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선집중
“김치가 벌써 떨어져서 걱정”
원산시 갈마동에 사는 순영씨는 반년 식량이라는 김치가 떨어졌다고 울상이다. 작년에 뙈기밭에서 배추와 무를 제법 많이 거뒀는데 살림이 궁해서 시장에 많이 내다 팔았다. 김장할 때 돈 있는 집에서는 마늘이나 맛내기, 고춧가루는 기본이고 낙지나 멸치, 돼지고기까지 온갖 양념으로 맛있게 담지만 순영씨네는 고춧가루 값이 너무 비싸 구입할 엄두를 못 냈다. “작년에 김장을 담으려고 고춧가루 매대에 갔는데 입이 떡 벌어졌다. 1kg에 14,000원에서 16,000원까지 하던 때였다. 시장에 나가서 kg당 무 400원, 배추 700원씩 팔아 kg에 1,000원하는 옥수수 사먹으며 연명하던 우리 집으로서는 고춧가루 버무린 김치는 꿈도 꾸기 어려웠다”고 했다. 하는 수없이 소금에 절여 백김치를 해먹었는데, 그나마도 양이 모자라 겨울을 날 수 있을까 싶었다. “꼭 김치가 문제가 아니다. 일상적으로 먹는 조미료를 구하기가 너무 어렵다. 기름이나 소금, 맛내기 같은 것을 사려고 해도 돈이 너무 많이 들어서 제대로 못 먹는다. 기름 한 병에 500g하는데, 옥수수기름으로 사면 한 3천원 든다. 맛내기 한 봉지에 500원 하는데 그거 사먹기도 힘드니까 기름 먹는 날은 정말 명절 만난 기분”이라며, 기초식품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고 하소연했다. “다른 건 몰라도, 나라에서 된장이나 소금, 간장 같은 것은 제대로 주면 좋겠다. 그래서 봄철 내내 백김치라도 원 없이 먹어보고 싶다”고 했다
음식쓰레기라도 먹을 수 있다면
민석이는 화교 집에 가서 밤새 내린 눈을 마당에서 큰길까지 치웠다. 중국인 아주머니가 인민폐 1위안을 주어 아침밥은 옥수수떡으로 요기했다. 손바닥만 한 옥수수떡 두 개를 사서 씹지도 않고 꿀꺽꿀꺽 삼켜버렸다. 배는 여전히 고팠지만, 자꾸 졸음이 쏟아진다고 했다. 민석이는 3월이 됐지만 아직 날이 차니 아무데나 누우면 안 된다고 했다. 아무리 꽃제비라도 되는대로 누웠다가는 몸을 다친다고 했다. 잠을 잘만한 곳이 있느냐고 묻자, 머뭇거리며 말을 안 하려고 했다. 겨울에는 어디서 지냈냐고 했더니, 아파트 계단 밑에서 잤다고 했다.
“그 아파트에는 보위부 과장이 살고 있다. 그 집은 먹을 것이 남아 음식물 찌꺼기가 많이 나오는데 재수 좋은 날에는 먹다 남은 밥이나 아직도 구수한 냄새가 있는 뼈다귀들이 나올 때도 있다. 남들이 보면 말 난다고 그 집 아주머니가 주머니에 넣어서 밤중에 슬금슬금 나와서 사람들 눈이 잘 안 띄는 곳에다가 멀리 내다버린다. 잘 포착해서 따라가면 내가 먼저 차지할 수가 있다. 그 집에서 버린 음식 찌꺼기로 잘 하면 이틀 이상 포식할 수도 있다. 그런 날은 진짜 복 받은 날”이라고 했다.
민석이는 그래서 그 아파트 계단을 떠나지 못하고 있다. 그 집 아줌마가 언제 음식찌꺼기를 버릴 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민석이는 “그 아주머니가 큰 주머니를 겨드랑이에 끼고 계단을 내려와 컴컴한 골목으로 사라지면 내가 막 쫓아가요. 아니면 또 밤새 눈이 내려서 아침에 화교집에서 눈을 치우고 받은 돈으로 산 떡이 달구지 바퀴만큼 커졌다가 기차 바퀴만큼 되었다가, 다음엔 밤하늘의 보름달이 되고, 낮 하늘의 태양이 되는 꿈을 온 밤 내내 꿔요. 뻘겋고 땅땅한 옥수수떡을 따려고 온밤 내내 뛰어다니는데, 한 번도 제대로 먹어본 적은 없어요. 꿈에서라도 실컷 먹어보면 좋으련만. 우리 조국이 강성대국이 되면 옥수수떡은 배불리 먹을 수 있겠죠? 빨리 그런 날이 왔으면 좋겠어요.”라며 요즘 자주 꾸는 꿈 얘기를 했다. 민석이는 구제소에 들어간 게 벌써 여섯 번이나 되지만, 남이 먹다 버린 음식이라도 먹을 수 있는 지금이 좋다고 한다.
꽃제비 왕초도 배고픈 세월
조웅씨는 작년 가을까지만 해도 원산 시장을 돌아다니는 꽃제비들의 우두머리였다. 그런데 요즘에는 휘하의 아이들이 구걸을 제대로 못해서 음식이나 돈을 잘 받지 못하고 있다. 게다가 평안남도와 함경남도에서 건너온 꽃제비들이 원산시내를 휘젓고 다니면서 영역이 축소됐다. 종일 역과 시장 사이를 열 번도 넘게 오가면서 동냥을 얻어 보았지만, 잘 걸려들지 않는다. 왕초가 못 먹을 정도면, 아래 아이들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왕초가 그래도 큰 건을 해서 나눠주는 맛이 있어야 그 밑의 아이들도 붙어 있을 텐데, 한 달 넘게 건질 게 없자 자연 하나둘 떠나버리고 혼자 남았다.
이름이 멋있다고 얘기하자, 이름보다는 배가 고파서 눈앞이 가물가물하다며 배고픔을 호소했다. 요기를 하고 정신을 차리자, 이름 얘기를 했다. 조웅이란 이름은 3대 독자라서 그의 부모님이 잘 커서 위대한 조국의 영웅이 되라는 바램으로 지어준 것이라고 했다. 부모님의 애틋한 사랑을 받으며 남부러울 것 없이 자라던 그였으나, 고난의 행군 말엽 시기에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도 곧 아버지 뒤를 따랐다. 소학교를 졸업하지 못한 채 11살 나이에 졸지에 꽃제비가 되었다고 했다. “꽃제비 신세가 되긴 했으나, 죽지 않고 지금까지 살아 있는 것은 내 운명이라고 할까, 살아남을 정도의 재간은 있었다고 할까. 올해로 꽃제비 경력 12년째”라고 사뭇 자랑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올해 스물 세 살의 조웅씨는 신장이 153cm여서 ‘콩알이’라는 별명으로 더 알려져 있다. 그는 “내가 키는 작아도 얼마나 튼실한지 사람들이 모른다. 내 아래에 똘마니들만 한 20명은 됐었다. 세월이 좋을 때는 똘마니들이 고이는 것만으로도 끼니를 때울 수도 있었다”고 또 자랑했다. 똘마니 스무명은 지금 어디에 있느냐고 했더니 금세 시무룩해진다. “어디서 듣지도 보지도 못하던 놈들이 나타나서 같이 나눠먹으려니 구역이 작아졌다. 원산시내에 꽃제비들이 불어나면서 먹을 것도 모자라고, 통 질서가 잡히지 않는다. 이 생 뜨내기들을 붙잡아 한판 붙어서 멀리 내쫓아야겠는데, 한참 애도기간이고 해서 손대지 않고 있는 것”이라고 했다. 어디 감히 자기 영역 안에서 어슬렁거리느냐며 애도기간이 끝나는 대로 반드시 손을 보겠다고 별렀다. 그러나 요즘 새로 들어온 꽃제비 무리 중에 건장한 자들이 몇몇 보여서 “꿈속에서도 온몸이 졸아드는 기분”이라며, 불안한 마음을 살짝 내비쳤다.
똥을 기다리는 아이들
정학이는 오늘도 원산역에 나왔다. 인민반 화장실을 아무리 돌아다니며 기웃거리고 기다려 봐도 대변을 보는 사람이 없었다. 어쩌다 한 명씩 들어가도 소변이나 보고, 가래침을 퉤퉤 뱉고는 휑하니 가버릴 뿐이다. 역에 가면 정학이처럼 대변을 기다리는 아이들이 많다. 그래도 인내심 있게 기다리면 한두 명 분은 건질 때가 있다. 벌써 세 명의 아이들이 오돌 오돌 떨면서 화장실 어귀에 앉아있었다. 해가 정오를 넘어갈 때쯤 군인 두 명이 밥을 먹은 지 얼마 안됐는지 잰 걸음으로 화장실을 찾아왔다. 앞쪽에 앉아있던 두 아이가 작은 부삽과 이 빠진 사발 한 그릇씩을 들고 작업 준비 상태에 들어갔다. 들어갔던 두 군인이 나오기 바쁘게 아이들이 달려 들어갔다가 얼마 후에 나왔다. 정학이는 차례를 놓쳐서 부러운 마음에 쳐다보았다. 한 명은 새까맣게 마른 상태의 실줄 같은 똥 한 가닥을 사발에 담아왔다. 다른 한 아이는 “쌍간나새끼”욕을 하더니 철퍼덕 자리에 앉았다. 빈손이었다. 한 군인은 새까맣게 마르긴 했어도 똥 한 오라기라도 쌌지만, 다른 한 명은 오줌만 싸고 나왔으니 작업할 건덕지가 없었던 거다. 한 줄이라도 똥을 얻은 아이는 빙긋 웃으며 누더기 헝겊으로 조심스럽게 싸안아들고 자리를 떴다. 허탕을 친 아이는 다음 사람이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학교에서 똥거름을 세 양동이씩 바치라고 해서 화장실마다 벌어지는 풍경이었다. 똥거름을 못한 아이는 한 양동이에 150원을 주고 샀다. 정학이도 자기가 학교에 가려고 똥거름을 수집하는 게 아니라, 150원이라도 벌어보려고 나선 것이다. 자기네 학급반장인 성찬이에게 매일 두 양동이씩 가져다주면, 성찬이 엄마가 얼마간 돈을 주었다. 어떤 때는 사탕이나 과자, 어떤 때는 공책이나 연필 등의 물건으로 주기도 했다. 정학이로서는 하루벌이치고는 꽤나 짭짤한 수입이다. 하지만 춥고 지루한데다 다른 아이들한테 뺏기지 않으려고 긴장하기 때문에 쉽게 지친다. 기차를 타는 사람들은 많은데, 똥을 누는 사람은 왜 그렇게 드문지 정학이로선 답답할 뿐이다. 모두들 자기처럼 물만 많이 먹고 밥은 안 먹어서 똥을 못 누는 것인지 궁금하다고 했다.
똥거름 때문에 학교 못 가는 아이
새 학기가 시작되었지만, 아직 학교에 가지 않는 아이들이 있다. 세 양동이 분량의 똥거름을 학교에 바치라는데 아직까지 구하지 못한 아이들이다. 부모들은 똥거름만 바치라고 하면 모르겠는데, 바치라는 게 하도 많아서 학교 보내기를 포기했다. 연필과 공책 등 기본 학습도구와 교복 등 아이들이 써야 할 물건들은 물론이고, 땔감나무, 석탄, 벽돌, 시멘트, 장갑, 양말, 덧버선, 유리, 못, 비누, 빗자루 등등 그야말로 다종다양하다. 아이들은 집에 돌아가면서“내일 아침에는 무엇을 가져갈 수 있을까 어디에서 구할지”고민이다. 잘 사는 집에서는 여기저기서 구해보지만, 일반 집에서는 아버지가 공장 기물이라도 훔쳐다 주는 판이고, 이도저도 없는 집에서는 아예 학교에 안 보내는 것이다.
강원도 원산시 신흥동에 사는 서정희(가명)씨는 중학교 3학년에 다니는 아들이 공부도 잘하고, 운동도 잘해서 선생님과 친구들 사이에 인기가 좋은데, 학급간부를 못 해봤다고 했다. 중학교에 올라간 뒤로는 해가 바뀔 때마다 선생님들이 강국(아들의 가명)이 같은 애가 안하면 할 사람이 누가 있겠느냐며 언질을 준적은 많지만,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 담임교사에게 금품이나 술, 담배, 식량 같은 것을 눈치껏 바치지 못한 데다 학교에서 내준 과업을 제대로 해 간 적이 없기 때문이다. 정희씨가 중고자전거 장사로 돈 좀 벌 때는 학급과제를 도맡아 하다시피하기도 했지만, 그것도 화폐교환조치 이전의 일이다. 학급반장을 해야 상급학교 진학에 유리한 터라, 이래저래 신경이 많이 쓰이지만 당장 먹고 사는 문제가 더 급하니 속이 쓰릴 뿐이다.
같은 학급의 철룡이(가명)는 새 학기가 시작됐어도 학교에 나가지 않고 있다. 작년에도 나간 날보다 안 나간 날이 더 많았다. 사정이 좀 괜찮아지면 학교에 나갔다가, 선생님이 과업을 왜 안 내느냐고 닦달하거나 애들이 따돌림하면 다시 그만 두는 식이었다. 아버지는 그럴 바에야 아예 학교를 그만두고 아버지를 도와 뙈기밭 농사를 도우라고 하셨지만, 어머니는 그래도 중학교를 나오는 게 좋지 않겠느냐며 가능한 학교를 다니라고 한다. 그래서 출석과 결석을 번갈아하고 있지만, 나갈 때보다 안 나갈 때가 훨씬 많다. 이번에는 역시나 똥거름을 마련하지 못해서 학교 가기를 포기했다. 철룡이는“강국이는 돈이라도 냈지만, 그 돈이면 우리 네 식구 옥수수죽을 일주일 더 먹지요”라며 학교에 안 간다고 했다.
똥거름보다 교육이 더 중요하다
흙보산 비료를 마련하지 못해서 학교에 안가는 아이들이 많다. 일명 ‘똥거름’을 구하려고 공동화장실 앞에서 하루 종일 진을 치고 앉아 누군가가 똥 누기를 기다리는 웃지 못 할 이야기도 들린다. 농업문제 해결이 아무리 국시(國是)라고 해도, 아이들에게는 배울 권리가 있고, 국가는 가르쳐야할 책임이 있다. 나라의 교육수준은 나라의 미래를 결정한다. 북한은 엘리트 교육에 주력한다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사회 모든 부문이 고르게 발전하려면 일반 주민들의 평균 교육 수준이 높아져야 한다. 머리 좋고 교육열이 높기로는 북한도 뒤지지 않으므로, 국가의 투자만 제대로 이루어진다면 얼마든지 다방면에서 훌륭한 일꾼들을 배출해낼 수 있을 것이다. 일단 북한은 무상교육 체제의 기틀이 있어 교육 기회가 비교적 고르게 보장된다는 커다란 장점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오랜 경제난으로 무상교육 제도가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게 되고, 학부모들의 세외부담으로 운영되고 있는 실정이다. 당국은 각종 세외부담 때문에 학교 보내기 무섭다는 학부모들의 하소연에 보다 심중하게 귀 기울여야 한다. 단순히 세외부담을 줄이라는 지시를 내리는 것은 해결방법이 아니다. 학교들이 자체적으로 학교 운영경비를 마련해 교사들의 월급을 책임져야하는 현 구조를 바꿔야 한다. 당장 완전한 무상교육은 어렵더라도, 국가예산에서 교육비를 최우선 배정해서 일선학교들에 운영비부터 지급해야 할 것이다.
■ 식량소식
“김치가 벌써 떨어져서 걱정”
원산시 갈마동에 사는 순영씨는 반년 식량이라는 김치가 떨어졌다고 울상이다. 작년에 뙈기밭에서 배추와 무를 제법 많이 거뒀는데 살림이 궁해서 시장에 많이 내다 팔았다. 김장할 때 돈 있는 집에서는 마늘이나 맛내기, 고춧가루는 기본이고 낙지나 멸치, 돼지고기까지 온갖 양념으로 맛있게 담지만 순영씨네는 고춧가루 값이 너무 비싸 구입할 엄두를 못 냈다. “작년에 김장을 담으려고 고춧가루 매대에 갔는데 입이 떡 벌어졌다. 1kg에 14,000원에서 16,000원까지 하던 때였다. 시장에 나가서 kg당 무 400원, 배추 700원씩 팔아 kg에 1,000원하는 옥수수 사먹으며 연명하던 우리 집으로서는 고춧가루 버무린 김치는 꿈도 꾸기 어려웠다”고 했다. 하는 수없이 소금에 절여 백김치를 해먹었는데, 그나마도 양이 모자라 겨울을 날 수 있을까 싶었다. “꼭 김치가 문제가 아니다. 일상적으로 먹는 조미료를 구하기가 너무 어렵다. 기름이나 소금, 맛내기 같은 것을 사려고 해도 돈이 너무 많이 들어서 제대로 못 먹는다. 기름 한 병에 500g하는데, 옥수수기름으로 사면 한 3천원 든다. 맛내기 한 봉지에 500원 하는데 그거 사먹기도 힘드니까 기름 먹는 날은 정말 명절 만난 기분”이라며, 기초식품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고 하소연했다. “다른 건 몰라도, 나라에서 된장이나 소금, 간장 같은 것은 제대로 주면 좋겠다. 그래서 봄철 내내 백김치라도 원 없이 먹어보고 싶다”고 했다
음식쓰레기라도 먹을 수 있다면
민석이는 화교 집에 가서 밤새 내린 눈을 마당에서 큰길까지 치웠다. 중국인 아주머니가 인민폐 1위안을 주어 아침밥은 옥수수떡으로 요기했다. 손바닥만 한 옥수수떡 두 개를 사서 씹지도 않고 꿀꺽꿀꺽 삼켜버렸다. 배는 여전히 고팠지만, 자꾸 졸음이 쏟아진다고 했다. 민석이는 3월이 됐지만 아직 날이 차니 아무데나 누우면 안 된다고 했다. 아무리 꽃제비라도 되는대로 누웠다가는 몸을 다친다고 했다. 잠을 잘만한 곳이 있느냐고 묻자, 머뭇거리며 말을 안 하려고 했다. 겨울에는 어디서 지냈냐고 했더니, 아파트 계단 밑에서 잤다고 했다.
“그 아파트에는 보위부 과장이 살고 있다. 그 집은 먹을 것이 남아 음식물 찌꺼기가 많이 나오는데 재수 좋은 날에는 먹다 남은 밥이나 아직도 구수한 냄새가 있는 뼈다귀들이 나올 때도 있다. 남들이 보면 말 난다고 그 집 아주머니가 주머니에 넣어서 밤중에 슬금슬금 나와서 사람들 눈이 잘 안 띄는 곳에다가 멀리 내다버린다. 잘 포착해서 따라가면 내가 먼저 차지할 수가 있다. 그 집에서 버린 음식 찌꺼기로 잘 하면 이틀 이상 포식할 수도 있다. 그런 날은 진짜 복 받은 날”이라고 했다.
민석이는 그래서 그 아파트 계단을 떠나지 못하고 있다. 그 집 아줌마가 언제 음식찌꺼기를 버릴 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민석이는 “그 아주머니가 큰 주머니를 겨드랑이에 끼고 계단을 내려와 컴컴한 골목으로 사라지면 내가 막 쫓아가요. 아니면 또 밤새 눈이 내려서 아침에 화교집에서 눈을 치우고 받은 돈으로 산 떡이 달구지 바퀴만큼 커졌다가 기차 바퀴만큼 되었다가, 다음엔 밤하늘의 보름달이 되고, 낮 하늘의 태양이 되는 꿈을 온 밤 내내 꿔요. 뻘겋고 땅땅한 옥수수떡을 따려고 온밤 내내 뛰어다니는데, 한 번도 제대로 먹어본 적은 없어요. 꿈에서라도 실컷 먹어보면 좋으련만. 우리 조국이 강성대국이 되면 옥수수떡은 배불리 먹을 수 있겠죠? 빨리 그런 날이 왔으면 좋겠어요.”라며 요즘 자주 꾸는 꿈 얘기를 했다. 민석이는 구제소에 들어간 게 벌써 여섯 번이나 되지만, 남이 먹다 버린 음식이라도 먹을 수 있는 지금이 좋다고 한다.
■ 사회
똥을 기다리는 아이들
정학이는 오늘도 원산역에 나왔다. 인민반 화장실을 아무리 돌아다니며 기웃거리고 기다려 봐도 대변을 보는 사람이 없었다. 어쩌다 한 명씩 들어가도 소변이나 보고, 가래침을 퉤퉤 뱉고는 휑하니 가버릴 뿐이다. 역에 가면 정학이처럼 대변을 기다리는 아이들이 많다. 그래도 인내심 있게 기다리면 한두 명 분은 건질 때가 있다. 벌써 세 명의 아이들이 오돌 오돌 떨면서 화장실 어귀에 앉아있었다. 해가 정오를 넘어갈 때쯤 군인 두 명이 밥을 먹은 지 얼마 안됐는지 잰 걸음으로 화장실을 찾아왔다. 앞쪽에 앉아있던 두 아이가 작은 부삽과 이 빠진 사발 한 그릇씩을 들고 작업 준비 상태에 들어갔다. 들어갔던 두 군인이 나오기 바쁘게 아이들이 달려 들어갔다가 얼마 후에 나왔다. 정학이는 차례를 놓쳐서 부러운 마음에 쳐다보았다. 한 명은 새까맣게 마른 상태의 실줄 같은 똥 한 가닥을 사발에 담아왔다. 다른 한 아이는 “쌍간나새끼”욕을 하더니 철퍼덕 자리에 앉았다. 빈손이었다. 한 군인은 새까맣게 마르긴 했어도 똥 한 오라기라도 쌌지만, 다른 한 명은 오줌만 싸고 나왔으니 작업할 건덕지가 없었던 거다. 한 줄이라도 똥을 얻은 아이는 빙긋 웃으며 누더기 헝겊으로 조심스럽게 싸안아들고 자리를 떴다. 허탕을 친 아이는 다음 사람이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학교에서 똥거름을 세 양동이씩 바치라고 해서 화장실마다 벌어지는 풍경이었다. 똥거름을 못한 아이는 한 양동이에 150원을 주고 샀다. 정학이도 자기가 학교에 가려고 똥거름을 수집하는 게 아니라, 150원이라도 벌어보려고 나선 것이다. 자기네 학급반장인 성찬이에게 매일 두 양동이씩 가져다주면, 성찬이 엄마가 얼마간 돈을 주었다. 어떤 때는 사탕이나 과자, 어떤 때는 공책이나 연필 등의 물건으로 주기도 했다. 정학이로서는 하루벌이치고는 꽤나 짭짤한 수입이다. 하지만 춥고 지루한데다 다른 아이들한테 뺏기지 않으려고 긴장하기 때문에 쉽게 지친다. 기차를 타는 사람들은 많은데, 똥을 누는 사람은 왜 그렇게 드문지 정학이로선 답답할 뿐이다. 모두들 자기처럼 물만 많이 먹고 밥은 안 먹어서 똥을 못 누는 것인지 궁금하다고 했다.
똥거름 때문에 학교 못 가는 아이
새 학기가 시작되었지만, 아직 학교에 가지 않는 아이들이 있다. 세 양동이 분량의 똥거름을 학교에 바치라는데 아직까지 구하지 못한 아이들이다. 부모들은 똥거름만 바치라고 하면 모르겠는데, 바치라는 게 하도 많아서 학교 보내기를 포기했다. 연필과 공책 등 기본 학습도구와 교복 등 아이들이 써야 할 물건들은 물론이고, 땔감나무, 석탄, 벽돌, 시멘트, 장갑, 양말, 덧버선, 유리, 못, 비누, 빗자루 등등 그야말로 다종다양하다. 아이들은 집에 돌아가면서“내일 아침에는 무엇을 가져갈 수 있을까 어디에서 구할지”고민이다. 잘 사는 집에서는 여기저기서 구해보지만, 일반 집에서는 아버지가 공장 기물이라도 훔쳐다 주는 판이고, 이도저도 없는 집에서는 아예 학교에 안 보내는 것이다.
강원도 원산시 신흥동에 사는 서정희(가명)씨는 중학교 3학년에 다니는 아들이 공부도 잘하고, 운동도 잘해서 선생님과 친구들 사이에 인기가 좋은데, 학급간부를 못 해봤다고 했다. 중학교에 올라간 뒤로는 해가 바뀔 때마다 선생님들이 강국(아들의 가명)이 같은 애가 안하면 할 사람이 누가 있겠느냐며 언질을 준적은 많지만,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 담임교사에게 금품이나 술, 담배, 식량 같은 것을 눈치껏 바치지 못한 데다 학교에서 내준 과업을 제대로 해 간 적이 없기 때문이다. 정희씨가 중고자전거 장사로 돈 좀 벌 때는 학급과제를 도맡아 하다시피하기도 했지만, 그것도 화폐교환조치 이전의 일이다. 학급반장을 해야 상급학교 진학에 유리한 터라, 이래저래 신경이 많이 쓰이지만 당장 먹고 사는 문제가 더 급하니 속이 쓰릴 뿐이다.
같은 학급의 철룡이(가명)는 새 학기가 시작됐어도 학교에 나가지 않고 있다. 작년에도 나간 날보다 안 나간 날이 더 많았다. 사정이 좀 괜찮아지면 학교에 나갔다가, 선생님이 과업을 왜 안 내느냐고 닦달하거나 애들이 따돌림하면 다시 그만 두는 식이었다. 아버지는 그럴 바에야 아예 학교를 그만두고 아버지를 도와 뙈기밭 농사를 도우라고 하셨지만, 어머니는 그래도 중학교를 나오는 게 좋지 않겠느냐며 가능한 학교를 다니라고 한다. 그래서 출석과 결석을 번갈아하고 있지만, 나갈 때보다 안 나갈 때가 훨씬 많다. 이번에는 역시나 똥거름을 마련하지 못해서 학교 가기를 포기했다. 철룡이는“강국이는 돈이라도 냈지만, 그 돈이면 우리 네 식구 옥수수죽을 일주일 더 먹지요”라며 학교에 안 간다고 했다.
꽃제비 왕초도 배고픈 세월
조웅씨는 작년 가을까지만 해도 원산 시장을 돌아다니는 꽃제비들의 우두머리였다. 그런데 요즘에는 휘하의 아이들이 구걸을 제대로 못해서 음식이나 돈을 잘 받지 못하고 있다. 게다가 평안남도와 함경남도에서 건너온 꽃제비들이 원산시내를 휘젓고 다니면서 영역이 축소됐다. 종일 역과 시장 사이를 열 번도 넘게 오가면서 동냥을 얻어 보았지만, 잘 걸려들지 않는다. 왕초가 못 먹을 정도면, 아래 아이들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왕초가 그래도 큰 건을 해서 나눠주는 맛이 있어야 그 밑의 아이들도 붙어 있을 텐데, 한 달 넘게 건질 게 없자 자연 하나둘 떠나버리고 혼자 남았다.
이름이 멋있다고 얘기하자, 이름보다는 배가 고파서 눈앞이 가물가물하다며 배고픔을 호소했다. 요기를 하고 정신을 차리자, 이름 얘기를 했다. 조웅이란 이름은 3대 독자라서 그의 부모님이 잘 커서 위대한 조국의 영웅이 되라는 바램으로 지어준 것이라고 했다. 부모님의 애틋한 사랑을 받으며 남부러울 것 없이 자라던 그였으나, 고난의 행군 말엽 시기에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도 곧 아버지 뒤를 따랐다. 소학교를 졸업하지 못한 채 11살 나이에 졸지에 꽃제비가 되었다고 했다. “꽃제비 신세가 되긴 했으나, 죽지 않고 지금까지 살아 있는 것은 내 운명이라고 할까, 살아남을 정도의 재간은 있었다고 할까. 올해로 꽃제비 경력 12년째”라고 사뭇 자랑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올해 스물 세 살의 조웅씨는 신장이 153cm여서 ‘콩알이’라는 별명으로 더 알려져 있다. 그는 “내가 키는 작아도 얼마나 튼실한지 사람들이 모른다. 내 아래에 똘마니들만 한 20명은 됐었다. 세월이 좋을 때는 똘마니들이 고이는 것만으로도 끼니를 때울 수도 있었다”고 또 자랑했다. 똘마니 스무명은 지금 어디에 있느냐고 했더니 금세 시무룩해진다. “어디서 듣지도 보지도 못하던 놈들이 나타나서 같이 나눠먹으려니 구역이 작아졌다. 원산시내에 꽃제비들이 불어나면서 먹을 것도 모자라고, 통 질서가 잡히지 않는다. 이 생 뜨내기들을 붙잡아 한판 붙어서 멀리 내쫓아야겠는데, 한참 애도기간이고 해서 손대지 않고 있는 것”이라고 했다. 어디 감히 자기 영역 안에서 어슬렁거리느냐며 애도기간이 끝나는 대로 반드시 손을 보겠다고 별렀다. 그러나 요즘 새로 들어온 꽃제비 무리 중에 건장한 자들이 몇몇 보여서 “꿈속에서도 온몸이 졸아드는 기분”이라며, 불안한 마음을 살짝 내비쳤다.