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선집중
김경성씨, 강연제강에 미담사례로 실려
김경성씨의 사망 소식을 들은 중앙당에서는 그의 죽음을 선전 재료로 삼았다. 강연제강에 미담사례로 미화해 전국 각지에 내려 보낸 것이다. 자료에는 김씨가 굶어죽은 것이 아니라, 그저 승객들의 안전을 위해 밤새워 철로를 수리하다가 사고로 죽었다고 했다. 집안 형편도 바뀌었다. 옥수수묵지가루 300g이 어느새 쌀 200kg으로 부풀려있었다. 앓아누워 장사를 못하게 된 그의 아내는 그저 평범한 가정주부이자 장기 환자로 둔갑했다. 그리고 김씨는 3개월 동안 집에 가지 않고 자기 근무지에서 먹고 자며 오로지 일만 열심히 한 것으로 묘사됐다. 이것이 어머니 김정숙의 고향, 회령시에서 일하는 일군들의 충심이라고 열심히 칭송했다. 그러나 이 소식을 접한 사람들은 “철도 당세포비서조차 더 이상 뜯어먹을 게 없을 정도로 나라 경제 사정이 나빠졌다”는 것에 더 놀라워했다.
굶어죽은 철도당세포비서 김경성씨는?
김경성씨는 자기 것을 챙길 줄 모르는 고지식한 성격 탓에 가정 형편이 썩 좋은 편은 아니었다. 철도는 특수단위라 배급을 얼마간이라도 받아왔지만, 본인 배급만 나왔기 때문에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지는 것은 장사를 다니는 아내의 몫이었다. 그러다 화폐교환 조치로 아내가 벌어놓은 돈이 모두 휴지조각이 되고, 장사길이 막히면서 생활이 급락해 죽으로 끼니를 연명하는 수준으로 떨어졌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아내가 앓아눕게 되면서 다시 장사를 시도할 수도 없게 됐다. 게다가 올해 들어서는 본인이 받는 배급도 줄어들어 2월부터는 끼니를 제때 챙겨먹는 날이 대폭 줄어들었다. 그나마 4월에는 하루에 옥수수묵지가루죽 한 끼로 더욱 줄고 말았다. 그래도 출근은 빠짐없이 했다.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집에 돌아가면, 죽을 끓여놓고 기다리는 아내와 아이 얼굴 보기가 미안해 자신은 늘 밖에서 얻어먹고 왔다며 죽을 먹지 않고, 아내와 자식에게 주곤 했다. 그는 그렇게 하루에 한 끼도 못 먹는 날이 점점 많아졌다. 당연하게도 그의 영양실조는 점점 심해졌다.
그러다 지난 5월 20일 밤 근무 시간에, 상수도를 둘러보다 4미터 되는 높이에서 굴러 떨어지는 사고를 당했다. 새로 기차가 들어오면 음료수를 보장해주어야 하는데, 수도 고장이 잦아 확인 차 상수도 시설을 둘러보는 중에 생긴 사고였다. 어둠 속에서 손전등도 없이 떠듬떠듬 걷다가 큰 구멍이 있는 것을 알아채고 피하려다 그만 현기증이 일어나 구멍 속으로 떨어져버린 것이다. 그동안 여러 날 굶어 몸에 기운이 없는 상태여서, 떨어진 뒤에도 혼자 일어나지 못할 정도로 몸을 가누지 못했다. 같이 근무를 서던 동료가 돌아올 시간이 지나도 오지 않는 것이 이상해 찾으러 갔다가 의식을 잃고 쓰러져있는 그를 발견했다. 사람들을 급히 불러 밧줄로 묶어 그를 끌어올린 뒤 아직 숨이 붙어있는 것을 확인하고 급히 시병원에 데려갔다. 의사는 워낙 먹은 것이 없어 그런 것이라며 점적주사를 놓았다. 별다른 타박상은 없었으나 원체 기력이 없어 끝내 숨을 거두고 말았다. 직장동료들이 장례를 치르려고 집을 찾아가 그나마 새 옷으로 갈아입히려고 했더니, 갈아입힐만한 옷이 없었다. 그 집에 먹을 것이라곤 온 집안을 탈탈 털어도 옥수수묵지가루 300g이 전부였다. 결국 역장이 자기 옷을 한 벌 골라 김씨에게 입혔다. 장례식은 21일 오전 회령역에서 치러졌다.
회령시 철도 당세포비서 아사에 주민들 충격
함경북도 회령시 철도 운전지휘부문 당세포비서 김경성(52세)씨의 아사 소식을 접한 주민들이 충격에 빠졌다. 그의 죽음이 충격적인 이유는 단순히 당원이 굶어죽었다는 데 있지 않다. 같은 직장에서 일했던 리모씨의 말처럼, “철도는 워낙 조금만 머리를 굴려도 먹을 곳이 나오는 곳인데 그런 우리들조차 지금 먹을 게 없어 어렵게 산다”는 게 보다 큰 이유였다. 일단 철도는 다소 얼마라도 국가에서 배급이 나왔고, 무엇보다 화폐 교환 조치 이전만 해도 기차를 이용하는 장사꾼들이 넘쳤기 때문에, 그들로부터 얼마간씩 찔러 받는 뇌물들로 먹고 사는 데 큰 어려움이 없었다. 시쳇말로 “기차 바퀴 하나라도 팔아서 먹고 살 수 있는” 곳이 바로 철도부문이다. 그런데 작년 말 화폐교환 조치 이후 시장 폐쇄 조치가 이어지면서 장사꾼들의 발길이 점차 줄어들더니 새해 들어와서는 그야말로 뚝 끊겼다. 장사꾼들이 사라지니 덩달아 철도일군들도 가난해졌다. 최근 몇 년 간 없었던 굶는 사람까지 생기기 시작했다. 김경성씨는 단순히 철도 노동자가 아니라, 먹을 것을 더 챙기기 쉬운 당세포비서라는 점이 사람들의 이목을 더 끌게 된 것이다. 철도 운전 세포비서가 굶어죽었다는 것은 국가의 식량사정이 얼마나 심각한 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함경북도 도당에서는 굶어죽었다는 얘기를 쏙 빼고, 그를 ‘우수당원’이며 ‘모범당원’으로 추켜세우며 중앙당에 보고를 올렸다. 아무리 가정 형편이 어려워도 개인의 사리사욕을 채우거나 탐오를 하지 않았던, ‘김정일 장군님의 충직한 일군’이 근무 중에 안타깝게 죽었다고 올린 것이다. 그러나 보고를 받은 중앙당으로부터의 반응은 지역 간부들을 당혹감에 빠뜨렸다. 예전 같으면 최소한의 배려물품이라도 내려왔을 텐데 정말 아무 것도 없었던 것이다. 그만큼 나라 사정이 어려워졌다는 반증에 놀라기도 했지만, 당의 위상이 예전만 못해졌다는 공감대가 널리 퍼지게 된 것이다. 이렇게 당세포비서의 죽음은 여러 측면에서 주민들과 간부들에게 적지 않은 파장을 일으켰다.
정전 잦은 기차, 도중식사 준비는 필수
혜산-평양 열차 사고도 그렇지만, 북한의 심각한 전력난 속에서 정전사고는 어찌 보면 불가피한 일이다. 혜산 사고의 경우, 워낙 깊은 산중이라 사고 소식이 알려지는데 시간이 오래 걸렸고 승객들도 자구책을 마련하기 어려운 상황이어서 참사가 발생한 것이지만, 평야지역에서의 정전사고는 대수롭지 않은 일이다. 2-3일이면 왕복이 가능한 곳도 최소 일주일, 길게는 열흘 넘게 걸리는 일이 보통이다. 작년까지는 이 정도로 심하지는 않았는데 올해 들어 철도전력사정이 더 악화되어 가다 서다를 반복하다보니 승객들이 도중식사를 준비하는 것은 어느새 당연한 의무 같은 것이 되어버렸다. 간이역에서 오래 정차할 때도 있지만, 혜산 열차처럼 전혀 엉뚱한 곳에 서기도 한다.
기찻길 옆에 사는 주민들은 이때가 좋은 기회다. 집에서 가마솥과 물, 땔나무를 짊어지고 나와 기차 옆에서 밥을 짓는다. 승객들에게 음식을 팔기 위해서다. 밥 한 끼에 새 돈으로 200원씩 받는데, 옥수수밥 1kg에 600원을 받는다. 어떤 이들은 세숫물과 비누, 수건 등을 팔기도 하고, 어떤 이들은 빵을 팔기도 한다. 온갖 사람들이 무엇이든 팔 것을 가지고 나와 승객들을 대상으로 흥정한다. 꽃제비들이 구걸하는 것도 빼놓을 수 없는 풍경이다. 기차로 출장을 자주 다닌다는 평성의 한 공장 일군은 “(기차 풍경이) 1999년도 때와 비슷해졌다. 기차를 새로 색칠하고, 요 몇 년간은 기차도 빨라지고 제 시간에 다니고 그랬는데, 작년 말부터 부쩍 느려지더니 지금은 옛날로 돌아간 것 같다. 철도 수송을 보장하라고 아무리 당에서 지시를 내려먹여도 전기문제가 꽉 막힌 이상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다”며, 전력난이 더 심해진 것 같다고 걱정했다.
혜산 열차 참사, 피할 수 있었다
혜산-평양 열차 사고가 일어났을 때 초기대응을 잘 했더라면, 사람이 굶어죽는 어처구니없는 참사까지는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무엇보다 긴급사고 발생 시 연락체계가 전혀 없다는 것이 가장 치명적인 문제였다. 산골에 갇혀 승객들이 꼼짝 못하고 있다는 소식이 량강도 혜산시 시당에 전해진 것은 사고 4일째 되는 날이었다. 그때는 승객들의 도중식사가 이미 다 떨어져 본격적으로 굶기 시작한 때였다. 사고가 알려진 후 늦은 대처에도 문제가 있었다. 량강도 도당에서 승객 구조 대책을 세우라는 지시를 받았음에도, 혜산시 시당은 바로 대처하지 않았다. 사고지점이 정확히 어디인지 파악하는 것도, 비상전력을 사용해 기차를 하루라도 빨리 움직이려고도 하지 않았다. 심지어 철도 기관사와 연락해보려는 시도도 한참이나 늦었다. 그들이 구조를 시작했을 때는 사고 소식이 알려진 지 이미 5일이나 지난 뒤였고, 사고 발생일로부터는 9일이 지나 있었다. 그동안에 아까운 목숨들이 허망하게 스러져갔다. 뒤늦게 구조하러 갔을 때는 여덟 구의 시신부터 치워야 했다. 그리고 남아있던 사람들은 대부분 기진맥진해 쓰러져 있었고, 혼수상태로 넘어간 사람들도 다수였다. 부랴부랴 병원으로 호송했지만, 인명피해가 이미 발생한 뒤였다. 초동대처만 잘 했어도, 인명피해는 피할 수 있는 사고였다.
이 소식을 들은 백암군과 혜산시 인근 주민들은 “철도 운영하는 걸 보면 강성대국이 아니라, 멸망대국으로 가는 길”이라고 한 목소리로 철도성과 시당을 비난했다. 일부 주민들은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나라 정치를 얼마나 잘 못 하면 이런 일이 생기겠냐”며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다. “화폐 교환하자고 제기한 역적패들 때문에 우리 같은 백성들이 얼마나 살기 어려워졌냐. 그런데도 지금까지 아무 대책이 없다. 그냥 알아서 먹고 살라고만 한다. 이러는 마당이니 그깟 기차 사고가 났다고 대책을 세울 리가 있겠냐”며 비아냥거리는 목소리도 들렸다. 화폐교환 조치 이후, 주민들은 단순 사고에도 정부에 대한 깊은 불신을 드러내고 있다.
혜산-평양 열차, 정전으로 9일 정차하는 동안 8명 굶어 죽어
철도 전력 사정이 안 좋았던 게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오가지도 못하는 심심산골에서 원인불명의 사고로 정전이 되어 기차가 갇히는 바람에 사람들이 굶어죽는 끔찍한 참사가 일어났다. 지난 3월 25일, 혜산-평양을 오가는 1열차가 백암역을 지나 민가와 멀리 떨어진 산골에서 정전으로 멈춰, 무려 9일 동안이나 꼼짝하지 못했다. 승객들은 집을 떠나올 때 준비했던 얼마 안 되는 도중식사를 기약 없이 까먹을 수밖에 없었다. 먹을 것이 다 떨어져 버린 것은 사흘도 안 돼 서였다. 그래도 기차는 움직이지 않았고, 사람들은 하염없이 주린 배를 참으며 하루하루를 버텨갔다. 승객들 중 힘 있는 사람들이 남의 것을 강탈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특히 군인들이 승객들의 도중식사를 가로채 자기들끼리 나눠먹었다. 성질 급한 사람들은 기차를 벗어나 무작정 산길을 떠나기도 했다. 멀지 않은 곳에 인가 한 채라도 발견할 수 있기를 바라며, 뭐라도 먹을 것을 찾아보겠다는 심산이었다. 산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맬까 두려웠던 사람들은 왔던 길을 되짚어 올라가기도 했다. 그렇게 몇날 며칠을 걸어 혜산시로 되돌아간 사람들도 있었다. 혹시나 기차가 움직일까 싶어 떠나지 못하던 사람들 중에, 닷새째가 지나자 정신을 잃고 쓰러지는 사람이 한 명, 두 명 생기기 시작했다. 장장 9일간 정전이 계속되는 동안, 굶주림에 지쳐 쓰러져 결국 목숨을 잃은 사람이 이렇게 8명에 달했다. 죽은 사람들 중에는 일반 승객들의 도중식사를 뺏어먹었던 군인 3명이 포함돼있었다. 드디어 기차가 움직이기 시작했을 때 각 빵통(객차)마다 남아있던 사람들은 약 20명 남짓씩에 불과했다. 나머지 사람들은 다 뿔뿔이 흩어진 뒤였다.
■ 식량소식
김경성씨, 강연제강에 미담사례로 실려
김경성씨의 사망 소식을 들은 중앙당에서는 그의 죽음을 선전 재료로 삼았다. 강연제강에 미담사례로 미화해 전국 각지에 내려 보낸 것이다. 자료에는 김씨가 굶어죽은 것이 아니라, 그저 승객들의 안전을 위해 밤새워 철로를 수리하다가 사고로 죽었다고 했다. 집안 형편도 바뀌었다. 옥수수묵지가루 300g이 어느새 쌀 200kg으로 부풀려있었다. 앓아누워 장사를 못하게 된 그의 아내는 그저 평범한 가정주부이자 장기 환자로 둔갑했다. 그리고 김씨는 3개월 동안 집에 가지 않고 자기 근무지에서 먹고 자며 오로지 일만 열심히 한 것으로 묘사됐다. 이것이 어머니 김정숙의 고향, 회령시에서 일하는 일군들의 충심이라고 열심히 칭송했다. 그러나 이 소식을 접한 사람들은 “철도 당세포비서조차 더 이상 뜯어먹을 게 없을 정도로 나라 경제 사정이 나빠졌다”는 것에 더 놀라워했다.
굶어죽은 철도당세포비서 김경성씨는?
김경성씨는 자기 것을 챙길 줄 모르는 고지식한 성격 탓에 가정 형편이 썩 좋은 편은 아니었다. 철도는 특수단위라 배급을 얼마간이라도 받아왔지만, 본인 배급만 나왔기 때문에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지는 것은 장사를 다니는 아내의 몫이었다. 그러다 화폐교환 조치로 아내가 벌어놓은 돈이 모두 휴지조각이 되고, 장사길이 막히면서 생활이 급락해 죽으로 끼니를 연명하는 수준으로 떨어졌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아내가 앓아눕게 되면서 다시 장사를 시도할 수도 없게 됐다. 게다가 올해 들어서는 본인이 받는 배급도 줄어들어 2월부터는 끼니를 제때 챙겨먹는 날이 대폭 줄어들었다. 그나마 4월에는 하루에 옥수수묵지가루죽 한 끼로 더욱 줄고 말았다. 그래도 출근은 빠짐없이 했다.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집에 돌아가면, 죽을 끓여놓고 기다리는 아내와 아이 얼굴 보기가 미안해 자신은 늘 밖에서 얻어먹고 왔다며 죽을 먹지 않고, 아내와 자식에게 주곤 했다. 그는 그렇게 하루에 한 끼도 못 먹는 날이 점점 많아졌다. 당연하게도 그의 영양실조는 점점 심해졌다.
그러다 지난 5월 20일 밤 근무 시간에, 상수도를 둘러보다 4미터 되는 높이에서 굴러 떨어지는 사고를 당했다. 새로 기차가 들어오면 음료수를 보장해주어야 하는데, 수도 고장이 잦아 확인 차 상수도 시설을 둘러보는 중에 생긴 사고였다. 어둠 속에서 손전등도 없이 떠듬떠듬 걷다가 큰 구멍이 있는 것을 알아채고 피하려다 그만 현기증이 일어나 구멍 속으로 떨어져버린 것이다. 그동안 여러 날 굶어 몸에 기운이 없는 상태여서, 떨어진 뒤에도 혼자 일어나지 못할 정도로 몸을 가누지 못했다. 같이 근무를 서던 동료가 돌아올 시간이 지나도 오지 않는 것이 이상해 찾으러 갔다가 의식을 잃고 쓰러져있는 그를 발견했다. 사람들을 급히 불러 밧줄로 묶어 그를 끌어올린 뒤 아직 숨이 붙어있는 것을 확인하고 급히 시병원에 데려갔다. 의사는 워낙 먹은 것이 없어 그런 것이라며 점적주사를 놓았다. 별다른 타박상은 없었으나 원체 기력이 없어 끝내 숨을 거두고 말았다. 직장동료들이 장례를 치르려고 집을 찾아가 그나마 새 옷으로 갈아입히려고 했더니, 갈아입힐만한 옷이 없었다. 그 집에 먹을 것이라곤 온 집안을 탈탈 털어도 옥수수묵지가루 300g이 전부였다. 결국 역장이 자기 옷을 한 벌 골라 김씨에게 입혔다. 장례식은 21일 오전 회령역에서 치러졌다.
회령시 철도 당세포비서 아사에 주민들 충격
함경북도 회령시 철도 운전지휘부문 당세포비서 김경성(52세)씨의 아사 소식을 접한 주민들이 충격에 빠졌다. 그의 죽음이 충격적인 이유는 단순히 당원이 굶어죽었다는 데 있지 않다. 같은 직장에서 일했던 리모씨의 말처럼, “철도는 워낙 조금만 머리를 굴려도 먹을 곳이 나오는 곳인데 그런 우리들조차 지금 먹을 게 없어 어렵게 산다”는 게 보다 큰 이유였다. 일단 철도는 다소 얼마라도 국가에서 배급이 나왔고, 무엇보다 화폐 교환 조치 이전만 해도 기차를 이용하는 장사꾼들이 넘쳤기 때문에, 그들로부터 얼마간씩 찔러 받는 뇌물들로 먹고 사는 데 큰 어려움이 없었다. 시쳇말로 “기차 바퀴 하나라도 팔아서 먹고 살 수 있는” 곳이 바로 철도부문이다. 그런데 작년 말 화폐교환 조치 이후 시장 폐쇄 조치가 이어지면서 장사꾼들의 발길이 점차 줄어들더니 새해 들어와서는 그야말로 뚝 끊겼다. 장사꾼들이 사라지니 덩달아 철도일군들도 가난해졌다. 최근 몇 년 간 없었던 굶는 사람까지 생기기 시작했다. 김경성씨는 단순히 철도 노동자가 아니라, 먹을 것을 더 챙기기 쉬운 당세포비서라는 점이 사람들의 이목을 더 끌게 된 것이다. 철도 운전 세포비서가 굶어죽었다는 것은 국가의 식량사정이 얼마나 심각한 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함경북도 도당에서는 굶어죽었다는 얘기를 쏙 빼고, 그를 ‘우수당원’이며 ‘모범당원’으로 추켜세우며 중앙당에 보고를 올렸다. 아무리 가정 형편이 어려워도 개인의 사리사욕을 채우거나 탐오를 하지 않았던, ‘김정일 장군님의 충직한 일군’이 근무 중에 안타깝게 죽었다고 올린 것이다. 그러나 보고를 받은 중앙당으로부터의 반응은 지역 간부들을 당혹감에 빠뜨렸다. 예전 같으면 최소한의 배려물품이라도 내려왔을 텐데 정말 아무 것도 없었던 것이다. 그만큼 나라 사정이 어려워졌다는 반증에 놀라기도 했지만, 당의 위상이 예전만 못해졌다는 공감대가 널리 퍼지게 된 것이다. 이렇게 당세포비서의 죽음은 여러 측면에서 주민들과 간부들에게 적지 않은 파장을 일으켰다.
■ 사건사고
정전 잦은 기차, 도중식사 준비는 필수
혜산-평양 열차 사고도 그렇지만, 북한의 심각한 전력난 속에서 정전사고는 어찌 보면 불가피한 일이다. 혜산 사고의 경우, 워낙 깊은 산중이라 사고 소식이 알려지는데 시간이 오래 걸렸고 승객들도 자구책을 마련하기 어려운 상황이어서 참사가 발생한 것이지만, 평야지역에서의 정전사고는 대수롭지 않은 일이다. 2-3일이면 왕복이 가능한 곳도 최소 일주일, 길게는 열흘 넘게 걸리는 일이 보통이다. 작년까지는 이 정도로 심하지는 않았는데 올해 들어 철도전력사정이 더 악화되어 가다 서다를 반복하다보니 승객들이 도중식사를 준비하는 것은 어느새 당연한 의무 같은 것이 되어버렸다. 간이역에서 오래 정차할 때도 있지만, 혜산 열차처럼 전혀 엉뚱한 곳에 서기도 한다.
기찻길 옆에 사는 주민들은 이때가 좋은 기회다. 집에서 가마솥과 물, 땔나무를 짊어지고 나와 기차 옆에서 밥을 짓는다. 승객들에게 음식을 팔기 위해서다. 밥 한 끼에 새 돈으로 200원씩 받는데, 옥수수밥 1kg에 600원을 받는다. 어떤 이들은 세숫물과 비누, 수건 등을 팔기도 하고, 어떤 이들은 빵을 팔기도 한다. 온갖 사람들이 무엇이든 팔 것을 가지고 나와 승객들을 대상으로 흥정한다. 꽃제비들이 구걸하는 것도 빼놓을 수 없는 풍경이다. 기차로 출장을 자주 다닌다는 평성의 한 공장 일군은 “(기차 풍경이) 1999년도 때와 비슷해졌다. 기차를 새로 색칠하고, 요 몇 년간은 기차도 빨라지고 제 시간에 다니고 그랬는데, 작년 말부터 부쩍 느려지더니 지금은 옛날로 돌아간 것 같다. 철도 수송을 보장하라고 아무리 당에서 지시를 내려먹여도 전기문제가 꽉 막힌 이상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다”며, 전력난이 더 심해진 것 같다고 걱정했다.
혜산 열차 참사, 피할 수 있었다
혜산-평양 열차 사고가 일어났을 때 초기대응을 잘 했더라면, 사람이 굶어죽는 어처구니없는 참사까지는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무엇보다 긴급사고 발생 시 연락체계가 전혀 없다는 것이 가장 치명적인 문제였다. 산골에 갇혀 승객들이 꼼짝 못하고 있다는 소식이 량강도 혜산시 시당에 전해진 것은 사고 4일째 되는 날이었다. 그때는 승객들의 도중식사가 이미 다 떨어져 본격적으로 굶기 시작한 때였다. 사고가 알려진 후 늦은 대처에도 문제가 있었다. 량강도 도당에서 승객 구조 대책을 세우라는 지시를 받았음에도, 혜산시 시당은 바로 대처하지 않았다. 사고지점이 정확히 어디인지 파악하는 것도, 비상전력을 사용해 기차를 하루라도 빨리 움직이려고도 하지 않았다. 심지어 철도 기관사와 연락해보려는 시도도 한참이나 늦었다. 그들이 구조를 시작했을 때는 사고 소식이 알려진 지 이미 5일이나 지난 뒤였고, 사고 발생일로부터는 9일이 지나 있었다. 그동안에 아까운 목숨들이 허망하게 스러져갔다. 뒤늦게 구조하러 갔을 때는 여덟 구의 시신부터 치워야 했다. 그리고 남아있던 사람들은 대부분 기진맥진해 쓰러져 있었고, 혼수상태로 넘어간 사람들도 다수였다. 부랴부랴 병원으로 호송했지만, 인명피해가 이미 발생한 뒤였다. 초동대처만 잘 했어도, 인명피해는 피할 수 있는 사고였다.
이 소식을 들은 백암군과 혜산시 인근 주민들은 “철도 운영하는 걸 보면 강성대국이 아니라, 멸망대국으로 가는 길”이라고 한 목소리로 철도성과 시당을 비난했다. 일부 주민들은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나라 정치를 얼마나 잘 못 하면 이런 일이 생기겠냐”며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다. “화폐 교환하자고 제기한 역적패들 때문에 우리 같은 백성들이 얼마나 살기 어려워졌냐. 그런데도 지금까지 아무 대책이 없다. 그냥 알아서 먹고 살라고만 한다. 이러는 마당이니 그깟 기차 사고가 났다고 대책을 세울 리가 있겠냐”며 비아냥거리는 목소리도 들렸다. 화폐교환 조치 이후, 주민들은 단순 사고에도 정부에 대한 깊은 불신을 드러내고 있다.
혜산-평양 열차, 정전으로 9일 정차하는 동안 8명 굶어 죽어
철도 전력 사정이 안 좋았던 게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오가지도 못하는 심심산골에서 원인불명의 사고로 정전이 되어 기차가 갇히는 바람에 사람들이 굶어죽는 끔찍한 참사가 일어났다. 지난 3월 25일, 혜산-평양을 오가는 1열차가 백암역을 지나 민가와 멀리 떨어진 산골에서 정전으로 멈춰, 무려 9일 동안이나 꼼짝하지 못했다. 승객들은 집을 떠나올 때 준비했던 얼마 안 되는 도중식사를 기약 없이 까먹을 수밖에 없었다. 먹을 것이 다 떨어져 버린 것은 사흘도 안 돼 서였다. 그래도 기차는 움직이지 않았고, 사람들은 하염없이 주린 배를 참으며 하루하루를 버텨갔다. 승객들 중 힘 있는 사람들이 남의 것을 강탈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특히 군인들이 승객들의 도중식사를 가로채 자기들끼리 나눠먹었다. 성질 급한 사람들은 기차를 벗어나 무작정 산길을 떠나기도 했다. 멀지 않은 곳에 인가 한 채라도 발견할 수 있기를 바라며, 뭐라도 먹을 것을 찾아보겠다는 심산이었다. 산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맬까 두려웠던 사람들은 왔던 길을 되짚어 올라가기도 했다. 그렇게 몇날 며칠을 걸어 혜산시로 되돌아간 사람들도 있었다. 혹시나 기차가 움직일까 싶어 떠나지 못하던 사람들 중에, 닷새째가 지나자 정신을 잃고 쓰러지는 사람이 한 명, 두 명 생기기 시작했다. 장장 9일간 정전이 계속되는 동안, 굶주림에 지쳐 쓰러져 결국 목숨을 잃은 사람이 이렇게 8명에 달했다. 죽은 사람들 중에는 일반 승객들의 도중식사를 뺏어먹었던 군인 3명이 포함돼있었다. 드디어 기차가 움직이기 시작했을 때 각 빵통(객차)마다 남아있던 사람들은 약 20명 남짓씩에 불과했다. 나머지 사람들은 다 뿔뿔이 흩어진 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