. 회령시는 다음 날인 6월 1일부터 각 농장에 배분하기 시작했다. 농장들에서는 배분된 수량만큼 한 마대당 50kg씩 담아 저울에 확인하는 방식으로 비료를 챙겼다. 보안당국에서는 비료 분배 과정을 면밀히 지켜보고, 야간 순찰을 돌며 비료가 불법적으로 빠져나가는 일이 없도록 철저히 경계했다. 농장 일꾼들은 뒤늦게나마 비료가 들어와 다행이지만 수량이 충분치 않아 걱정이라며 각 농장으로 돌아갔다.
일부 고산지대와 함경북도 지역, 냉해 피해
강원도 이천, 철원, 회양군 등 일부 고산지대에서는 지난 5월 6일과 7일에 농작물에 적지 않은 냉해피해가 있었다. 옥수수를 직파한 밭에서 특히 피해가 컸는데, 옥수수 싹이 트지 않아 뒤늦게 두부콩으로 전환한 밭들이 많다. 함경북도 일부 지역에서도 우박 피해가 있었다. 옥수수를 영양단지로 심은 농장에서는 피해가 거의 없었지만, 직파한 농장이나 개인 소토지에서는 피해가 컸다. 봄 날씨가 추워 땅 속에서 씨앗이 얼거나 썩어버린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경사가 높은 산에 소토지 농사를 하려고 했던 개인들은 약 70-80% 가까이 싹이 나지 않는 바람에 뒤늦게 두부콩을 심는 경우가 많다.
■ 정치생활
단천시 4개당, 지역 현안 서로 나 몰라라
함경남도 단천시에는 시당을 비롯해 단천건설련합당, 단천광업련합당, 단천철도부문당 등 4개의 당이 있다. 시당을 제외한 나머지 3개당은 모두 중앙당이나 철도부에 속해있다. 그렇다보니 상급당의 눈치만 살필 뿐 지역 현안에는 별 관심이 없다는 비판을 듣는다. 일례로 단천지구는 광업, 건설 관련 사업이 집중돼있다 보니 여타 다른 시, 군에 비해 환경문제를 비롯해 건설, 도로, 록화, 식수 문제 등 서로 긴밀히 협조해야할 사안이 많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시당의 한 간부는 “자기 당이 특세를 내놓기 때문에 무슨 일이 제기되면, 합심하지 못하고 다 자기 주장만 하다나니 뭐 하나 처리되는 게 없다. 시안에 건설문제, 환경위생문제 등 아무리 문제가 많아도 시당에서만 골머리를 앓을 뿐 다른 당에서는 관심이 없다. 서로 강 건너 불 보듯하다나니 아주 락후하며 전혀 아무런 개변이 없다. 시당 위주로 모든 일을 하고 있지만 자금이 없고 힘이 약해 사실 아무 것도 못하고 있다”고 했다.
150일 전투 기간, “중국 도강자 없어야”
지난 5월 23일, 회령시에 내려간 중앙당 일꾼들은 시당과 녀맹위원회 일꾼들이 모인 자리에서, 조직적 통제를 더 강화할 것을 지시했다. 국경연선지역의 경우 150일 전투 기간 동안 특히 중국 도강자가 발생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들은 “국경 지역 녀성들이 중국에 대한 환상을 머리에 떠올리지 못하도록, 150일 전투 기간 동안 사상 사업을 더 강화하라”고 했다. 도강자 발생시 지역 동사무소 일꾼들은 물론 보안원, 보위부원, 공장 당비서, 녀맹원 등 관련 책임일꾼들에게 당 책벌과 해임 등 엄중한 문책도 경고했다.
■ 사회
로병들도 규찰대 동원
150일 전투가 진행됨에 따라 길거리 단속도 계속 되고 있다. 전국 각 지역마다 보안원들이 아침 9시부터 오후 4시까지 길거리를 지나가는 사람들이나 골목길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단속한다. 길거리 장사를 아무리 단속해도 소용이 없자, 같은 구역에 사는 노인들로 단속반을 만들었는데 ‘로병 규찰대’라고 부른다. 노인이 말하면 그래도 사람들이 듣는 시늉을 한다는 판단 때문이다. 그러나 로병 규찰대가 다들 고령의 노인들이다 보니 가만히 서있는 것도 힘들어한다. 좀 서 있다가도 어느새 나무 그늘 밑에 앉아 꾸벅꾸벅 졸 때가 많다. 순찰하던 보안원이 이 모양을 보고 질책이라도 할라치면, “어쩌겠나. 우리 집도 먹을 게 없어 내 로친(늙은 아내)도 장사를 나가는 형편인데, 남들을 못하게 하면 쓰나?”라고 응수해 보안원들을 머쓱하게 만들기도 한다.
“숱한 돈 들여 설치해놓고, 숱한 돈 들여 해체하자니 억이 막힌다”
신의주 남송시장 골목길에 앉아 매대 장사하는 강옥림(40대)씨는 아파트 창틀 해체 지시에 너무 어이가 없다고 했다. 강씨는 “숱한 돈 들여 설치한 것을, 숱한 돈 들여 해체하자니 억이 막힌다”고 말했다. 늄창하는데 들어간 돈만 120달러였다며, 없는 살림에 한 건데 다시 해체하라니 피눈물이 날 지경이라고 했다. 남신의주 빈민지구에 사는 고영희(30대)씨도 “억이 막힌다”는 표현을 썼다. 고씨는 “한때는 베란다에 창문을 못하면 아파트에 살 자격이 없다고 너무 내미는 바람에 한푼 두푼 모아 겨우 목재로 했다. 그렇게 겨우 한 것을 또 해체하라고 하니 억이 막힌다. 안 하면 안 된다고 해서 먹을 거 못 먹고 겨우 해 넣었더니 이번에는 다시 다 뜯어내란다. 이런 일이 세상에 어딨냐?”며, 왜 이렇게 못살게 구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일부 주민들은 “돈을 갖다 주면서 하라고 하기 전에는 죽어도 못하겠다”고 아우성이다.
아파트 창문, “뜯어라, 마라”에 신의주 주민들 불평불만
요즘 평안북도 신의주 시내 1호 도로 근처에 사는 주민들의 심기가 불편하다. 아파트 창문 때문이다. 늄창(알루미늄틀로 만든 창), 수지창, 나무창을 모조리 없애라고 해서 해체했더니, 다시 규격에 맞게 늄창 등으로 하라고 했다. 그러다 지난 5월 22일에는 또 다시 늄창 등을 없애라는 방침을 내렸다. 26일까지 무조건 해체하라는 지시였다. 주민들은 이같이 오락가락하는 정책에 아연실색해 했다. 주민들은 돈이 너무 많이 들기 때문에 창틀을 새로 하거나 없애는 게 말처럼 쉽지 않다고 한다. 당에서 하라니까 하는 수없이 창을 새로 했다가 뜯었다가 했는데 이번에 또 해체하라고 하니, 도대체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하는 거냐는 하소연도 들린다. 당국에서는 불평불만이 터져 나올세라 “일체 의견을 내지 말라. 불평분자를 조사해서 추방시키겠다”고 재빨리 엄포했다. 아침 6시부터 주민 총회를 열고, 기한까지 철거하지 않은 세대는 강제 이주시키겠다고 했다. 다수의 주민들은 가까스로 불평을 삼키며 다시 늄창 해체 작업을 시작했다.
이렇게 창문을 해라, 마라 방침이 오락가락하는 이유는 도시 미화 사업 때문이다. 평양에서도 마찬가지지만, 국경연선지역과 1호 도로는 외부 손님들의 눈에 잘 띈다. 예전에 만든 창문들은 내부가 다 보일 정도로 크기가 너무 컸다. 유리가 깨져나간 창도 보수가 잘 안 돼 비닐을 대충 붙여놓는 등 도시 미관을 해치기 일쑤였다. 이 때문에 당국에서는 창문 규격을 작게 하라는 지시를 내린 것이었다. 각 지역에서 창문 규격을 대충 임의대로 알려주다 보니, 늄창문틀이나 나무창틀 등 기본 제품과 또 맞지 않는 문제가 생겼고, 다시 뜯어고치라는 지시가 내려졌다. 그동안 이런 문제가 여러 번 제기됐었지만, 새로 고치는데 돈이 너무 많이 들어 잘 추진하지 못했다가, 최근 다시 강력하게 집행되고 있다.
은산군 불법 금광, 광부 죽어도 찾지 않아
평안남도 은산군에는 금광이 많다. 군부대에서 대부분의 금광을 장악한 가운데, 일부 돈주들이 폐광과 미광에 들어가 금을 캐고 있다. 원래 은산군에는 1945년 해방 전 일제시대때 생산되던 수직갱들이 많았다. 어떤 수직갱은 사갱 길이까지 포함해 약 250미터 혹은 500미터까지 되기도 하는데, 너무 많은 사람들이 금을 캐다 목숨을 잃는 바람에 해방 이후 폐광됐다. 그러다 2002년부터 돈 있는 사람들이 광산 보위대를 끼고 들어가기 시작했다. 이들은 아무 연고 없이 떠돌이 생활하다가 돈 벌러 들어온 사람들을 10-15명씩 모집해 금광 일을 시켰다. 사례비로 주는 것은 금이 섞인 돌 6kg과 하루 세 끼 식사가 전부다.
6kg의 돌을 갈아 금을 뽑으면 하루 1만원에서 1만 5천원까지 벌 수 있어 꽤 짭짤한 수입이지만, 그만큼 일이 위험하다. 광부들이 들어가는 갱들은 대부분 해방 전에 사용하던 곳들이라 안전사고에 매우 취약하기 때문이다. 갱에 들어가 40kg씩 금돌을 등짐으로 이고 나르는 일을 하루에도 10회 이상씩 해야 한다. 운반하는 도중에 장비가 부실해 다치거나 죽는 일도 허다하다. 락반 사고도 심심치 않게 일어난다. 한 달에 보통 10-15명 정도 사고가 난다. 이렇게 사고가 나면, 광주(돈주)는 매몰된 사람을 찾지도 않는다. 각 지방에서 연고도 없이 들어온 사람들이라, 가족을 찾아주지도 못하고, 죽은 시체를 꺼내지도 못해서 아예 신경을 안 쓴다. 광부들은 일제 때보다 더 악랄하게 일을 시킨다고 불만이 많다. 은산 보안당국에서는 인명피해 사고가 너무 많아 불법으로 폐광을 운영하는 이들을 단속하고 있지만, 별 효과가 없다. 한편 이런 식으로 폐광을 운영하는 사례가 현재까지 약 35건에 달하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 여성/어린이/교육
청진 녀맹원들, 묘 만드는데도 동원
청진 녀맹원들은 농촌 동원뿐만 아니라, 요즘엔 묘 만드는데도 나가야 한다. 평양 애국렬사릉에 더 이상 자리가 없어, 지방 출신자들은 이제부터 출신 지역에 안치하기로 결정됐기 때문이다. 청진에서는 농포 쪽에 야산을 깎아 묘자리를 만들기로 했다. 이에 따라 녀맹원들은 아침 6시부터 점심 도시락을 싸가지고 일하러 나간다. 대부분 옥수수죽이 도시락인데 간혹 옥수수밥을 싸가는 여성도 있다. 자갈을 날라 기초 다지는 공사를 하는데, 일은 저녁 8시까지 이어진다. 150일 전투의 일환으로 동원시키는 통에 빠져 나가지 못한다. 빠지려면 하루 3천 원씩 내야 하는데, 그렇게 많은 돈을 낼 수 있는 여성들은 별로 없다. 청암구역에 사는 정명희(가명, 30대)씨는 “우리 녀맹원들을 직장 다니는 사람들이나 당원들보다 더 내모는 것 같다. 이런저런 꼴 싫어서 어디 허술한 직장이라도 붙여야겠다는 여자들이 가득하다”고 했다.
청진시 녀맹원 한 명당 150평 모내기 과제
청진시 수남구역 청남동사무소 녀맹 초급단체들은 모내기 동원에서 녀맹원 한 명당 150평의 과제를 내주었다. 원래는 오전 일과만 하면 되는데, 150평 개인 도급제를 하다 보니 오후 2시 넘어서까지 일이 끝나지 않을 때가 많다. 어떻게든 오후에 장사를 나가려는 여성들은 과제를 빨리 끝내려고 모내기를 대충 대충 한다. 간부들이 아무리 “모내기의 질적 수준을 높이지 않고 눈가림 형식으로 농사일을 하면 안 된다”고 해도 잘 개선되지 않는다. 돈 있는 여성들은 하루 3천원을 내고 동원에서 빠지기도 한다. 돈이 없으면 젖먹이 엄마들도 아이를 데리고 논밭에 나가야 한다. 엄마가 모내기하는 동안 아이들은 현장 탁아소에서 시간을 보낸다. 엄마들은 짬짬이 현장 탁아소로 달려가 젖을 먹이고 와서 다시 일하곤 한다. 노력동원에서 제외된 년로 보장을 받은 56세 이상의 여성들도 일주일에 한 번은 동원에 나가야 한다. 나가지 않으려면 후방 지원의 일환으로 사탕이나 과자 같은 식품을 1,500원 어치 이상 사야 한다. 한편 수남구역 근로부에서는 녀맹원들의 조직 생활 누락자를 없애기 위해 녀맹원들에 대한 당적 지도를 강화하기로 했다.
■ 사건사고
9군단 군인들 강탈하고 버린 디젤유에 인근농장 피해
지난 6월 초, 함경남도 신포시 양화리에 때 아닌 기름홍수가 일어나 농장 밭이 큰 피해를 입었다. 사건의 발단은 혜산시 기름 장사꾼들이 양화리 수산사업소에 기름을 팔러 오는 도중에 군인 강도를 만나면서부터였다. 기름 장사 동업자 4명은 23톤급 유조차에 디젤유를 가득 싣고 양화리 수산사업소로 향하고 있었다. 그런데 양화리 농장 1반 지역 도로를 지나가던 중 갑자기 군인들이 나타나 차를 세우고, 디젤유 50kg를 요구했다. 장사꾼들의 거절에 군인들은 차에 타고 있던 운전사와 상인들을 차례차례 밖으로 끌어내 심하게 구타했다. 그들은 양화리 6반 탈곡장까지 유조차를 끌고 가 그 곳에서 디젤유 6톤 가량을 뽑아내 물통마다 가득 채웠다. 그리고는 양화리 5반 해군전대위수구역에 유조차를 세워놓고 도주했다. 도주하면서 유조차량 펌프를 풀어놓은 바람에 나머지 약 17톤 가량의 디젤유가 인근 논밭에 흘러들어가게 됐다. 이 때문에 약 13정보의 논밭이 기름으로 덮여 큰 피해를 입었다. 해군전대 군인들이 유조차의 타이어와 부속품을 뜯어가 버렸기 때문에 유조차량도 무사하지 못했다. 장사꾼들이 지역 보안서에 신고했지만, 보안원들은 군인들의 소행이라는 말에 쉽게 나서지 않았다. 기름을 강탈했던 군인들이 9군단 자동차 양성소 학생들이라는 사실까지는 밝혀냈으나, 범인을 더 이상 적극적으로 찾지는 않았다. 피해자들에게는 다만 계속 수사할 것이니, 유조차를 고쳐서 빨리 혜산으로 돌아가라고만 했다. 주민들에 따르면, 디젤유를 훔쳐 달아난 군인들이 훔쳐간 6톤 중 3톤을 보안서에 주었다고 한다.
■ 집중탐구
평양통신 – 600만 톤 고지를 점령하기 위한 150일 전투
150일 전투가 시작된 지도 어느덧 한 달이 지났다. 6월 6일, 이 날은 원래 월 당생활총화를 하는 날이지만, 상급당의 지시대로 열성 농근맹원(조선농업근로자동맹원)들까지 참가하는 확대초급당 총회가 열렸다. 군당 책임비서가 회의를 지도하면서, 군협동농장 관리위원회 위원장, 그리고 인접 리당비서들도 방청으로 참가시켰다. 회의는 군당 회의실에서, 뒤에 생긴 빈자리들은 군당 일꾼들로 채워 넣고, 자못 엄숙한 분위기였다.
회의 안건은 봄철 농사를 승리적으로 끝마치는 그 기세로, 당이 제시한 식량 600만톤 생산 고지를 기어코 점령할 데 대한 결의모임이었다. 회의는 농장원들에 대한 사상동원대회였으며, 농장원들을 궐기시켜 다음 농사 전투에로 내몰기 위한 계기점으로 삼고자 열렸다. 그래서 호상비판의 소리는 사라지고, 고무적이면서 원론적인 구호만 넘쳐났다. 이러한 장면을 지켜보고 있던 한 제대군인 당원이 갑자기 일어나 바른 소리를 하는 바람에 회의장이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우리 농장이 식량 600만 톤 고지에 기여하려면 정보당 벼는 4.5톤 이상 돼야 하는데, 70년대나 8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해냈지만 그 후에는 정보당 2톤이 아니면 1.5톤으로 뚝 떨어지지 않았습니까? 그 원인이 뻔하지 않습니까? 비료공급에 차질이 생겨 그렇게 된 것을 다 알고 있는 사실인데도 불구하고 왜 외면합니까? 우리 농장에는 십여년 동안 퇴비로 농사를 지어왔는데, 숱한 로력과 자금을 들였지만, 됩니까? 로력이 문제가 아니지요. 금년도도 마찬가집니다. 퇴비, 퇴비, 퇴비 그런데 어디 가서 질 좋은 퇴비를 해옵니까? 우리 강남(평양 강남군)에는 없지 않습니까? 산기슭에는 나무 한 그루 없는데, 산의 흙은 논흙보다 더 보잘 것 없지 않습니까? 인분도 제한되고 멀리 시내 보통강 강바닥을 파와야 그래도 좋겠지만, 거리가 너무 멀어서 기름 대줄 데가 어디 있습니까? 적어도 몇 백대분의 자주호(자동차 이름)가 실어와야겠는데…”
군당 책임비서가 보다 못해 발언을 중단시키고, 말문을 열었다.
“동무가 말한 내용은 이 자리에 참석한 자가 그 누구든지 다 알만한 일이지 않소. 다 알고 있는 문젠데 뭘 그렇게 강조합니까? 문제는 대책인데, 동무가 자꾸 불만만 얘기하지 말고 대책을 한 번 내보라우”
“대책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비료문제는 농촌 테제대로 풀어야 합니다. 농촌을 도와주어야 하지 않습니까? 농민 자체 해결할 수 없지 않습니까? 1970년대 그 많은 유안비료가 다 어디 갔습니까? 그것을 해결하지 않고 농민들보고만 해대니 답답합니다”
참다못해 내가 일어나서 보충발언을 했다.
“동무가 말한 것이 당이나 내각이나 다 모르는 문제들이 아니라, 국가도 애로가 있기 때문에 해결 못한 것이 아닙니까? 지금 전국 전민이 150일 전투를 전개하고 있는데, 만약 모든 것이 정상적으로 풀린다면 150일 전투가 왜 필요합니까? 그것을 알면서도 당원으로서 어떻게 이렇게 얘기할 수 있습니까? 자기 위치를 알고, 이런 불평불만 담은 소리는 그만 두시오. 지금은 함께 란관을 극복해야하지 않습니까? 신심을 가다듬고, 락관적으로 미래를 쳐다보아야 2012년에 가서 강성대국의 대문을 활짝 열 수 있지 않습니까?”
대중 속에서 “옳소, 옳소”하면서 박수가 터져 나왔다. 나도 말은 이렇게 했지만, 사실 대책을 누구라서 내놓을 수 있겠는가. 다들 알면서 그냥 분위기만 띄우고 넘어가는 것이다. 그게 우리들이 지금까지 해온 방식이고, 앞으로도 큰 개변이 일어나지 않는 한 바뀌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