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선집중
재중탈북여성 수향씨
수향씨는 15년 전에 중국에 건너온 함흥 사람이다. 고난의 행군 시기에 가족을 모두 잃고 혼자 남았을 때, 누군가 중국에 가면 살 길이 생긴다는 얘기에 사람들을 따라 두만강을 건넜다. 맨발 바람에 다 찢겨진 옷을 걸치고, 미친 여자처럼 동네에 들어선 그녀를 마음씨 좋은 조선족 아주머니가 거뒀다. 수북이 쌓인 흰 쌀밥에 장국을 그때처럼 많이 먹은 적이 없었다. 지금 다시 그렇게 먹으라면 못 먹을 양인데, 꾸역꾸역 입속으로 밀어 넣었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일주일 넘게 먹고 자고, 일어나서는 다시 먹고 자고, 또 일어나 먹고 자고 했다.
그녀는 지금의 남편을 만나 결혼식도 올리지 못하고, 가정을 꾸렸다. 시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시고 중풍으로 거동을 못하는 칠순 넘은 시어머니를 모시고 산다. 남편은 소아마비를 앓은 장애인으로, 휠체어 생활을 하고 있다. 이런 집이라도 몸을 의탁할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이냐며, 수향씨는 매일 감사한 마음뿐이다. 150cm도 안 되는 작은 체구에 일을 어찌나 열심히 하는지 동네 사람들의 평이 아주 좋다. 남의 집 농사일을 거들고 받는 50위안 정도의 품삯이 하루 생계비이다. 똑같은 일을 하고도 조선족은 100위안, 150위안씩 받아가는 것에 비하면 50위안 넘게 받지 못하는 신세가 한탄스러울 만도 한데, 수향씨는 동네 사람들이 착하다고 말한다. 계란 한 줄이라도 더 챙겨주는 동네사람들도 많고, 공안이 들이닥쳤을 때도 몇 번이나 위기를 넘길 수 있었던 것도 동네 사람들 덕분이라고 했다. 이제는 지역 공안도 장애인 집안이라며 수향씨네는 넘어가주지만, 다른 여자들은 붙잡혀서 강제 송환되거나 다른 동네로 도망갔다. 같은 동네에 조선에서 온 여자들이 스무 명도 넘게 있었는데, 지금은 몇 없다고 했다. 조선족 남성과 탈북 여성 사이에 태어난 아이들 중에는 엄마 얼굴도 기억하지 못하는 아이들이 많다. 10살 아들아이를 키우는 엄마가 되고 보니, 자기는 아이를 매일 볼 수 있으니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고 말한다.
아들 천일이는 원체 가리는 것 없이 잘 먹어 건강하고, 애가 싹싹해서 친구들도 많고 공부도 잘 해서 늘 고마웠는데, 요즘은 학교 때문에 걱정이다. 동네에 소학교가 있어 그럭저럭 다녔는데, 올해는 학교가 없어져 학교를 다니려면 더 큰 도시로 나가야 한다. 정부에서 특별히 최저생활보조금을 주는 것 말고는 수향씨의 품삯정도로는 아이를 가르칠 수 없다. 수향씨는 “(중국)정부에서 특별히 보살펴줘서 우리 천일이(아들)는 호적등록을 했지만, 저는 아직 불법도강체류자 신분입니다. 떳떳한 신분이 되면 도시에 나가 식당일을 하면서라도 우리 아들 뒷바라지를 할 수 있을 텐데… 우리 아들에게 너무 미안합니다. 이런 엄마라서…”라고 뒷말을 잇지 못하고 눈시울을 붉혔다.
한밤중 문 두드린 탈북 모자
지난 2월 22일 한밤중, 중국 길림성 장백현의 농촌 마을에 사는 박씨 할아버지는 개가 너무 심하게 짖는 통에 문을 열어보니 달빛에 어슴푸레 사람 그림자 둘이 어른거렸다. 누구냐고 물었더니, 조선에서 왔다는 한 여자의 떨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들과 둘이 왔는데, 살려 달라면서 문 좀 열어달라고 애원했다. 박씨는 조선 사람을 도와주면 나라에서 벌금도 물리고 잡아간다며 다른 집을 알아보라고 하고는 문을 잠갔다. 그래도 모자는 계속 문을 두드리며 중국에 친척도 없고, 지금 너무 춥고 배고파서 그러니 하룻밤만이라도 재워달라고 애걸했다. 전에 멋모르고 조선 사람 도와줬다가 물건과 돈을 도둑맞은 기억도 나고, 괜히 도와줬다가 벌금내고 심하면 구류장까지 가게 되는데, 다 늙은 나이에 그런 고역을 치를 이유가 없다고 스스로를 합리화해 다시 매몰차게 거절했다. 요즘 괜히 조선 사람을 숨겨주었다가 발각돼 2,000위안 이상의 벌금을 물었다는 얘기도 심심찮게 들려오던 차였다. 공안들은 탈북자를 신고하면 200위안의 포상금을 준다고 선전했지만 사람이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쪽박은 깨지 말라고 차마 신고를 할 생각은 없었다. 신고를 안 하는 것만으로도 다행으로 알라며, 문을 꽁꽁 닫아걸고는 불도 끄고 텔레비전도 꺼버리고는 자리에 누웠다. 얼마간 더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나다가 곧 조용해졌다.
자리에 눕고 보니, 요즘 날도 추운데 저러다 내 집 문 앞에서 얼어 죽으면 어쩌나 또 다른 걱정이 밀려왔다. 갔는지 문이라도 열어 확인하고 싶었지만, 괜히 얼굴 보면 마음이 약해질 것 같아 그러지도 못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사방에서 손전지 불빛이 어수선하게 흔들리며 남자들이 소리를 질러댔고 여자와 아이의 울부짖는 소리가 들렸다. 차가 떠나는 소리가 들리더니 다시 세상은 조용해졌다. 박씨 영감이 집밖에 나가보니, 잠을 자던 마을 사람들 몇몇이 그 소란을 지켜보던 중이었다. 요즘에는 1990년대 말처럼 진짜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들이 넘어오다가 잡히는 것 같다고 동네사람들이 술렁댔다. 박씨는 미안해지는 마음을 억누르고, 조용히 돌아섰다.
탈북자 모습, 고난의 행군 때와 똑같아
지난 2월 19일 한밤중, 중국 길림성 도문시 인근 농촌 마을은 어둠 속에 잠겨있었다. 조용한 마을에 갑자기 개들이 미친 듯 짖어대기 시작하더니 좀처럼 그치지 않았다. 황씨는 무슨 일인가 싶어 외등을 켜고 바깥을 내다보았다. 문 앞에 시커먼 물체가 쓰러져있었다. 사람이었다. 자고 있던 남편을 깨워 사람을 들춰 업어 집안으로 옮겼다. 따뜻한 가마 목에 눕혀놓으니, 그제야 산 사람의 모습이 나타난다. 주름이 자글자글하고 작달만한 키에 뼈 가죽만 남은 여자였는데, 덩굴 같은 머리카락에 언제 씻었는지 온통 땟국 물이 줄줄 흘렀다. 솜이불을 꺼내 덮어주고 목뒤에 베개를 받쳐주었더니 몸을 힘겹게 뒤척이더니 스스로 편안한 자리를 찾아갔다. 한 시간쯤 지났을까, 꽁꽁 얼었던 몸이 좀 풀렸던지 여자가 하얗게 보풀 일어나는 입술로 물을 찾았다. 여자를 반쯤 일으켜 따뜻한 물을 한 사발 들이키게 했다. 물을 마시고 나더니 먹을 것을 달라고 했다. 여자가 정신을 잃고 누워있던 사이에 황씨는 이미 먹을 것을 준비해두었던 터라 배추김치와 쌀밥, 돼지고기를 넣고 끓인 된장국, 삶은 계란을 수북하게 담아 내주었다. 여자는 말도 없이 허겁지겁 음식을 집자마자 꾸역꾸역 입으로 밀어 넣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렇게 급하게 먹으면 체한다고 천천히 먹으라고 아무리 말을 해도 여자 귀에는 안 들리는 모양이었다. 여자는 삶은 계란 20알을 앉은 자리에서 모두 해치웠다. 두 눈 뜨고 보면서도 믿을 수 없는 광경이어서 황씨 부부는 입을 떡 벌리고 더 이상 아무 말을 못했다. 밥 두 공기에 된장국도 두 사발이나 들이켰다. 어디에 그 많은 음식이 들어갈 자리가 있었는지, 먹을 것을 아무리 집어넣어도 채워지지 않을 것 같았다. 식사가 끝나가자, 마침내 여자의 밥 먹는 속도가 느려졌다. 황씨는 15년 전에도 꼭 이런 모습의 탈북자를 본 적이 있다. 고난의 행군 시기에 두만강을 건너 탈북자들이 막 밀려오던 시기였다.
말문이 막힌 황씨는 조용히 상을 물리고, 씻기려고 솜이 터진 잠바를 벗기니 너덜너덜한 정체불명의 옷이 나타났다. 온몸이 때에 절어있었고, 냄새도 지독했다. 씻은 물이 시커멓고 너무 더러워서 저절로 얼굴이 찌푸려졌다. 깨끗한 내의와 털스웨터에 솜바지, 흰 양말 등 자기가 입던 옷을 입히고 나니 완전히 딴 사람 같았다. 여자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이렇게 맛있는 밥을 먹어 보고, 따뜻하고 편안한 옷을 입어 보았다고 했다. 강 건너 온성에 사는데, 세대주는 한 달 전에 세상을 떠났고 두 딸은 하루밤새 종적을 감추었는데, 중국으로 건너온 것 같다고 했다. 혼자 살기가 너무 힘들어 가깝든 멀든 어지간히 아는 사람은 다 찾아다니며 하소연하고 구걸해 보았지만 다들 사는 형편이 고만고만해서 도움을 받을 수 없었다. 집안 살림도구들을 모두 내다팔고, 나중에는 집까지 팔고 나니 오갈 데 없는 신세가 됐다. 죽기 전에 딸들의 목소리만이라도 듣고 싶어 가다 죽는 한이 있어도 좋으니 무작정 가보자 결심하고 떠난 길이라고 했다. 그리고는 계속 울었다. 이 넓은 땅 어디에서 두 딸을 찾을 수 있겠는가.
무작정 도강하다 붙잡히는 사람 늘어
도강 중개자나 국경경비대와의 약속 없이 한밤중에 무작정 강을 건너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최근 몇 년 새 국경경비가 강화되어 돈 있는 사람들이 국경경비대와 중국 쪽 공안을 끼고 넘나들었을 뿐 혈혈단신 무작정 도강하는 경우는 별로 없었다. 그러나 최근 식량사정이 극한으로 악화되면서 무작정 강을 건너는 사람들이 생긴 것이다. 도중에 붙잡히거나 도강에 성공했더라도 목적지가 없이 건너간 사람들이라 중국 주민들의 신고로 붙잡히는 사례가 많다. 도문, 룡정, 장백 등 중국 쪽 국경지역에서는 요즘 들어 한밤중에 아무 집이나 들어가 구걸을 하다가 신고를 당하는 북한 사람들이 늘고 있는데, 다들 곧 쓰러질 것처럼 쇠약하다는 것이 중국 경찰들의 얘기다.
삼엄한 국경 경비에도 탈북 감행
삼엄한 감시 속에서도 도강자가 계속 발생하고 있다. 지난 2월 17일, 함경북도 무산에서 5명 식구가 사라져 인근 국경지역을 전면 통제하고 수색을 벌였으나 아직까지 행방이 묘연하다. 같은 인민반 주민들은 일주일 넘도록 아무 소식이 없는 건 이미 놓친 것이라고 수군거렸다. 잡았다면 인민반회의에서 즉각 통보하고, 조국을 배신하고 불법 도강하는 자들의 말로가 어떻게 되는지 똑똑히 보라며 으름장을 놓았을 텐데, 아직 일언반구도 없다. 온성에서는 지난 2월 22일, 서른한 살 농장원을 도강혐의로 붙잡았다. 마약밀매매 사건에 연루돼 체포령이 내려진 수배자였다. 이번에 붙잡히면 빠져나갈 구멍이 없는 것을 알고, 국경경비가 잠시 소홀한 틈을 타 다짜고짜 두만강을 건너다 붙잡혔다. 같은 날, 도강에 성공한 리경옥(가명)씨는 중국 쪽에서 붙잡혔다. 관할 보안서에서는 중국 측에 도강자 리경옥씨의 신상자료를 제공하고, 범죄자를 인도해줄 것을 요청했다. 지난 2월 23일, 회령에서는 망양 쪽으로 도강을 시도하던 여성 2명이 붙잡혔다. 두 사람은 전거리교화소에서 복역하다가 지난 2월 대사령시기에 사면되어 나온 탈북여성들로, 사회에 나온 지 얼마 안 돼 다시 탈북을 감행한 죄로 더 엄중한 처벌을 받게 될 것으로 보인다. 최근 한동안 뜸하던 탈북난민이 다시 늘어나는 것은 고난의 행군 시기를 능가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식량사정이 악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경비를 강화해도 식량사정이 풀리지 않는 한 탈북은 줄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 주민들의 얘기다.
탈북자 문제, 다시 생각해 본다
조선족 집에 들어가 단숨에 삶은 계란 스무 개를 먹었다는 탈북여성의 이야기는 12년 전 좋은벗들이「두만강을 건너온 사람들」에서 소개한 탈북난민들의 얘기와 똑같았다. 12년 전 당시, 중국 동북부지역 2,479개 마을에서 만난 2만8천여 명이 먹을 것을 찾아 떠나왔다고 했다. 우리는 그들을 ‘식량난민’이라 불렀다. 불법도강자로 볼 것이냐, 조국을 배신한 반역자로 볼 것이냐, 자유를 열망하는 난민으로 볼 것이냐, 정치적으로 접근하면 각 국의 첨예한 입장 차이만 확인하게 된다. 그러나 인도주의 차원에서 접근하면, 각국의 협조와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 사람들이다.
● 북한과 중국 정부는 식량난이 해결될 때까지 생존차원에서 식량을 구하기 위해 조․중국경을 넘나드는 식량난민이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도록 통행제한을 완화해야 한다.
● 북한 정부는 강제 송환되거나 자유 귀향한 탈북유민을 처벌하지 않아야 한다.
● 중국 정부는 탈북유민에 대한 수색, 연행, 강제송환을 중지해야 한다.
● 한국 정부는 탈북유민에 대한 인도주의 지원과 북한에 부족한 식량과 의약품 등을 충분히 지원해 추가 발생을 막아야 한다.
● 언론은 탈북자 보도를 함에 있어 북한이나 중국을 비난할 목적으로 난민문제를 다루어서는 안 된다. 12년 전, 좋은벗들이 식량난민 실태 조사를 발표하면서 제안했던 내용이다. 12년이 지난 지금에도 이 주장을 다시 해야 한다는 사실이 서글프다.
■ 사회
재중탈북여성 수향씨
수향씨는 15년 전에 중국에 건너온 함흥 사람이다. 고난의 행군 시기에 가족을 모두 잃고 혼자 남았을 때, 누군가 중국에 가면 살 길이 생긴다는 얘기에 사람들을 따라 두만강을 건넜다. 맨발 바람에 다 찢겨진 옷을 걸치고, 미친 여자처럼 동네에 들어선 그녀를 마음씨 좋은 조선족 아주머니가 거뒀다. 수북이 쌓인 흰 쌀밥에 장국을 그때처럼 많이 먹은 적이 없었다. 지금 다시 그렇게 먹으라면 못 먹을 양인데, 꾸역꾸역 입속으로 밀어 넣었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일주일 넘게 먹고 자고, 일어나서는 다시 먹고 자고, 또 일어나 먹고 자고 했다.
그녀는 지금의 남편을 만나 결혼식도 올리지 못하고, 가정을 꾸렸다. 시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시고 중풍으로 거동을 못하는 칠순 넘은 시어머니를 모시고 산다. 남편은 소아마비를 앓은 장애인으로, 휠체어 생활을 하고 있다. 이런 집이라도 몸을 의탁할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이냐며, 수향씨는 매일 감사한 마음뿐이다. 150cm도 안 되는 작은 체구에 일을 어찌나 열심히 하는지 동네 사람들의 평이 아주 좋다. 남의 집 농사일을 거들고 받는 50위안 정도의 품삯이 하루 생계비이다. 똑같은 일을 하고도 조선족은 100위안, 150위안씩 받아가는 것에 비하면 50위안 넘게 받지 못하는 신세가 한탄스러울 만도 한데, 수향씨는 동네 사람들이 착하다고 말한다. 계란 한 줄이라도 더 챙겨주는 동네사람들도 많고, 공안이 들이닥쳤을 때도 몇 번이나 위기를 넘길 수 있었던 것도 동네 사람들 덕분이라고 했다. 이제는 지역 공안도 장애인 집안이라며 수향씨네는 넘어가주지만, 다른 여자들은 붙잡혀서 강제 송환되거나 다른 동네로 도망갔다. 같은 동네에 조선에서 온 여자들이 스무 명도 넘게 있었는데, 지금은 몇 없다고 했다. 조선족 남성과 탈북 여성 사이에 태어난 아이들 중에는 엄마 얼굴도 기억하지 못하는 아이들이 많다. 10살 아들아이를 키우는 엄마가 되고 보니, 자기는 아이를 매일 볼 수 있으니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고 말한다.
아들 천일이는 원체 가리는 것 없이 잘 먹어 건강하고, 애가 싹싹해서 친구들도 많고 공부도 잘 해서 늘 고마웠는데, 요즘은 학교 때문에 걱정이다. 동네에 소학교가 있어 그럭저럭 다녔는데, 올해는 학교가 없어져 학교를 다니려면 더 큰 도시로 나가야 한다. 정부에서 특별히 최저생활보조금을 주는 것 말고는 수향씨의 품삯정도로는 아이를 가르칠 수 없다. 수향씨는 “(중국)정부에서 특별히 보살펴줘서 우리 천일이(아들)는 호적등록을 했지만, 저는 아직 불법도강체류자 신분입니다. 떳떳한 신분이 되면 도시에 나가 식당일을 하면서라도 우리 아들 뒷바라지를 할 수 있을 텐데… 우리 아들에게 너무 미안합니다. 이런 엄마라서…”라고 뒷말을 잇지 못하고 눈시울을 붉혔다
한밤중 문 두드린 탈북모자
지난 2월 22일 한밤중, 중국 길림성 장백현의 농촌 마을에 사는 박씨 할아버지는 개가 너무 심하게 짖는 통에 문을 열어보니 달빛에 어슴푸레 사람 그림자 둘이 어른거렸다. 누구냐고 물었더니, 조선에서 왔다는 한 여자의 떨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들과 둘이 왔는데, 살려 달라면서 문 좀 열어달라고 애원했다. 박씨는 조선 사람을 도와주면 나라에서 벌금도 물리고 잡아간다며 다른 집을 알아보라고 하고는 문을 잠갔다. 그래도 모자는 계속 문을 두드리며 중국에 친척도 없고, 지금 너무 춥고 배고파서 그러니 하룻밤만이라도 재워달라고 애걸했다. 전에 멋모르고 조선 사람 도와줬다가 물건과 돈을 도둑맞은 기억도 나고, 괜히 도와줬다가 벌금내고 심하면 구류장까지 가게 되는데, 다 늙은 나이에 그런 고역을 치를 이유가 없다고 스스로를 합리화해 다시 매몰차게 거절했다. 요즘 괜히 조선 사람을 숨겨주었다가 발각돼 2,000위안 이상의 벌금을 물었다는 얘기도 심심찮게 들려오던 차였다. 공안들은 탈북자를 신고하면 200위안의 포상금을 준다고 선전했지만 사람이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쪽박은 깨지 말라고 차마 신고를 할 생각은 없었다. 신고를 안 하는 것만으로도 다행으로 알라며, 문을 꽁꽁 닫아걸고는 불도 끄고 텔레비전도 꺼버리고는 자리에 누웠다. 얼마간 더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나다가 곧 조용해졌다.
자리에 눕고 보니, 요즘 날도 추운데 저러다 내 집 문 앞에서 얼어 죽으면 어쩌나 또 다른 걱정이 밀려왔다. 갔는지 문이라도 열어 확인하고 싶었지만, 괜히 얼굴 보면 마음이 약해질 것 같아 그러지도 못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사방에서 손전지 불빛이 어수선하게 흔들리며 남자들이 소리를 질러댔고 여자와 아이의 울부짖는 소리가 들렸다. 차가 떠나는 소리가 들리더니 다시 세상은 조용해졌다. 박씨 영감이 집밖에 나가보니, 잠을 자던 마을 사람들 몇몇이 그 소란을 지켜보던 중이었다. 요즘에는 1990년대 말처럼 진짜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들이 넘어오다가 잡히는 것 같다고 동네사람들이 술렁댔다. 박씨는 미안해지는 마음을 억누르고, 조용히 돌아섰다.
탈북자 모습, 고난의 행군 때와 똑같아
지난 2월 19일 한밤중, 중국 길림성 도문시 인근 농촌 마을은 어둠 속에 잠겨있었다. 조용한 마을에 갑자기 개들이 미친 듯 짖어대기 시작하더니 좀처럼 그치지 않았다. 황씨는 무슨 일인가 싶어 외등을 켜고 바깥을 내다보았다. 문 앞에 시커먼 물체가 쓰러져있었다. 사람이었다. 자고 있던 남편을 깨워 사람을 들춰 업어 집안으로 옮겼다. 따뜻한 가마 목에 눕혀놓으니, 그제야 산 사람의 모습이 나타난다. 주름이 자글자글하고 작달만한 키에 뼈 가죽만 남은 여자였는데, 덩굴 같은 머리카락에 언제 씻었는지 온통 땟국 물이 줄줄 흘렀다. 솜이불을 꺼내 덮어주고 목뒤에 베개를 받쳐주었더니 몸을 힘겹게 뒤척이더니 스스로 편안한 자리를 찾아갔다. 한 시간쯤 지났을까, 꽁꽁 얼었던 몸이 좀 풀렸던지 여자가 하얗게 보풀 일어나는 입술로 물을 찾았다. 여자를 반쯤 일으켜 따뜻한 물을 한 사발 들이키게 했다. 물을 마시고 나더니 먹을 것을 달라고 했다. 여자가 정신을 잃고 누워있던 사이에 황씨는 이미 먹을 것을 준비해두었던 터라 배추김치와 쌀밥, 돼지고기를 넣고 끓인 된장국, 삶은 계란을 수북하게 담아 내주었다. 여자는 말도 없이 허겁지겁 음식을 집자마자 꾸역꾸역 입으로 밀어 넣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렇게 급하게 먹으면 체한다고 천천히 먹으라고 아무리 말을 해도 여자 귀에는 안 들리는 모양이었다. 여자는 삶은 계란 20알을 앉은 자리에서 모두 해치웠다. 두 눈 뜨고 보면서도 믿을 수 없는 광경이어서 황씨 부부는 입을 떡 벌리고 더 이상 아무 말을 못했다. 밥 두 공기에 된장국도 두 사발이나 들이켰다. 어디에 그 많은 음식이 들어갈 자리가 있었는지, 먹을 것을 아무리 집어넣어도 채워지지 않을 것 같았다. 식사가 끝나가자, 마침내 여자의 밥 먹는 속도가 느려졌다. 황씨는 15년 전에도 꼭 이런 모습의 탈북자를 본 적이 있다. 고난의 행군 시기에 두만강을 건너 탈북자들이 막 밀려오던 시기였다.
말문이 막힌 황씨는 조용히 상을 물리고, 씻기려고 솜이 터진 잠바를 벗기니 너덜너덜한 정체불명의 옷이 나타났다. 온몸이 때에 절어있었고, 냄새도 지독했다. 씻은 물이 시커멓고 너무 더러워서 저절로 얼굴이 찌푸려졌다. 깨끗한 내의와 털스웨터에 솜바지, 흰 양말 등 자기가 입던 옷을 입히고 나니 완전히 딴 사람 같았다. 여자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이렇게 맛있는 밥을 먹어 보고, 따뜻하고 편안한 옷을 입어 보았다고 했다. 강 건너 온성에 사는데, 세대주는 한 달 전에 세상을 떠났고 두 딸은 하루밤새 종적을 감추었는데, 중국으로 건너온 것 같다고 했다. 혼자 살기가 너무 힘들어 가깝든 멀든 어지간히 아는 사람은 다 찾아다니며 하소연하고 구걸해 보았지만 다들 사는 형편이 고만고만해서 도움을 받을 수 없었다. 집안 살림도구들을 모두 내다팔고, 나중에는 집까지 팔고 나니 오갈 데 없는 신세가 됐다. 죽기 전에 딸들의 목소리만이라도 듣고 싶어 가다 죽는 한이 있어도 좋으니 무작정 가보자 결심하고 떠난 길이라고 했다. 그리고는 계속 울었다. 이 넓은 땅 어디에서 두 딸을 찾을 수 있겠는가.
무작정 도강하다 붙잡히는 사람 늘어
도강 중개자나 국경경비대와의 약속 없이 한밤중에 무작정 강을 건너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최근 몇 년 새 국경경비가 강화되어 돈 있는 사람들이 국경경비대와 중국 쪽 공안을 끼고 넘나들었을 뿐 혈혈단신 무작정 도강하는 경우는 별로 없었다. 그러나 최근 식량사정이 극한으로 악화되면서 무작정 강을 건너는 사람들이 생긴 것이다. 도중에 붙잡히거나 도강에 성공했더라도 목적지가 없이 건너간 사람들이라 중국 주민들의 신고로 붙잡히는 사례가 많다. 도문, 룡정, 장백 등 중국 쪽 국경지역에서는 요즘 들어 한밤중에 아무 집이나 들어가 구걸을 하다가 신고를 당하는 북한 사람들이 늘고 있는데, 다들 곧 쓰러질 것처럼 쇠약하다는 것이 중국 경찰들의 얘기다.
삼엄한 국경 경비에도 탈북 감행
삼엄한 감시 속에서도 도강자가 계속 발생하고 있다. 지난 2월 17일, 함경북도 무산에서 5명 식구가 사라져 인근 국경지역을 전면 통제하고 수색을 벌였으나 아직까지 행방이 묘연하다. 같은 인민반 주민들은 일주일 넘도록 아무 소식이 없는 건 이미 놓친 것이라고 수군거렸다. 잡았다면 인민반회의에서 즉각 통보하고, 조국을 배신하고 불법 도강하는 자들의 말로가 어떻게 되는지 똑똑히 보라며 으름장을 놓았을 텐데, 아직 일언반구도 없다. 온성에서는 지난 2월 22일, 서른한 살 농장원을 도강혐의로 붙잡았다. 마약밀매매 사건에 연루돼 체포령이 내려진 수배자였다. 이번에 붙잡히면 빠져나갈 구멍이 없는 것을 알고, 국경경비가 잠시 소홀한 틈을 타 다짜고짜 두만강을 건너다 붙잡혔다. 같은 날, 도강에 성공한 리경옥(가명)씨는 중국 쪽에서 붙잡혔다. 관할 보안서에서는 중국 측에 도강자 리경옥씨의 신상자료를 제공하고, 범죄자를 인도해줄 것을 요청했다. 지난 2월 23일, 회령에서는 망양 쪽으로 도강을 시도하던 여성 2명이 붙잡혔다. 두 사람은 전거리교화소에서 복역하다가 지난 2월 대사령시기에 사면되어 나온 탈북여성들로, 사회에 나온 지 얼마 안 돼 다시 탈북을 감행한 죄로 더 엄중한 처벌을 받게 될 것으로 보인다. 최근 한동안 뜸하던 탈북난민이 다시 늘어나는 것은 고난의 행군 시기를 능가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식량사정이 악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경비를 강화해도 식량사정이 풀리지 않는 한 탈북은 줄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 주민들의 얘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