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치생활
평양 간부, “붕괴? 말도 안 되는 소리”
평양의 주요 단위의 한 일군에게 “조선이 붕괴할 것이라고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다. 어떻게 생각하는가?”라고 물었다. 그는 붕괴라는 말에 대해 펄쩍 뛰며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는 입에 담지도 말라고 했다. 평소 북한 정부의 정책에 비판적인 태도를 보였던 그였지만, ‘붕괴’라는 단어는 입에 올리기 싫은 말인 것 같았다. 그에게 속내를 물었다. 그는 중층간부들의 생각이라고 일반화시켜 얘기했지만, 다음은 어디까지나 그 개인의 생각임을 밝혀둔다. 다음은 그의 이야기이다.
“우리 공화국은 고난의 행군 때 수백만 명이 죽었는데도 무너지지 않았다. 그때처럼 다시 200-300만 명 명 이상의 인구가 죽더라도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설령 무너진다고 해도 그것은 50년, 100년 후의 일이다. 지금 아무리 어려워도 무너지지는 않는다. 중층간부들의 명줄이 위(지도부)와 연결돼 있기 때문이다. 또 우리가 무너지는 것을 중국이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 정부가 중국과 전면적으로 손을 잡는 것이다. 다만 새 지도부에 대한 신뢰가 관건이다. 김정은 군사부위원장이 식량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갈 지 주시하고 있다. 앞으로 3-5년이 고비다. 예전에는 중층간부들이 무역을 해서 돈을 벌거나 물건을 국내에 들여보냈지만 지금은 중국과 손을 잡아도 중층간부들이 섣불리 움직이려고 하지 않는다. 아직은 새 지도부에 대해 전적으로 신뢰를 하지 않는다는 거다. 예전에도 중간 간부들이 열심히 돈을 벌어 좀 살게 됐다 싶으면 총살하고 없애 버렸다.
무역하는 사람들이 예전 같지가 않다. 무역업자들이 1만 달라, 2만 달라가 없는 게 말이 되나. 그런데 지금은 아무리 내라고 해도 잘 안 낸다. 군량미 할당으로 중국 돈 5천 위안 내라고 하면 딱 그만큼만 낸다. 더 내려고 하지도 않고, 쉽게 낸다는 인상도 안 주려고 한다. 있는 돈 내면서도 여기저기서 빌려서 낸 것처럼 꾸민다. 무역 일을 하면서 열심히 충성심을 보이고, 과제 달성을 해도 앞에서만 칭찬하고는 곧 뒤에 가서 반드시 칼을 빼들던 걸 죽 지켜봐왔기 때문이다. 외화를 벌어들이면 빨아내고, 그 다음에는 쳐내는 게 반복되다보니 자연히 충성심이 없어졌다. 그동안 희천발전소 건설비용이다 평양 살림집 건설비용이다 중간간부들과 무역일군들이 다 해결해왔다. 현재 수준의 군량미 부족이나 평양시 배급 문제도 똑같다. 능히 해외 대표부들의 능력이나 자기들의 재정 수준으로 해결할 수 있는 정도이다. 그러나 더 이상 자신들을 희생하면서 국가정책에 나서서 돕지는 않는다. 지도부에 대한 불신이다. 그러니 국가가 직접 나서서 군량미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될 사태까지 벌어지게 된 것이다.
박남기 계획재정부장만 해도 그렇다. 재정부장이라는 게 무역상들의 선생인데, 위에서 시키는 대로 했다가 억울하게 죽은 것 아니냐. 돈을 벌어서 내면 결국 자기들이 다치니까 나서지 않는 거다. 새로운 지도부가 먹는 문제를 해결하려면 이 사람들의 애국심이 필요한데,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한다면 절대 움직일 수 없을 것이다. 이미 너무 많은 피를 봐서 아무도 나서지 않을 것이다. 그걸 두고 비사회주의다 뭐다 개인 욕만 하고 단속만 강화하는 것은 지도부에서 문제를 해결할 의지가 없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새 지도부에서는 먹고 사는 정책을 체계적으로 세워야 한다. 장군님께서 계속 하시든 새 지도부로 완전히 바뀌든지, 중국에 완전히 엎어져서 광산 다 팔고, 땅 팔고 항구 팔고 해서 3년 정도 먹고 사는 문제는 해결될 것 같다. 중국은 “니가 한 발짝 와야 나도 한 발짝 가겠다”는 식이라서 지금은 우리 심장을 꺼내 마음을 보이는 수준으로까지 나서려고 하고 있다.
중층 간부들은 자신들뿐만 아니라 후손들이 안전하게 먹고 살 수 있으려면 어떤 변화든 환영한다. 그 변화가 중국으로 가는 것이든 미국으로 가는 것이든 상관없다. 다만 남조선은 아니다. 남조선으로 가면 (자신들의) 안전이 보장 되지 않는다. 현재는 중국을 선택했으니 그렇게 가는 거다. 중앙당이 선택한 것을 따라가면 자신들에게는 아무 문제가 없다. 통일은 공화국이 제일 목 터져 부르지만 지금 상태에서 통일 같은 건 바라지 않는다. 우리에겐 당장 3-5년이 문제고, 안보와 먹는 문제 해결이 급선무다. 남조선은 미국으로 가는 징검다리일 뿐 우리에게 큰 대상이 되지 못한다.”
중앙당 간부, 식량난 실태 인터뷰
중앙당 간부에게 현 식량난 실태에 대해 몇 가지 물었다. 다음은 인터뷰 내용을 간추려 실은 것이다.
질문: 현재 식량 상황에 대해 말해 달라.
답변: 식량난은 몇 년 중에 올해가 최악이다. 고난의 행군시기보다 어렵다. 작년 평양에서 열린 당대표자회 후부터 올해 2월 16일 명절 전까지 전체 배급량을 다 합쳐도 1개월 분량이 안 된다. 2008년에는 봄부터 죽었다면, 지금은 1월에 얼어 죽는 것으로 시작했다. 잘 사는 사람들의 집에서도 얼어 죽었으니 가난한 사람들의 집에서는 어떻겠는가. 작년 여름부터 보안서, 보위부 등 법 기관 사람들의 가족 배급이 다 끊겼다. 당사자한테만 겨우 배급이 나왔다. 량강도나 자강도, 함북도 어디를 봐도 다 마찬가지였다. 작년 여름부터 배급을 주지 않으니 그 가족들 중에 도강자가 생길 정도였다. (강제 송환돼 온) 여자들 심문한 걸 보면, 오빠가 보안서에 일한다거나 세대주가 보위부원인 경우들도 많았다.
질문: 잘 사는 사람들도 얼어 죽었다니 이해가 잘 안 된다.
답변: 실례를 들겠다. 올해 해외대표부 사람들이 유독 평양에 많이 왔다 갔다. 다들 부모들의 장례를 치러야 한다는 이유였다. 그 집 부모들이 왜 죽었나 하고 보니 얼어 죽었다. 아파트 층집에 사는 로친들이 오르락내리락 하기 어려우니까 난방도 안 되는 집에서 떨다가 죽은 것이다. 1월부터 2월 3일까지 이런 사람들 부모들도 배급을 하루도 못 받았다. 그러나 해외에 있는 자식들이 돈을 보내주니까 식량은 있었다. 집에 입쌀과 밀가루는 있어서 먹을 것이 모자라지는 않았다. 자식들이 해외에서 전기장판을 사서 보낸다고 해도 전기가 들어오지 않으니 소용이 없다. 내가 아는 사람도 자기가 들어와 보니 하루에 전기가 2시간도 안 오는 걸 보고 자기 어머니가 동사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하더라. 먹고 산다는 집에서 이 정도니, 먹을 것도 없는 집들은 더 말해서 무엇 하겠는가.
질문: 식량난이 이렇게 심한 이유는 무엇인가?
답변: 2007년도, 2008년도, 2009년도 차례차례 누적된 결과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화폐개혁까지 맞아 그 여파에서 벗어나지 못해 더 심해진 것이다. 황해북도부터 함경북도까지 모두 어렵지만 특히 어려운 곳이 함남, 강원도, 황해도이다. 평안남도도 괜찮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뚜껑을 열어보니 농사를 싹 망쳤다. 가을(걷이) 끝나고 거둔 것이 별로 없었다. 우리들끼리 하는 얘기가 있다. 1990년대가 ‘고난의 행군’이었다면, 2006년부터 시작해 2007년과 2008년 최고로 바빴을 때를 ‘고난의 강행군’, 지금은 ‘고난의 초강행군’이라고 말이다.
질문: 결국 수해 때문인가?
답변: 작년에 큰물피해가 심하긴 했다. 인명피해는 별로 없었지만 물자 피해가 심했다. 하지만 그게 다는 아니다. 아까도 말했지만 2007년 수해, 2008년 수해, 그리고 2009년 화폐개혁으로 몇 년 간 몰린 끝에 지금 사정이 더 나빠진 것이다. 그 중에서도 사람들 주머니를 다 털어버린 화폐 개혁 영향이 컸다고 본다. 작년 1월에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나. 그때는 식량이 부족해서 죽은 게 아니고, 시장에 쌀이 풀리지도 않고 시장에 나와도 살 돈이 없어서 죽은 거였다. 이런 누적된 상황에서 작년 수해가 가중된 것이라고 보면 된다. 특히 황해남북도 군량미 기지에서 피해가 심했다. 거기다 대고 군량미를 걷을 것 같지 못하니까 민심도 얻고 당 신임도 얻으려고 군량미를 안 걷겠다고 한 것이다. 농민들이야 만세 불렀지만 중국에서 해결하려던 게 잘 안 됐다. 중국에서 한 번에 많이 주는 것이 아니고, 찔끔찔끔 주다보니 군부 식량위기를 자초한 것이나 마찬가지가 됐다.
질문: 그러면 군대 식량상황은 어느 정도인가?
답변: 지금은 군대들이 먹을 게 없는 상황이다. 온 조선이 굶는 게 작년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이때까지 늘 심각했다. 다른 점이라면 지금은 군대들도 먹을 게 없는 상황이라는 것이다. 당대표자회가 끝나고 새로운 외교 정책을 펴면서 군량미 정도는 해결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아까도 말했지만, 그래서 군량미를 안 걷겠다고 하면서 백성들의 어려움도 살펴주고 김정은 군사부위원장의 체면도 살릴 수 있겠거니 했다. 작년에는 수확량이 얼마 안 되니까 그냥 바로 농민들에게 분배한 것이다. 농민들은 6개월 이상 식량을 분배받았다. 그런데 군량미가 해결이 잘 안 되니까 올해 1월부터 전국적으로 다시 군량미를 거두기 시작한 거다. 적게는 2-3개월, 많게는 4-5개 월치를 군량미로 뺏어갔다. 그래도 지금가지는 농민들은 살만했다. 적든 어떻든 식량을 갖고 있으니까. 하지만 앞으로가 문제다. 이제 농민까지 굶기 시작하니까. 지금은 군량미는 어느 정도 해결됐다고 본다. 배불리 먹고 할 정도는 아니지만 해외에서 들어온 양이면 해결됐다고 할 수 있다. 2월 16일 명절 때까지 꾸준히 식량이 들어왔다. 입쌀은 무역 형식으로 많이 들어왔고, 옥수수, 밀가루 등 곡물들이 주로 들어왔다. 주로 중국에서 들어왔다. 정부에서 정식으로 돈을 주고 사들인 것도 있고, 해외에서 무역대표부들이나 일군들이 보낸 것도 있다. 60% 이상이 옥수수이고 나머지는 쌀과 밀가루 등이다. 이 정도면 군량미는 만족스럽지는 않아도 어느 정도 해결된 거라고 볼 수 있다. 문제는 주민들에 대한 대책이 아직 아무 것도 없다는 점이다.
질문: 밖에서는 주민들이 불만이 높아지면 소요사태를 일으키지 않겠느냐 보고 있다.
답변: 중국으로 도망치는 사람이 한 둘 더 생길 수는 있어도 옛날처럼 많이 넘어가지는 않을 것이다. 또 집단으로 보안서나 관공서들을 습격하는 일들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밖에서 말들이 많지만 우리 보기에 내부는 상당히 안정되어 있다. 우리 안에서는 백성들이 간부들 욕도 하고, 단속하는 보안원들하고 싸움이 붙기도 하고 그렇지만, 식구들끼리 싸우는 것과 똑같다. 제 식구들끼리 다투다가도 다른 집에서 손가락질하고 욕하고, 빨리 망하라고 저주하면 누구랑 싸우겠나. 제 식솔들끼리 싸우겠나, 제 집을 욕하는 상대와 싸우겠나. 우리 조선을 너무 헐하게 보면 안 된다. 백성들이 오랜 식량난과 경제난으로 생활이 피폐해지고, 불만이 높아진 것은 사실이지만, 바깥에서 생각하는 그런 식은 아니다.
남조선하고 관계가 나빠지면 질수록 통제는 오히려 심해진다. 남조선과 관계가 좋았을 때는 오히려 이동도 자유롭고 비법장사라고 해도 장사를 요령껏 잘 했는데, 지금은 근본 통제가 심하고 돌아다니지를 못하니 떠도는 소문도 예전보다 늦고 소식들도 잘 알려지지 않는다. 시장도 예전만큼 활발하지 않으니, 다른 지방 소식도 잘 모른다. 후계자가 새로 올라서면서 통제가 더 심해진 것도 있지만 남조선에서 하도 이상한 소식들을 내다나니 단속이 부쩍 심해졌다.
질문: 백성들은 당장 생존의 문제가 아니라면 관심을 안 갖는다고 해도, 중간간부들의 불만도 상당히 높아졌다고 들었다.
답변: 그건 사실이다. 그동안 배급을 꼬박꼬박 받던 간부들도 작년부터 가족 배급이 싹 끊기다나니 간부들도 불안해졌다. 사상이 변질된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도 밖에서 보는 것과는 다르다. 다 자기가 잘 먹고 잘 살기 위해 비사회주의 일들을 한다는 점에서 사상이 변질됐다고 볼 수 있지만, 조국에 대한 충성심을 완전히 버린다는 건 말도 안 된다. 중간간부들이 나라에서 애국을 강조하고 모범을 보이라고 아무리 강조해도, 미국과 손을 잡든 중국과 손을 잡든 자주권이든 주체성이든 상관없다는 식으로 어떻게 하면 자기와 자기 가족, 그리고 자기 단위에서 먹고 살까를 우선해 고민하고 있기는 하다. 자기 이익이 없으면 움직이지를 않는다. 애국심이 약해진 거다. 그렇다고 조국을 버리지는 않는다. 자기 살 궁리만 하고 충성심이 없어진 것을 사상 변질이라고 보는 것이지, 조국을 버릴 정도로 반역자들이 됐다는 게 아니다. 전혀 다른 문제다.
질문: 앞으로의 전망을 어떻게 보는가?
답변: 지금은 당 간부 외에는 수도 평양까지 배급이 끊긴 상태다. 2008년에는 농민들이 많이 죽었지만, 지금은 직장 노동자들이 사는 게 험악하다. 화폐 개혁 전만 해도 도시 노동자들은 장사로 먹고 살 수 있었다. 하지만 화폐개혁으로 돈을 다 버리게 되고 나서 먹고 사는 게 힘들어졌다. 외화를 갖고 있던 사람들이야 타격을 안 받아서 지금도 잘 쓰고 잘 살지만, 내화를 갖고 있던 사람들은 다 망했다. 다시 회복하기에는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동안에 도시 노동자들, 특히 부업거리를 못 찾은 노동자들이 많이 힘들어질 것이다. 우리들이 보기에는 고난의 행군 때와 비슷하다. 그 때도 도시에서 먼저 굶어죽었다. 물론 그 때 경험한 게 있기 때문에 헐하게(쉽게) 죽지는 않겠지만, 이렇게 가다가는 4-6월 춘궁기에 또 많은 희생이 생기지 않겠느냐 생각한다. 우리 정부에서는 그러기 전에 중국과 담판을 지어 설비투자를 받고, 식량문제를 해결하려고 할 것이다.
■ 식량소식
순천 영예군인들도 아사
평안남도 순천시 일용품공장에서 지난 1월 기간 동안 사망자는 7명인데, 그 가운데 3명은 먹을 게 없어 열흘 이상 출근을 하지 못하다가 굶어 죽었다. 모두 군복무 기간 동안 몸을 다쳐 장애를 입은 영예군인들이었다. 식량 사정이 좋지 않다보니 영예군인이라고 해서 특별 공급이 나오지는 않았다. 온전하지 못한 몸으로 변변하게 장사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다른 활동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어서 배급이 없으면 가장 막막한 처지의 사람들이기도 하다. ‘영예군인’이라는 칭호를 주었달 뿐, 일용품공장에 배치한 뒤 특별한 당의 배려가 없어 굶어죽는 상황이 발생하고 있다.
수북동에 사는 김현철(가명)씨는 아내가 시장에서 중국산 잡화를 넘겨 파는 소매 장사로 겨우 입에 풀칠하고 산다고 했다. 김씨는 10년 전에 탄광에서 군복무를 하다가 왼쪽 다리를 크게 다쳐 영예군인 판정을 받았다. 영예군인이 된 처음 몇 해는 그래도 당의 배려로 본인 앞으로 얼마간 식량이 나왔는데, 일용품공장에 배치된 뒤에는 공장이 잘 안 돌아가다 보니 가뭄의 콩 나듯이 어쩌다 한 번 배급이 나오고 계속 감감무소식이었다. 남편의 월급과 배급이 없다보니, 아내가 지금까지 가장의 짊을 떠 안을 수밖에 없었다. 제법 돈벌이가 잘 되던 때도 있었지만, 화폐개혁으로 돈을 다 날린 뒤로는 회복이 안 돼 끙끙대고 있다. 하루 종일 시장에서 잡화를 팔아봐야 하루 1,800원-2,000원 벌이밖에 안 된다. 입쌀 1kg도 사먹지 못할 돈이다. 그러니 쌀 사먹을 엄두는 도저히 못 내고, 겨우 옥수수나 옥수수국수를 사먹는다. 올해 소학교 3학년과 4학년인 아이들의 학교에서는 나무와 석탄 값을 내라고 독촉하고, 인민반에서는 하루가 멀다 하고 찾아와 퇴비를 내라고 성화여서 정신을 못 차릴 지경이다. 김씨는 “영예군인이니 배려를 더 해달라고 말할 염치는 없다. 나라가 전반적으로 다 어려운데, 특별히 나만 더 생각해달라고 하면 그건 욕심이다. 하지만 뭐 내라고만 좀 안 해도 좋겠다. 여기저기서 걷어가는 것이 많아 안해가 번 하루 수입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다. 장사 밑돈이 계속 줄어들어 앞으로 어떻게 먹고 살지 모르겠다. 이대로 가다가는 올해 4월이 되기 전에 장사 밑천을 모두 말아먹을 것 같아 걱정이다. 우리가 굶어죽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면, 그냥 내버려두었으면 좋겠다. 안 그러면 이미 죽은 사람들 뒤를 우리도 따라갈 수밖에 없다”며 사회 과제의 부담을 호소했다. 그러면서 자신은 아내를 잘 만난 덕분에 아내의 힘으로 지금껏 살아왔지만, 역시 영예군인들인 다른 직장 동료들 중에 아내가 없거나 변변한 부업거리를 찾지 못한 집에서는 꼼짝없이 굶어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며 안타까워했다.
■ 사회
청진에서 제일 못 사는 ‘부윤노동자구’
함경북도 청진 부윤노동자구 사람들은 스스로를 “청진에서 제일 못 살고 한심한 곳”에 산다고 말한다. 부윤구역은 지대가 높고 땅이 메말라 농사가 잘 안 되는 지역이다. 겨우 소토지 농사를 한다는 게 감자이고, 기장이나 두부콩, 간혹 짓는 옥수수 농사가 전부이다. 돌밭에서 캐낸 감자알이라야 굵지도 않지만, 그래도 감자가 제일 많이 나서 주식처럼 먹는다. 특별히 시장에 내다팔만한 게 생산되는 지역도 아니고, 도시 사람들처럼 남다르게 장사 수완이 뛰어난 사람들이 있는 것도 아니라 다들 가난하게 살아간다. 겨우 장사를 할 줄 안다는 집들에서는 거위, 닭, 오리 등 가축을 키워 시장에 파는 정도이다. 생계가 곤란한 집들이 많다보니, 먹는 것도 변변찮다. 몰래 술을 만들어 파는 집에 가서 술을 빚고 남은 술깡치나 두부 찌꺼기를 얻어다 겨우 입에 풀칠할 정도이다. 공장에 다니는 사람들이라고 더 나은 것도 아니다. 작년부터 해를 넘겨서까지 한 푼도 못 받고, 1kg 배급도 못 받아본 직장이 수두룩하다. 올해 1월에 부윤구역 사망자들 중에 굶어죽은 사람은 노인이 7명, 노동자가 5명이었다. 그 외 자연사나 병사한 사람들도 있지만, 대부분 여러 날 굶다가 죽은 사람들이었다. 부윤1동에 사는 정태산(가명)씨는 2월 16일 명절에도 아무 배급 없이 지나가자 더 이상 쌀독에서 긁어낼 알곡이 없어 아직 스무살도 안 된 딸들을 불러 앉히고는 도강하라고 권했다. “이 땅에 살려고 아무리 발버둥치고 애써도 굶어죽는 길 밖에 없는 것 같다.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을 바에는 한 번이라도 배불리 실컷 먹고 죽는 게 낫지 않겠느냐. 너희라도 건너가서 어떻게든 살아 남으라”는 것이 그의 눈물겨운 부정(父情)이었다. 정씨의 딸들은 아버지가 눈물 흘리며 하는 간곡한 청에도 차마 도강하지 못했다. 도강도 능력이 있는 집들이나 해보는 것이지, 정씨네처럼 아무 것도 없는 집들에서는 그냥 풍문처럼 “중국에 가면 개들도 이밥 먹고 산다”는 말을 듣고 그런 세상이 과연 있는가 하며 꿈을 꿀 뿐이다. 그만큼 부윤구역은 도강마저 시도해 볼 수 없는 가난한 이들이 모여 사는 곳이다. “현재 어려움은 작년까지의 어려움과 다르다. 사람을 말려 죽일 지경이다. 언제 죽을지 그저 기다리는 기분”이라며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주민들도 있다. 부윤구역 주민들의 고단한 생활은 하루하루 가까스로 연장되고 있는 듯 했다.
■ 시선집중
평양 간부, “붕괴? 말도 안 되는 소리”
평양의 주요 단위의 한 일군에게 “조선이 붕괴할 것이라고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다. 어떻게 생각하는가?”라고 물었다. 그는 붕괴라는 말에 대해 펄쩍 뛰며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는 입에 담지도 말라고 했다. 평소 북한 정부의 정책에 비판적인 태도를 보였던 그였지만, ‘붕괴’라는 단어는 입에 올리기 싫은 말인 것 같았다. 그에게 속내를 물었다. 그는 중층간부들의 생각이라고 일반화시켜 얘기했지만, 다음은 어디까지나 그 개인의 생각임을 밝혀둔다. 다음은 그의 이야기이다.
“우리 공화국은 고난의 행군 때 수백만 명이 죽었는데도 무너지지 않았다. 그때처럼 다시 200-300만 명 명 이상의 인구가 죽더라도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설령 무너진다고 해도 그것은 50년, 100년 후의 일이다. 지금 아무리 어려워도 무너지지는 않는다. 중층간부들의 명줄이 위(지도부)와 연결돼 있기 때문이다. 또 우리가 무너지는 것을 중국이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 정부가 중국과 전면적으로 손을 잡는 것이다. 다만 새 지도부에 대한 신뢰가 관건이다. 김정은 군사부위원장이 식량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갈 지 주시하고 있다. 앞으로 3-5년이 고비다. 예전에는 중층간부들이 무역을 해서 돈을 벌거나 물건을 국내에 들여보냈지만 지금은 중국과 손을 잡아도 중층간부들이 섣불리 움직이려고 하지 않는다. 아직은 새 지도부에 대해 전적으로 신뢰를 하지 않는다는 거다. 예전에도 중간 간부들이 열심히 돈을 벌어 좀 살게 됐다 싶으면 총살하고 없애 버렸다.
무역하는 사람들이 예전 같지가 않다. 무역업자들이 1만 달라, 2만 달라가 없는 게 말이 되나. 그런데 지금은 아무리 내라고 해도 잘 안 낸다. 군량미 할당으로 중국 돈 5천 위안 내라고 하면 딱 그만큼만 낸다. 더 내려고 하지도 않고, 쉽게 낸다는 인상도 안 주려고 한다. 있는 돈 내면서도 여기저기서 빌려서 낸 것처럼 꾸민다. 무역 일을 하면서 열심히 충성심을 보이고, 과제 달성을 해도 앞에서만 칭찬하고는 곧 뒤에 가서 반드시 칼을 빼들던 걸 죽 지켜봐왔기 때문이다. 외화를 벌어들이면 빨아내고, 그 다음에는 쳐내는 게 반복되다보니 자연히 충성심이 없어졌다. 그동안 희천발전소 건설비용이다 평양 살림집 건설비용이다 중간간부들과 무역일군들이 다 해결해왔다. 현재 수준의 군량미 부족이나 평양시 배급 문제도 똑같다. 능히 해외 대표부들의 능력이나 자기들의 재정 수준으로 해결할 수 있는 정도이다. 그러나 더 이상 자신들을 희생하면서 국가정책에 나서서 돕지는 않는다. 지도부에 대한 불신이다. 그러니 국가가 직접 나서서 군량미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될 사태까지 벌어지게 된 것이다.
박남기 계획재정부장만 해도 그렇다. 재정부장이라는 게 무역상들의 선생인데, 위에서 시키는 대로 했다가 억울하게 죽은 것 아니냐. 돈을 벌어서 내면 결국 자기들이 다치니까 나서지 않는 거다. 새로운 지도부가 먹는 문제를 해결하려면 이 사람들의 애국심이 필요한데,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한다면 절대 움직일 수 없을 것이다. 이미 너무 많은 피를 봐서 아무도 나서지 않을 것이다. 그걸 두고 비사회주의다 뭐다 개인 욕만 하고 단속만 강화하는 것은 지도부에서 문제를 해결할 의지가 없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새 지도부에서는 먹고 사는 정책을 체계적으로 세워야 한다. 장군님께서 계속 하시든 새 지도부로 완전히 바뀌든지, 중국에 완전히 엎어져서 광산 다 팔고, 땅 팔고 항구 팔고 해서 3년 정도 먹고 사는 문제는 해결될 것 같다. 중국은 “니가 한 발짝 와야 나도 한 발짝 가겠다”는 식이라서 지금은 우리 심장을 꺼내 마음을 보이는 수준으로까지 나서려고 하고 있다.
중층 간부들은 자신들뿐만 아니라 후손들이 안전하게 먹고 살 수 있으려면 어떤 변화든 환영한다. 그 변화가 중국으로 가는 것이든 미국으로 가는 것이든 상관없다. 다만 남조선은 아니다. 남조선으로 가면 (자신들의) 안전이 보장 되지 않는다. 현재는 중국을 선택했으니 그렇게 가는 거다. 중앙당이 선택한 것을 따라가면 자신들에게는 아무 문제가 없다. 통일은 공화국이 제일 목 터져 부르지만 지금 상태에서 통일 같은 건 바라지 않는다. 우리에겐 당장 3-5년이 문제고, 안보와 먹는 문제 해결이 급선무다. 남조선은 미국으로 가는 징검다리일 뿐 우리에게 큰 대상이 되지 못한다.”
중앙당 간부, 식량난 실태 인터뷰
중앙당 간부에게 현 식량난 실태에 대해 몇 가지 물었다. 다음은 인터뷰 내용을 간추려 실은 것이다.
질문: 현재 식량 상황에 대해 말해 달라.
답변: 식량난은 몇 년 중에 올해가 최악이다. 고난의 행군시기보다 어렵다. 작년 평양에서 열린 당대표자회 후부터 올해 2월 16일 명절 전까지 전체 배급량을 다 합쳐도 1개월 분량이 안 된다. 2008년에는 봄부터 죽었다면, 지금은 1월에 얼어 죽는 것으로 시작했다. 잘 사는 사람들의 집에서도 얼어 죽었으니 가난한 사람들의 집에서는 어떻겠는가. 작년 여름부터 보안서, 보위부 등 법 기관 사람들의 가족 배급이 다 끊겼다. 당사자한테만 겨우 배급이 나왔다. 량강도나 자강도, 함북도 어디를 봐도 다 마찬가지였다. 작년 여름부터 배급을 주지 않으니 그 가족들 중에 도강자가 생길 정도였다. (강제 송환돼 온) 여자들 심문한 걸 보면, 오빠가 보안서에 일한다거나 세대주가 보위부원인 경우들도 많았다.
질문: 잘 사는 사람들도 얼어 죽었다니 이해가 잘 안 된다.
답변: 실례를 들겠다. 올해 해외대표부 사람들이 유독 평양에 많이 왔다 갔다. 다들 부모들의 장례를 치러야 한다는 이유였다. 그 집 부모들이 왜 죽었나 하고 보니 얼어 죽었다. 아파트 층집에 사는 로친들이 오르락내리락 하기 어려우니까 난방도 안 되는 집에서 떨다가 죽은 것이다. 1월부터 2월 3일까지 이런 사람들 부모들도 배급을 하루도 못 받았다. 그러나 해외에 있는 자식들이 돈을 보내주니까 식량은 있었다. 집에 입쌀과 밀가루는 있어서 먹을 것이 모자라지는 않았다. 자식들이 해외에서 전기장판을 사서 보낸다고 해도 전기가 들어오지 않으니 소용이 없다. 내가 아는 사람도 자기가 들어와 보니 하루에 전기가 2시간도 안 오는 걸 보고 자기 어머니가 동사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하더라. 먹고 산다는 집에서 이 정도니, 먹을 것도 없는 집들은 더 말해서 무엇 하겠는가.
질문: 식량난이 이렇게 심한 이유는 무엇인가?
답변: 2007년도, 2008년도, 2009년도 차례차례 누적된 결과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화폐개혁까지 맞아 그 여파에서 벗어나지 못해 더 심해진 것이다. 황해북도부터 함경북도까지 모두 어렵지만 특히 어려운 곳이 함남, 강원도, 황해도이다. 평안남도도 괜찮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뚜껑을 열어보니 농사를 싹 망쳤다. 가을(걷이) 끝나고 거둔 것이 별로 없었다. 우리들끼리 하는 얘기가 있다. 1990년대가 ‘고난의 행군’이었다면, 2006년부터 시작해 2007년과 2008년 최고로 바빴을 때를 ‘고난의 강행군’, 지금은 ‘고난의 초강행군’이라고 말이다.
질문: 결국 수해 때문인가?
답변: 작년에 큰물피해가 심하긴 했다. 인명피해는 별로 없었지만 물자 피해가 심했다. 하지만 그게 다는 아니다. 아까도 말했지만 2007년 수해, 2008년 수해, 그리고 2009년 화폐개혁으로 몇 년 간 몰린 끝에 지금 사정이 더 나빠진 것이다. 그 중에서도 사람들 주머니를 다 털어버린 화폐 개혁 영향이 컸다고 본다. 작년 1월에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나. 그때는 식량이 부족해서 죽은 게 아니고, 시장에 쌀이 풀리지도 않고 시장에 나와도 살 돈이 없어서 죽은 거였다. 이런 누적된 상황에서 작년 수해가 가중된 것이라고 보면 된다. 특히 황해남북도 군량미 기지에서 피해가 심했다. 거기다 대고 군량미를 걷을 것 같지 못하니까 민심도 얻고 당 신임도 얻으려고 군량미를 안 걷겠다고 한 것이다. 농민들이야 만세 불렀지만 중국에서 해결하려던 게 잘 안 됐다. 중국에서 한 번에 많이 주는 것이 아니고, 찔끔찔끔 주다보니 군부 식량위기를 자초한 것이나 마찬가지가 됐다.
질문: 그러면 군대 식량상황은 어느 정도인가?
답변: 지금은 군대들이 먹을 게 없는 상황이다. 온 조선이 굶는 게 작년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이때까지 늘 심각했다. 다른 점이라면 지금은 군대들도 먹을 게 없는 상황이라는 것이다. 당대표자회가 끝나고 새로운 외교 정책을 펴면서 군량미 정도는 해결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아까도 말했지만, 그래서 군량미를 안 걷겠다고 하면서 백성들의 어려움도 살펴주고 김정은 군사부위원장의 체면도 살릴 수 있겠거니 했다. 작년에는 수확량이 얼마 안 되니까 그냥 바로 농민들에게 분배한 것이다. 농민들은 6개월 이상 식량을 분배받았다. 그런데 군량미가 해결이 잘 안 되니까 올해 1월부터 전국적으로 다시 군량미를 거두기 시작한 거다. 적게는 2-3개월, 많게는 4-5개 월치를 군량미로 뺏어갔다. 그래도 지금가지는 농민들은 살만했다. 적든 어떻든 식량을 갖고 있으니까. 하지만 앞으로가 문제다. 이제 농민까지 굶기 시작하니까. 지금은 군량미는 어느 정도 해결됐다고 본다. 배불리 먹고 할 정도는 아니지만 해외에서 들어온 양이면 해결됐다고 할 수 있다. 2월 16일 명절 때까지 꾸준히 식량이 들어왔다. 입쌀은 무역 형식으로 많이 들어왔고, 옥수수, 밀가루 등 곡물들이 주로 들어왔다. 주로 중국에서 들어왔다. 정부에서 정식으로 돈을 주고 사들인 것도 있고, 해외에서 무역대표부들이나 일군들이 보낸 것도 있다. 60% 이상이 옥수수이고 나머지는 쌀과 밀가루 등이다. 이 정도면 군량미는 만족스럽지는 않아도 어느 정도 해결된 거라고 볼 수 있다. 문제는 주민들에 대한 대책이 아직 아무 것도 없다는 점이다.
질문: 밖에서는 주민들이 불만이 높아지면 소요사태를 일으키지 않겠느냐 보고 있다.
답변: 중국으로 도망치는 사람이 한 둘 더 생길 수는 있어도 옛날처럼 많이 넘어가지는 않을 것이다. 또 집단으로 보안서나 관공서들을 습격하는 일들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밖에서 말들이 많지만 우리 보기에 내부는 상당히 안정되어 있다. 우리 안에서는 백성들이 간부들 욕도 하고, 단속하는 보안원들하고 싸움이 붙기도 하고 그렇지만, 식구들끼리 싸우는 것과 똑같다. 제 식구들끼리 다투다가도 다른 집에서 손가락질하고 욕하고, 빨리 망하라고 저주하면 누구랑 싸우겠나. 제 식솔들끼리 싸우겠나, 제 집을 욕하는 상대와 싸우겠나. 우리 조선을 너무 헐하게 보면 안 된다. 백성들이 오랜 식량난과 경제난으로 생활이 피폐해지고, 불만이 높아진 것은 사실이지만, 바깥에서 생각하는 그런 식은 아니다.
남조선하고 관계가 나빠지면 질수록 통제는 오히려 심해진다. 남조선과 관계가 좋았을 때는 오히려 이동도 자유롭고 비법장사라고 해도 장사를 요령껏 잘 했는데, 지금은 근본 통제가 심하고 돌아다니지를 못하니 떠도는 소문도 예전보다 늦고 소식들도 잘 알려지지 않는다. 시장도 예전만큼 활발하지 않으니, 다른 지방 소식도 잘 모른다. 후계자가 새로 올라서면서 통제가 더 심해진 것도 있지만 남조선에서 하도 이상한 소식들을 내다나니 단속이 부쩍 심해졌다.
질문: 백성들은 당장 생존의 문제가 아니라면 관심을 안 갖는다고 해도, 중간간부들의 불만도 상당히 높아졌다고 들었다.
답변: 그건 사실이다. 그동안 배급을 꼬박꼬박 받던 간부들도 작년부터 가족 배급이 싹 끊기다나니 간부들도 불안해졌다. 사상이 변질된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도 밖에서 보는 것과는 다르다. 다 자기가 잘 먹고 잘 살기 위해 비사회주의 일들을 한다는 점에서 사상이 변질됐다고 볼 수 있지만, 조국에 대한 충성심을 완전히 버린다는 건 말도 안 된다. 중간간부들이 나라에서 애국을 강조하고 모범을 보이라고 아무리 강조해도, 미국과 손을 잡든 중국과 손을 잡든 자주권이든 주체성이든 상관없다는 식으로 어떻게 하면 자기와 자기 가족, 그리고 자기 단위에서 먹고 살까를 우선해 고민하고 있기는 하다. 자기 이익이 없으면 움직이지를 않는다. 애국심이 약해진 거다. 그렇다고 조국을 버리지는 않는다. 자기 살 궁리만 하고 충성심이 없어진 것을 사상 변질이라고 보는 것이지, 조국을 버릴 정도로 반역자들이 됐다는 게 아니다. 전혀 다른 문제다.
질문: 앞으로의 전망을 어떻게 보는가?
답변: 지금은 당 간부 외에는 수도 평양까지 배급이 끊긴 상태다. 2008년에는 농민들이 많이 죽었지만, 지금은 직장 노동자들이 사는 게 험악하다. 화폐 개혁 전만 해도 도시 노동자들은 장사로 먹고 살 수 있었다. 하지만 화폐개혁으로 돈을 다 버리게 되고 나서 먹고 사는 게 힘들어졌다. 외화를 갖고 있던 사람들이야 타격을 안 받아서 지금도 잘 쓰고 잘 살지만, 내화를 갖고 있던 사람들은 다 망했다. 다시 회복하기에는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동안에 도시 노동자들, 특히 부업거리를 못 찾은 노동자들이 많이 힘들어질 것이다. 우리들이 보기에는 고난의 행군 때와 비슷하다. 그 때도 도시에서 먼저 굶어죽었다. 물론 그 때 경험한 게 있기 때문에 헐하게(쉽게) 죽지는 않겠지만, 이렇게 가다가는 4-6월 춘궁기에 또 많은 희생이 생기지 않겠느냐 생각한다. 우리 정부에서는 그러기 전에 중국과 담판을 지어 설비투자를 받고, 식량문제를 해결하려고 할 것이다.
청진에서 제일 못 사는 ‘부윤노동자구’
함경북도 청진 부윤노동자구 사람들은 스스로를 “청진에서 제일 못 살고 한심한 곳”에 산다고 말한다. 부윤구역은 지대가 높고 땅이 메말라 농사가 잘 안 되는 지역이다. 겨우 소토지 농사를 한다는 게 감자이고, 기장이나 두부콩, 간혹 짓는 옥수수 농사가 전부이다. 돌밭에서 캐낸 감자알이라야 굵지도 않지만, 그래도 감자가 제일 많이 나서 주식처럼 먹는다. 특별히 시장에 내다팔만한 게 생산되는 지역도 아니고, 도시 사람들처럼 남다르게 장사 수완이 뛰어난 사람들이 있는 것도 아니라 다들 가난하게 살아간다. 겨우 장사를 할 줄 안다는 집들에서는 거위, 닭, 오리 등 가축을 키워 시장에 파는 정도이다. 생계가 곤란한 집들이 많다보니, 먹는 것도 변변찮다. 몰래 술을 만들어 파는 집에 가서 술을 빚고 남은 술깡치나 두부 찌꺼기를 얻어다 겨우 입에 풀칠할 정도이다. 공장에 다니는 사람들이라고 더 나은 것도 아니다. 작년부터 해를 넘겨서까지 한 푼도 못 받고, 1kg 배급도 못 받아본 직장이 수두룩하다. 올해 1월에 부윤구역 사망자들 중에 굶어죽은 사람은 노인이 7명, 노동자가 5명이었다. 그 외 자연사나 병사한 사람들도 있지만, 대부분 여러 날 굶다가 죽은 사람들이었다. 부윤1동에 사는 정태산(가명)씨는 2월 16일 명절에도 아무 배급 없이 지나가자 더 이상 쌀독에서 긁어낼 알곡이 없어 아직 스무살도 안 된 딸들을 불러 앉히고는 도강하라고 권했다. “이 땅에 살려고 아무리 발버둥치고 애써도 굶어죽는 길 밖에 없는 것 같다.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을 바에는 한 번이라도 배불리 실컷 먹고 죽는 게 낫지 않겠느냐. 너희라도 건너가서 어떻게든 살아 남으라”는 것이 그의 눈물겨운 부정(父情)이었다. 정씨의 딸들은 아버지가 눈물 흘리며 하는 간곡한 청에도 차마 도강하지 못했다. 도강도 능력이 있는 집들이나 해보는 것이지, 정씨네처럼 아무 것도 없는 집들에서는 그냥 풍문처럼 “중국에 가면 개들도 이밥 먹고 산다”는 말을 듣고 그런 세상이 과연 있는가 하며 꿈을 꿀 뿐이다. 그만큼 부윤구역은 도강마저 시도해 볼 수 없는 가난한 이들이 모여 사는 곳이다. “현재 어려움은 작년까지의 어려움과 다르다. 사람을 말려 죽일 지경이다. 언제 죽을지 그저 기다리는 기분”이라며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주민들도 있다. 부윤구역 주민들의 고단한 생활은 하루하루 가까스로 연장되고 있는 듯 했다.
순천 영예군인들도 아사
평안남도 순천시 일용품공장에서 지난 1월 기간 동안 사망자는 7명인데, 그 가운데 3명은 먹을 게 없어 열흘 이상 출근을 하지 못하다가 굶어 죽었다. 모두 군복무 기간 동안 몸을 다쳐 장애를 입은 영예군인들이었다. 식량 사정이 좋지 않다보니 영예군인이라고 해서 특별 공급이 나오지는 않았다. 온전하지 못한 몸으로 변변하게 장사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다른 활동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어서 배급이 없으면 가장 막막한 처지의 사람들이기도 하다. ‘영예군인’이라는 칭호를 주었달 뿐, 일용품공장에 배치한 뒤 특별한 당의 배려가 없어 굶어죽는 상황이 발생하고 있다.
수북동에 사는 김현철(가명)씨는 아내가 시장에서 중국산 잡화를 넘겨 파는 소매 장사로 겨우 입에 풀칠하고 산다고 했다. 김씨는 10년 전에 탄광에서 군복무를 하다가 왼쪽 다리를 크게 다쳐 영예군인 판정을 받았다. 영예군인이 된 처음 몇 해는 그래도 당의 배려로 본인 앞으로 얼마간 식량이 나왔는데, 일용품공장에 배치된 뒤에는 공장이 잘 안 돌아가다 보니 가뭄의 콩 나듯이 어쩌다 한 번 배급이 나오고 계속 감감무소식이었다. 남편의 월급과 배급이 없다보니, 아내가 지금까지 가장의 짊을 떠 안을 수밖에 없었다. 제법 돈벌이가 잘 되던 때도 있었지만, 화폐개혁으로 돈을 다 날린 뒤로는 회복이 안 돼 끙끙대고 있다. 하루 종일 시장에서 잡화를 팔아봐야 하루 1,800원-2,000원 벌이밖에 안 된다. 입쌀 1kg도 사먹지 못할 돈이다. 그러니 쌀 사먹을 엄두는 도저히 못 내고, 겨우 옥수수나 옥수수국수를 사먹는다. 올해 소학교 3학년과 4학년인 아이들의 학교에서는 나무와 석탄 값을 내라고 독촉하고, 인민반에서는 하루가 멀다 하고 찾아와 퇴비를 내라고 성화여서 정신을 못 차릴 지경이다. 김씨는 “영예군인이니 배려를 더 해달라고 말할 염치는 없다. 나라가 전반적으로 다 어려운데, 특별히 나만 더 생각해달라고 하면 그건 욕심이다. 하지만 뭐 내라고만 좀 안 해도 좋겠다. 여기저기서 걷어가는 것이 많아 안해가 번 하루 수입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다. 장사 밑돈이 계속 줄어들어 앞으로 어떻게 먹고 살지 모르겠다. 이대로 가다가는 올해 4월이 되기 전에 장사 밑천을 모두 말아먹을 것 같아 걱정이다. 우리가 굶어죽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면, 그냥 내버려두었으면 좋겠다. 안 그러면 이미 죽은 사람들 뒤를 우리도 따라갈 수밖에 없다”며 사회 과제의 부담을 호소했다. 그러면서 자신은 아내를 잘 만난 덕분에 아내의 힘으로 지금껏 살아왔지만, 역시 영예군인들인 다른 직장 동료들 중에 아내가 없거나 변변한 부업거리를 찾지 못한 집에서는 꼼짝없이 굶어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며 안타까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